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게 말걸기

主よ、お話し下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

해피제제 2014. 3. 30. 12:05

 

나가사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나카마치성당 독서대에는 1사무엘 3,9절의 성구가 새겨져 있다. '주여! 말씀하십시요. 저희들이 듣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네번이나 헛탕(?)을 치고서야 겨우 사무엘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응답이었다. 그것도 스승인 엘리가 세번이나 잠을 깨운 사무엘의 '부르셨습니까?'라는 방해(?)에 생각이 닿아 엘리 역시 겨우 '하느님의 음성'임을 알아듣고 소년 사무엘에게 귀뜸을 해 준 것이다. 다음에 또 같은 소리가 들려오면 '主よ、お話し下さい。僕は聞いております。주님 말씀하십시요.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하기를...

 

나가사키에서 한달간 아루페먼쓰 실습을 하면서 미사에 참례하거나 신자들의 체험들을 나누어 받게 되면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 그이들 마음과 일상생활 중심에는 '하느님'과 순교자 '신앙'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거나 교리교육을 해 주는 사제나 선교사 없이 1549년 하비에르가 히라도에 첫 발을 내딪어 전해주었던 그 신앙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1614년 '그리스도교포교금지령'이 내려진 후 250년간 잊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쉬이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 손길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가사키 신자들의 '겸손함'을 보게 된다. 말씀이 선포되는 독서대에 '말씀하십시오. 저희들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늘 그렇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당연스레 그려진다.

 

주일이면 성당에 앉아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열심히도 부르시지만 우리들은 그분의 음성을 쉬이 알아들을 수 없어 보인다. 엘리같은 영적지도자가 있지만 그이도 사무엘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뜻을 세번째 마주하고 나서야 '아!'라는 감탄사와 함께 겨우 알아듣고서 소년에게 이렇게 저렇게 응답하도록 안내해 주지 않았던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엘리가 왜 단박에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엘리의 집은 망한다'라고 했던 어느 예언자의 말처럼 엘리가 하느님의 뜻에 귀를 막고 망나니라 소문났던 두 아들의 잘못에 눈을 감았기에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영적식별력이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안다'라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레 엘리처럼 되는가 보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릅니다. 귀 기울여 들을테니 가르쳐 주십시요'라고 가르침을 청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철학과 신학을 배우고 삶의 이런저런 경험이 쌓여지고 어느덧 제대와 단상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나서 부터는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릅니다'라는 말은 물론, 나아가 '귀를 기울여 들을테니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청하지 않게 된다. 아니 청하지 못한다. 그러니 '주님 말씀하십시요. 제가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라는 이 성구에 가슴을 치며 지금까지 계속해서 되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가사키 신자들의 하느님 앞에서 겸손히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뜻과 멀어져 영적식별력이 떨어져버린 엘리를 만나게 되면서 나가사키 신자들의 기도를 입술에 올려 본다. "주님, 말씀하십시요. 제가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