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부님', 너는 그냥 수사(혹은 '수사넘')
1독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복음말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단상
2년 만에 화곡동 신학원을 떠나 사도직 공동체에서 살다 오니
여러 가지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서 어제 2시간이 넘는 공동체 회의로
이 아침 기도에까지 따라오는 것들이 있으니
고요하게 머물러 있을 수 만은 없게 만든다.
몇 번이나 ‘하느님...성모님...’을 읊조리며
여러 가지 삐죽대는 것들에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
‘핸드폰 사용’이라는 문제로 1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격론을 보고,
나처럼 다른 공동체에 살다 온 신부님은 긴 숨을 내쉬며
간간이 말문이 막힌다는 듯이 정말로 말을 잇지 못한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문제로 1시간이 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 이러지 않아도 될 나이 아닙니까?
여러분 모두 3-40이 넘은 “어른들”입니다.
핸드폰을 사용해야 “하네, 마네” 개인들이 식별할 문제지,
대한민국 전체 인구 99%가 다 사용하고 있는,
이제는 그냥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들을
이렇게 긴장이 넘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정말 “핸드폰 사용 여부”에 대한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뒷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
‘핸드폰 사용 여부’에 대한 공동체적인 문제의 발단은
재작년 한강 다리를 지나다가 도중에 차가 퍼지며 멈춰 서게 되었는데,
그 차량에 탔던 수사님들 중 아무도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할 방법도 없고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도 아저씨뻘인 3-40이 넘는 사람들이
그 중 한 사람도 핸드폰이 없어서 낭패인 상황을 겪으면서
수사님들은 공동체 회의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그래서 각 반 비들과 사도직 소임(철학과 대표, 당가보 등)을 맡고 있는 형제들
그리고 원하는 형제에 한 해서 1년간 우선적으로 사용해 보기로 하고
다시금 공동체 회의에서 핸드폰 사용에 대한 유․무해함을 논의해 보자고
결론 내렸다고 한다.
.
어제는 핸드폰 사용이 1년이 되는 시점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른 물음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전년도에는 ‘핸드폰을 사용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지만
이제는 ‘왜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수사님들이 핸드폰을 사도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올라 왔던 여러 가지 것들이 논의 되면서
정작 문제는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막혔던 상황’이었지만
1년을 사용하게 되고, 주위 기성 회원들의 핸드폰 사용 실태를 지켜보면서
이제는 수면 아래 감추어졌던 문제들,
전혀 타당하지 않는 이유들로 ‘연학수사님들은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라’는 방침에
여전히 ‘애 취급’ 받으며 살고 있다고 느끼면서 더한 논란꺼리가 된 것이다.
.
우선, 어떤 수사님도 핸드폰을 사용하지 말자라는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개인적인 식별을 거쳐서 ‘별로 쓰고 싶지 않다.’ 라는 수사님도 있었다.
오히려 비들(반장에 해당함) 혹은 당가보(살림살이) 사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핸드폰을 갖고 다니라고 하는 것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라는 주장과
그것 역시 ‘원장신부님 혹은 당가 신부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사도적인 목적에서라면
‘내가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이유로
나와 함께 사도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그이들에게 불편함을 끼친다면
오히려 사도적인 이유로 비록 나는 쓰고 싶지 않은 핸드폰이지만 그이들을 위해
써야 될 필요도 있다는 게 또한 반대 의견이기도 했다.
.
반면에, 1) ‘연학 수사의 성소 보호하기 위한 핸드폰 통제’에 대해서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수사님들은 일축한다.
입회 전 10년 정도 이미 핸드폰을 사용했었고,
그러면서 별 탈 없이 예수회에 입회 했고,
또 2년간 수련원에서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서원과 함께 신학원으로 이동해 오면서
바로 그 저녁부터 ‘인터넷과 개인 이메일, 페이스북, 블로그 등’
여느 모로나 ‘성소’가 위험하다면 더 위험할 수 있는
여러 다른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히려 핸드폰을 사용하면 ‘성소의 위험 혹은 보호’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
게다가 핸드폰을 사용해서 성소가 위험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어려움으로 문제를 겪게 되는 수사님들은 원장 신부님을 찾아가서
투명하게 대화하고 문제를 풀어 가는 방법이 예수회의 양성 방법에 적당할 것이며,
그래서 고작(?) 핸드폰 따위로 ‘성소위험’ 운운한다면
아예 일찍부터 걸러져(?) 빨리 수도회를 떠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는 어느 과격한 수사님의 발언도 있었다.
.
2) ‘연학 중이기에 보다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라는 이유로
‘핸드폰 사용 불가’ 역시 수사님들은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
3) ‘기성 회원들은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기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라는 이유도
똑 같은 불쾌감을 일으키는 반응이다.
‘연학은 사도직 아닌가?’라는 물음과
과연 '사도직과 개인적 영역이 구분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핸드폰이라는 물건이 사도직에만 한정 되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인가 말인가.
개인적인 연락까지도 뭉뚱그려 우리는 ‘사도적 목적’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은가.
.
.
이렇게 성토의 장이 되더니 급기야는 더 본질적인 물음들이 이어진다.
바로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과 그냥 아직 ‘수사’에 머물고 있는
예수회 한국관구 안에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유교의 가부장적인 신분 제도의 흔적이다.
.
수품을 받은 ‘신부님’들 역시 ‘우리는 형제적으로 평등한 수도회다’라고 말한다.
다만 맡은 사도직에 따라 ‘장상’이 있을 뿐이다.
직에 따라 일을 행함에 다름이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형제다. 라고 엄숙히 선언한다.
.
그런데 이 말은 수도회 내에서의 일상 삶에서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맞다. ‘장엄서원’을 하기 전까지는 수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Scholastic(연학중인 수도자)으로 불린다. 연학 수사님들과 같은 신분이다.
그런데 한국적인 유교 문화 안에서 아무리 형제적 평등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사제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현실이 화곡동 신학원 안에서 '핸드폰 사용'을 계기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
‘가난’은 신학원 수사님들만의(혹은 수련원만의) 몫인 듯 보인다.
신부가 되면 먹고, 입고, 쓰는 문제들이 달라 보인다.
신학원 수사님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제는 초등학교 아이들까지도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일반화 되어버린 핸드폰 사용 문제로
(비용이 비싸니 ‘스마트폰’은 힘들겠고 무료 폴더형으로 사용 하자는 둥)
이렇게 1시간이 넘게 얼굴을 붉혀 가며 격론을 벌이고 있는데,
신부님이 되면 너무 쉬워 보인다.
아이폰이 더 이쁘다는 둥, 갤럭시 머시기는 그립감이 떨어진 다는 둥,
곧 폰을 바꿀거라며 모든 게 너무도 쉬워 보인다.
신학원 수사님들은 논문을 쓰는 3반 수사님들만 겨우 노트북을 받아쓰고 있는데,
수도회 내(內) 어느 한 편에서는 노트북 사양이 떨어진다는 둥, 들고 다니기에 무겁다는 둥
곧 다른 노트북으로 바꾸겠다며 이렇게 쉬워 보인다.
여기 저기서 사용하다가 다른 노트북에 밀려
신학원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어온 노트북들이 연학 수사님들께 배정이 되었다.
나는 신부님, 너는 그냥 수사다.
.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회사도직 공동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순명’은 중간실습기의 실습 수사님들만의 몫인 듯싶다.
당당히 정의를 위해 싸우러 나가시는 신부님들은 공동체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
제 각 각 사도직으로 함께 살고 있는 형제들은 뒷전이요,
공동체 안에서 맡은 소임도 소임표에만 덩그란히 표시되어 있다.
함께 해야 할 회의며, 미사며, 기도며, 청소며 기타 등 등
공동체 안에 산적해 있는 일들에 나 몰라라 한다.
매일 아침 미사는 똑같이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중간실습기 수사님들만의 몫이다.
아니다. 미사성제를 할 수 없는 수사님들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오시는
주례 신부님들의 감지덕지 은혜를 입는다.
똑같이 사도직 공동체에 살면서 그 많은 회원들은 공동체 미사에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
여기서도 실습기 수사님들은 '그냥 수사'다.
또 장상인 ‘원장’ 알기를 우습게 안다.
얼마나 빼어난 신부님들이 많아서 인지,
서로들 ‘너나 잘하세요.’ 라는 의식이 팽배해 보인다.
실습기 수사님들은 목소리 큰 신부님들 덕분에 서글플 때가 많다.
공동체 가족들 비판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장상이 어떻고, 원장이 어떻고, 관구장이 어떻고, 어떤 공동체가 어떻고 등 등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쓰리다.
그 비난을 받는 수도회 선배님들이 그렇고,
또 그렇게 억울해 하고, 서운해 하면서 비난하는 분에게도 안쓰러움이 일어난다.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살려면
나도 얼른 신부님이나 되어야 겠다.
.
그렇다고 화곡동 신학원이 그 ‘벽’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아니! 더 심각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깜짝 놀랐다.
실습기를 보내면서 사도직 공동체에서 살다가 오랜 만에 신학원에 돌아와서
문화적(?) 충격에 이 새가슴이 깜짝 깜짝 놀란다.
.
단적으로 신학원에서 거주하는 신부님들은
공동체에서 같이 청소를 하지 않는 모습에서 놀랐다.
아니, 청소며 장보기와 같은 공동체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연학 중인 수사님들의 몫이다.
거주 신부님들은 당신들은 사도직을 하고 있다며 반론을 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수사님들을 대신해 나도 할 말이 있다.
수사님들은 ‘공부’라는 사도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공부한다는 게 신부님들처럼 매일 출근하듯 학교에 가서
30이 넘고 40이 넘은 나이에 머리 싸매가며 에너지 쏟는 것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주중엔 각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리, 노동자의 집, 공부방, 병원, 교도소 등 등’ 사도직들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공부를 하면서 대학원의 각종 행사와 원우들과 또 복잡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더한 사도직이 아닌가?
이래저래 공부 외에 한 두개씩 소임과 사도직을 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인가?
수사님들께 이래라 저래라 ‘손도 까딱 않는 모습’이 혹시 ‘로만칼라’를 했다는 이유라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비록 수도회에 입회해서 사제품을 받은 분들 보다 먹은 밥그릇 수가 적겠지만
사회에서는 직장생활도 하고 충분히 어른스럽게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 온 사람들이다.
나이 많은 수사님들도 많고, 성숙한 수사님들도 꽤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사제복을 입었다고 저절로 ‘성덕이 빼어난 것'이 아님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또 어른다운 성숙함이 수도회 밥그릇 숫자에 비례하지 않는 다는 것도
연학수사님들은 밥 먹다고도 눈 똥그랗게 뜨며
신부님들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말인가!
.
차라리 신학원 전체적인 핸드폰 비용이 많이 들어서
'연학 수사님들은 핸드폰 사용을 자제합시다' 라고 하면
참으로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오히려 너그럽게 받아 들일 용의도 있어 보인다.
더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그 비싼 스마트폰 쓰는 신부님들에게도 그렇게 요구해 보시지,
왜 자꾸 ‘성소보호, 공부 방해’ 등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마치 ‘나는 어른이니 수도생활 연수도 짧은 너는 시키는 대로 하거라’ 하면
과연 누가 타당한 이유라며 수긍할 수 있겠는가)
좀 참고 ‘실습기에 들어가서 질러 버리면 된다.’ 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과연 옳은 양성인가?
.
수도회의 이런저런 실망스러운 모습에 어느 열혈 선배 신부님은 그런다.
“기성 회원들에게는 더 이상 할 말 없고,
나는 너희들이라도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을 들었던 나는 대뜸 올라오는 게 있어 대꾸한다.
“신부님, 먼저 선배 신부님들에게 요구하지 못할 거라면,
신부님 역시 저희에게도 ‘너희는 어찌어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별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폭력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은 안 하지만 '비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후배들은 선배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지금은 욕하면서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겁니다.
신부님이 먼저 ‘가난’하게, ‘정의’롭게 싸워주시면
누구는 또 그런 신부님을 보고 그 길을 따를 겁니다.”
.
오늘 말이 길어졌지만, 수도회 내에서 보이지 않는,
아니 너무 뻔하게 보이는 벽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본다.
물론 위의 예들은 너무 극단적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젠 수습에 들어갈 차례..^^)
목소리 큰 몇 몇 사례들이 전부인 것처럼 연학 수사의 눈에는 비추어 지기에
다른 좋은 덕목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한 번 다루고 싶은 주제였다.
실제로 아주 훌륭한 신부님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정말로 곳곳에서 가난을 실천하며 사시는 신부님들,
장상에 순명하며 너무도 기쁘게 살아가시는 분들!
그리고 이곳저곳 불의한 곳은 언제든 달려가서 함께 정의를 외치면서도
공동체 돌아와서는 늘 미안해하며 실습중인 수사들을 위해
밥을 짓고, 국을 끓이시는 신부님도 계시다.
그런 많은 분들 덕분에 예수회가 그래도 한국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 건설과 일상을 사는 영성과 책임 있는 지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의 투신으로
얼마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새 가슴이 이만큰 했다면 목숨(?) 내 놓고 하는 소리다.
여기저기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이 서른일곱 된 젊은(?) 연학 수사의 눈에는
아직 이런 수도회의 모습이 너무 잘 띈다.
두 분 똑바로 뜨고 선배님들 사는 모습, 내 사는 모습 뒤뚱뒤뚱 해 가며
고군분투 지켜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
주님, 이 약함 투성이인 수도회에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