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본문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글쓴이, 미즈타니 오사무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저, 친구 왕따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저, 본드 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손목 그은 적 있어요.”
“저, 공갈한 적 있어요.”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어제까지의 일들은 전부 괜찮단다.
“죽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오늘부터 나랑 같이 생각을 해보자.
일본 야간고등학교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미즈타니 선생님과 '밤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5-9시 야간학교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은 거리로 나선다.
'밤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낮에 살지 못하는 아이들은 밤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밤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한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 그래 보인다.
그러나 밤의 자유는 외롭고, 고독하고, 아프고, 두려운 것이다.
아이들은 쉽게 알아챈다.
그렇지만 밤의 어둠은 이미 '낙인찍힌' 아이들에게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는 세계다.
아이들은 낮으로 돌아오고프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기꺼이 그 손을 붙잡고 싶다.
미즈타니 선생님은 그래서 12년 동안 줄곧 밤의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왔다.
수업이 끝나고 밤 11시부터 날이 밝을 아침까지
거리의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밥을 함께 먹고, 그이들 곁을 지켜준다.
덕분에 잃은 것도 있다.
조직폭력배에서 아이을 데려오기 위해 '손가락'을 잃었고,
옆구리에 칼을 맞았다. 수도 없이 협박과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런 선생님의 한결같은 행동을 보고 조직폭력배들은 '밤의 교사 미즈타니'라고 부르며
아이들을 양보(?)하고 있다.
그래서 얻은 것도 많다.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밤의 아이들'이다.
그이들의 친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보다는 현재를 산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강하다.
아이들은 불이 뜨거운지 먼저 손을 대어보고 싶다.
아이들은 실수도 많고 모든 것에서 약하다.
아이들은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경험한다.
아이들의 모든 행동에는 관심을 요구한다.
어른들이 보아주지 않으면,
어른들이 손 내밀어 주지 않으면,
어른들이 '낙인찍기'를 그만 둔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낮'으로 돌아올 것이다.
미즈타니 선생님은 아이들을 '꽃을 피우는 씨앗'으로 대한다.
그러기에 절대로 야단치지 않는다.
어떤 꽃씨라도 심는 사람이 제대로 심고, 시간을 들여서 정성스레 가꾸면
반드시 꽃을 피운다.
아이들이라는 꽃도 그렇다.
온 사회가, 매스컴이, 어른들이, 서로서로가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정성껏 돌본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만약 꽃을 활짝 피우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리거나 말라버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어른들의 잘못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피해자다.
어른들이 약하듯,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듯
아이들 역시 더 약하고, 더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타인과 마음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다.
“미즈타니 선생, 그를 죽인 건 당신이에요. 본드와 각성제는 그렇게 간단히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의존증이라는 병입니다. 병은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그 병을 ‘사랑’의 힘으로 고치려고 했소. 하지만 병을 ‘사랑’ 이나 ‘벌’의 힘으로 고칠 수 있습니까? 고열로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애정을 담아 힘껏 껴안아준다고 열이 내려갑니까? ‘너의 근성이 해이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야단을 친다고 열이 내려갑니까? 병을 고치는 건 우리 의사들의 일이랍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행복한 사람이든, 불행한 사람이든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에는 많은 행복과 슬픔이 함께한다.
그리고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만남이란,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밤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들이 나에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많은 어른들과 대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더러운 어른들이 너무 많다. 소중한 아이들을 낮의 세계에서 쫓아내는 어른들, 소중한 아이들을 어두운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어른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구하고 싶다”고 말만 하는 어른들....나는 그런 어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아이들은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경험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실패를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게는 아이들의 과거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현재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시간이 걸려도 좋고,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도 좋으니까, 그들이 자신의 뜻과 자신의 힘으로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갔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그러려면 무조건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살아주기만 해도 좋다. 살다 보면 아이들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서 서서히 인생을 배워간다. 어떤 아이라도 그들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고, 제대로 칭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줬어.”
“얘야, 살아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책에게 말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걸어서-로욜라의 이냐시오 (0) | 2012.02.17 |
---|---|
꿈꾸는 다락방 (0) | 2011.09.30 |
아르스 본당신부 성 요한 비안네의 가르침 (1) | 2011.08.24 |
리딩으로 리드하라 (2) | 2011.08.15 |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0) | 2011.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