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내가 가진 것
해피제제
2011. 11. 16. 06:57
1독서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난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
복음말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단상
퇴근을 하는 중에 동기 수사님이 이웃살이 책임자 신부님께 넌지시 이야기 한다.
"형욱이가 내년 4월까지 이웃살이에서 일을 더하게 하세요."
순간 발끈한 나는 "왜 그래야 하는데?" 한다.
내년 1월이면 사도직 파견이 종료되고
오늘 대화 중에 내년에 새로이 파견되올 수사님을 비공식적으로 전해 듣게 되면서
한바탕 '아, 이 사도직 끝나가는구나!'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는데
동기수사님은 찬물을 끼얹으며 '나는 3월 학기가 시작되니 일찍 떠날테니
너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며 얄미운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화들짝 놀란 것은 '어! 내가 왜 이렇게 발끈하지?
동기 수사님의 그 말로 내 안에 무엇인가 건들여 졌다는 말인데...
무엇이 건들여진 것일까?'
주일마다 이웃살이로 한글봉사를 나오는 학생들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사님, 매일 이렇게 임금체불, 이직, 폭력 등 공장주과 힘겹게 싸우는데
이 일 힘들고 어렵지 않으세요? 하루종일 이런 상담에 그후로 공장주에게 전화를 해야 하거나
또 찾아가서 밀린 월급 달라거나, 그들이 욕을 하면서 험하게 대할텐데 힘겹지 않으세요?'
그렇다. 그 어머니 말씀처럼 공장을 찾아가서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원체 문제들을 가지고 이웃살이를 찾고 관공서가 아님에 어떤 행정적인 책임을 지울 수 없기에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아프게 하는 말들을 오지게도 들었던 듯싶다.
대부분이 핀잔이요, 때론 험악한 욕설에 심지어는 긴 시간 하소연까지
말이 주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그럴 때마다 내 몸도 에너지 고갈로 답을 해 온다.
아마도 이런 체험들이 깊어서일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생각은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대답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체험들도 많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그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나 자신이 성장을 한 것은 물론이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을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었고,
내가 어려워 하는 만남들에 두눈 찔끔감고 온 몸으로 뛰어 들어 보기도 한다.
말 덕분에 말에 휩싸여 말 때문에 웃고 울고 하면서 조금은 더 하느님께 다가선듯 싶다.
그러면서도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주사도직도 내가 주는 선물들이 많지만
이 일 보다는 기도하고 성찰하고 읽고 쓰고 나누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하고 살아갈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파견된 이주사도직에서 즐겁고 기뻐하며 살면서도
내가 더 좋아하는 사도직을 위해 갈고 닦기를 멈추지 않아 왔다.
그리고 그 준비해 온 것들에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삶에 가슴이 뛴다.
이주사도직을 하면서 몸에 새겨진 것은 또 하느님이 허락한 소중한 선물이다.
몸에 새겨진 이것들이 또 앞으로의 수도 삶에 그 깊이 만큼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 선물들에 감사하면서도 내가 더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에 소망해 본다.
물론 내 이 마음을 알아듣고 나의 하느님께서는 또 나를 더 알맞게 성장케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소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설사 그것이 이주사도직으로의 파견일 지라도 그것이 나를 성장케 할 것임을 안다.
지금껏 언제나 나를 성찰로 이끈 것은 내가 그렇게 '발끈'했던 그것들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그 '발끈함'과 같이 올라오는 감정들을 돌아보면 대게 내 마음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올라오는 것들을 '보고', '성찰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결단'을 내리는 것,
나를 그분의 길에서 살아가고 성장케 하는 힘이다.
이주사도직을 하면서 여전히 내가 어려워하는 것들이 많다.
도전이 되는 것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여전한 고마움이 있는데
힘겨운 것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들을 뛰어 넘어서 나로 하여금 이 일 계속 해나갈 수 있었던
그분 안에 머무는 수도 삶, 좋은 벗들과 소중하게 나누었던 우정 그리고 무한한 사랑까지....
감사로움에 마음이 설레는 아침이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난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
복음말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단상
퇴근을 하는 중에 동기 수사님이 이웃살이 책임자 신부님께 넌지시 이야기 한다.
"형욱이가 내년 4월까지 이웃살이에서 일을 더하게 하세요."
순간 발끈한 나는 "왜 그래야 하는데?" 한다.
내년 1월이면 사도직 파견이 종료되고
오늘 대화 중에 내년에 새로이 파견되올 수사님을 비공식적으로 전해 듣게 되면서
한바탕 '아, 이 사도직 끝나가는구나!'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는데
동기수사님은 찬물을 끼얹으며 '나는 3월 학기가 시작되니 일찍 떠날테니
너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며 얄미운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화들짝 놀란 것은 '어! 내가 왜 이렇게 발끈하지?
동기 수사님의 그 말로 내 안에 무엇인가 건들여 졌다는 말인데...
무엇이 건들여진 것일까?'
주일마다 이웃살이로 한글봉사를 나오는 학생들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사님, 매일 이렇게 임금체불, 이직, 폭력 등 공장주과 힘겹게 싸우는데
이 일 힘들고 어렵지 않으세요? 하루종일 이런 상담에 그후로 공장주에게 전화를 해야 하거나
또 찾아가서 밀린 월급 달라거나, 그들이 욕을 하면서 험하게 대할텐데 힘겹지 않으세요?'
그렇다. 그 어머니 말씀처럼 공장을 찾아가서 좋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원체 문제들을 가지고 이웃살이를 찾고 관공서가 아님에 어떤 행정적인 책임을 지울 수 없기에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런저런 아프게 하는 말들을 오지게도 들었던 듯싶다.
대부분이 핀잔이요, 때론 험악한 욕설에 심지어는 긴 시간 하소연까지
말이 주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그럴 때마다 내 몸도 에너지 고갈로 답을 해 온다.
아마도 이런 체험들이 깊어서일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생각은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대답이었다.
물론 긍정적인 체험들도 많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그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나 자신이 성장을 한 것은 물론이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을 사람들 사이에서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었고,
내가 어려워 하는 만남들에 두눈 찔끔감고 온 몸으로 뛰어 들어 보기도 한다.
말 덕분에 말에 휩싸여 말 때문에 웃고 울고 하면서 조금은 더 하느님께 다가선듯 싶다.
그러면서도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주사도직도 내가 주는 선물들이 많지만
이 일 보다는 기도하고 성찰하고 읽고 쓰고 나누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하고 살아갈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파견된 이주사도직에서 즐겁고 기뻐하며 살면서도
내가 더 좋아하는 사도직을 위해 갈고 닦기를 멈추지 않아 왔다.
그리고 그 준비해 온 것들에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삶에 가슴이 뛴다.
이주사도직을 하면서 몸에 새겨진 것은 또 하느님이 허락한 소중한 선물이다.
몸에 새겨진 이것들이 또 앞으로의 수도 삶에 그 깊이 만큼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이 선물들에 감사하면서도 내가 더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에 소망해 본다.
물론 내 이 마음을 알아듣고 나의 하느님께서는 또 나를 더 알맞게 성장케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소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설사 그것이 이주사도직으로의 파견일 지라도 그것이 나를 성장케 할 것임을 안다.
지금껏 언제나 나를 성찰로 이끈 것은 내가 그렇게 '발끈'했던 그것들 덕분임을 잘 알고 있다.
그 '발끈함'과 같이 올라오는 감정들을 돌아보면 대게 내 마음을 붙잡는 것들이 있다.
올라오는 것들을 '보고', '성찰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결단'을 내리는 것,
나를 그분의 길에서 살아가고 성장케 하는 힘이다.
이주사도직을 하면서 여전히 내가 어려워하는 것들이 많다.
도전이 되는 것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여전한 고마움이 있는데
힘겨운 것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들을 뛰어 넘어서 나로 하여금 이 일 계속 해나갈 수 있었던
그분 안에 머무는 수도 삶, 좋은 벗들과 소중하게 나누었던 우정 그리고 무한한 사랑까지....
감사로움에 마음이 설레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