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 있겠어?”
지날 달 청토 강연자인 심종혁 신부님은 요즘 교회 안팎에서 뜨고 있는 ‘영성’이란
‘생의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실천적 삶’이라 정의했다.
곧 ‘내가 믿는 것을 구체적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영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오늘 청토모임의 주제는 ‘영성과 사회적 실천’이다.
두 강연자 모두 ‘영성’과 ‘실천’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한다.
‘영성’의 뜻이 위와 같다면 ‘사회적 실천’은 다른 영역으로 더 확장되어 보인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교회 밖 세상과 소통을 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지금까지 청토 강연자들이 사제나 수도자였던 것과 달리 평신도로 살아가면서
교회 안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가지고 어떻게 깨어 살아 왔는가에 대한
수도자로서의 궁금함이다.
그러나 오늘 강연은 나의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영성과 사회적 실천’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청년들의 ‘마음속 갈망’을 일깨우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강연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국이 시끄러울 때
그동안 해 오던 노동운동 현장을 떠나 귀농을 단행한다.
아무리 뜻이 좋고 이상이 높다 하여도 ‘노동 운동의 현장’도 사람 사는 동네,
각자의 꿈이 다르고 그것을 풀어 나가는 방법이 달라 좌충우돌 얻은 것도 많지만
반면에 사람도, 꿈도, 게다가 건강까지 잃었다.
귀농을 결행한 이유로 그렇게 전투적으로 살다가 무심코 바라본 하늘의 별에 이끌려
‘별을 보고 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바램을 실행에 옮긴다.
그런 체험에서일까! 강연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는 너무 계산적이지 말고
‘낭만’이 이끄는 대로 그냥 저질러 보란다.
10년 귀농의 시간에 강연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시골 할머니가 온 종일 퇴약볕 밑에서 ‘죽지 못해’ 일을 하고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연기를 내뿜는 모습에서
‘저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과연 인생의 樂이라는 것이 있을까?’ 라는
심경의 토로에서 강연자의 ‘갈망’을 짐작해 볼 뿐이다.
10년 시골 삶을 정리하고 서울로 재상경하면서 손에 쥔 것은
전셋집도 빌릴 수 없을 정도로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그이의 말처럼 가족들 누구도 그 경제적 가난에 ‘부끄럽다’거나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50을 바라보는 이즈음 20년 전 귀농을 할 때와 10년 전 다시금 서울로 왔을 때
크게 나이질 것 없는 살림살이다. 그러나 천하의 ‘낭만주의자’ 다웁게
여전히 마음에 별 하나 간직하고 그 별이 이끄는 대로
마치 동방박사의 ‘별을 따르는 여정’처럼 강연자의 삶도 그러해 보인다.
강연자는 젊은 청춘들에게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 볼 때’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초대한다.
지난 번 강연자 심종혁 신부님의 ‘각자의 장례식 조서가 읽혀질 때’
관속에 누워 있는 나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와 유사한 주문이다.
‘흑룡단’이라는 의적단을 조직할 만큼 남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강연자는
‘권선징악’, 세상의 악은 처단하고 선은 승리할 수 있는 정의사회구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이 과정의 일환으로 신학교에 입학할 뻔 했으나
그 무렵 읽게 된 구약 ‘아담과 하와 신화’의 문자적 해석으로
‘어떻게 하느님이 선악과 하나 따 먹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수 있느냐’며
분기탱천한 마음에 이런 하느님은 ‘아니다’라는 생각에 다시금 신약으로 점프,
그러나 신약 역시 헤로데에 의한 ‘무고한 어린 아가’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자기(?) 아들 귀한 줄만 알고 예수를 이집트로 내빼게 하는 하느님이라니
이것도 ‘아니다’ 싶어 결국 신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직접 진리를 찾아 나섰다.
그러면서 ‘평생에 목숨 걸고 풀어 보고 싶은 문제 하나’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강연자의 주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잘은 모르겠지만 ‘이게 다가 아닐거야’ 분명히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삶,
그리고 그 갈망하는 것이 이끄는 대로 뚜벅뚜벅 향하는 강연자의 발걸음에는
(왜 없을까마는) 지금은 두려움도 불안감도 없는 경쾌함이 가득하다.
청토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하루 빨리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보다는
이것저것 마음이 향하는 것에 몸을 던져 보길 권한다.
나이 40이 되기 전에 안정적인 무엇인가를 해 놔야 정상인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해’라는 갖가지 요구들에 그만 벗어나 보라는 강연자의 요구는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선동일 수 있겠다.
언젠가 누님이 이런저런 학원들로 조카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누님, 얘들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도록 놔두기도 하세요.” 했다가
“네 자식이 아니니 그런 말 쉽게 하지 부모 된 마음이라면 그런 말 못한다.”며
본전도 못 찾았던 기억이 있다.
강연자의 의도가 그저 선동적인 구호가 아님은 충분히 알만 하다.
그분의 나눔에는 젊은 청춘들이 ‘너무 계산적이지 않았으면’,
‘이것저것 너무 조심하며 살지는 말았으면’
그리고 집이며 직장이 탄탄하게 갖추어진 청년들의 신혼생활도 그렇겠지만
50줄에 들어선 전세값이 전부인 강연자의 형편도 행복이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어릴 적 ‘흑룡단’을 꾸리며 멋들어지게 꾸었던 꿈처럼,
비록 많은 것 쌓아 두고 째를 내며 살지는 않더라도
그 갈망이 이끄는 대로 해보고 싶은 일들 실컷 하면서
(실제로 강연자는 기자, 시민활동가, 농부, 예술심리치료사, 인터넷 뉴스 편집장 등
다양한 직업들로 경력이 화려하다.)
하지만 그 안에 한결같이 꿰어지는 것들이 있으니
‘하느님의 의로움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이들이 없었으면’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꿈이다.
청년들의 각박한 사정에 눈앞에 꿈(?)이 되어버린 대기업 취업도 허상이 가득하다.
대기업 평균 퇴직 연한이 계속해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30세 이쪽저쪽으로 취업을 한다한들 50줄 중반이면 곧 퇴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평균 수명이 80세 가까우니 나머지 30-40년을 실업자로 살아야 할 팔자다.
이런 이유로 로얄 패밀리들이 아니라면
반짝 20-30년 소모품(죄송하다 이런 표현은...)같은 직장생활은
평범한 우리네 인생살이다.
대기업이 말하는 인재상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었을 때, 뽑아 낼 수 있을 때 왕창 뽑아내고서는
조퇴다, 명퇴다 사정없이 물건 취급하는 사람을 대하는 기업의 현실에
어느 누군들 딴 마음 먹고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렇게 빤히 보이는 삶에 아등바등하는 청년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연자의 나눔처럼 젊은 청춘에 선뜻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기보다는
‘기다림’과 하느님의 ‘이끄심’에 귀 기울이고
밤 깊은 침묵 속에서 별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당부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인으로서 강연자는 교회를 뛰쳐나가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교회의 공인된 기관에서 일해보지도 못했다.
교회 안에서 활동하기를 꿈꾸었지만 항상 교회에서 내쳐지니 방법은 하나,
교회 울타리 안에서 비공인 단체를 구성하고 교회의 오류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옳은 것’에는 ‘예’하고 , ‘아닌 것’은 ‘아니요’라고 양심의 목소리에 충실하면서
그저 ‘하느님의 피리’로서 그분이 손에 들고 소리를 내면 기운차게 ‘소리내고’
피리가 영 신통치 않으면 또 ‘그분이 고쳐주시겠지’ 라는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서 한 길 걸어왔다.
지금도 가톨릭 인터넷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으로 고군분투 하면서
친 교회적인 교회 미디어들의 반대편에서 비판적 견해를 내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그러면서 청토에 참석한 청년들에게 부탁한다.
한 번 ‘해보는 것’과 그저 ‘생각만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
결과를 생각지 말고 뛰어 들어 보는 것!
그래서 그게 ‘아니다’라고 생각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비록 눈에 보이는 ‘실패’처럼 보이는 결과물에 세상 사람들은 야유하겠지만
‘실패’를 맛 본 나는 한 단계 더 점프해 있을 거라는 것!
그래서 그런 실패가 다시 찾아 올 때는 놀라지도 마음 설레지도 않을 거라는 것!
그래도 뚜벅뚜벅 내 갈망을 향해 나아갈 거라는 것!
정리를 하고 보니 온통 어깨 무거운 ‘이렇게 저렇게 하세요’라는 부탁의 말 뿐이다.
그래서 정리자도 면목 없이 미안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나 역시 청토모임 커트라인에 딱 걸린 청춘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청토모임의 요셉 수사님을 붙잡고 물어 봐라
수도자인 나도 그대들처럼 매일같이 흔들대며 산다. 빈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