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행의 유효 횟수
어느 날 수도원 공동체 미사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현관 벨이 울렸습니다. ‘꼭두새벽부터 누구일까’ 싶어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훅-하고 오줌 지린내가 먼저 제 코를 자극해 왔습니다. 문 밖에는 왜소하고 남루한 옷을 걸친, 노숙자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가끔씩 수도원 공동체를 찾아와 먹을 것을 구걸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 아침, 저는 처음 그 사람과 마주한 것입니다.
공동체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그 노숙자에게 했던대로, 저는 얼른 치즈와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선물로 들어온 캔음료수와, 사과 한개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로, 미안해 하는 그이를 배웅했습니다. 그렇게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괜히 뿌듯해지는 것이, 사제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제대로 한 건 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같은 시간 쯤에 벨이 울렸습니다. 예상대로 치치상이 비를 쫄딱 맞은 모습으로 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밤사이 내린 비로 오줌 지린내가 더 한층 짙어진 건 덤이었습니다. 뭐 그날도 저는 ‘천주교 사제’답게, 어제와 같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드렸고, 캔음료가 없었기에 사과 한 알을 봉지에 넣어 배웅을 했더랬습니다. 그렇지만 전날과 달랐던 점은, ‘맛있게 드세요’라는 생기 가득한 인사말에 대신에, 조금은 톤이 낮아진 배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대로, 치치상은 사흘 연속, 수도원 벨을 눌렀고, 벌써 풍겨 오는 오줌 지린내에 마음이 불편해진 손은, 샌드위치도 대충, 바나나도 대충, 포장도 대충해서 퉁명하게 봉지를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치치상, 이렇게 매일 찾아 오시면 곤란합니다. 이곳은 수도원이지 무료급식소가 아닙니다. 가끔씩 오는 것은 괜찮지만, 이렇게 매일 오실 것이라면, 시청 복지센터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며 급기야는 뾰족한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저의 퉁명함에, ‘스미마셍, 스미마셍’ 어쩔줄 몰라하며 봉지를 건네 받는 치치씨의 모습에, 저는 괜스레 더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 제 선행의 유효횟수가 단지 ‘사흘’, 아니 실제로는 첫날 ‘단 하루’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치치상이 찾아 온 이튿날부터 ‘어제도 왔고 오늘도 왔는데, 내일 또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제 이런 약함을 신자분들에게 나누었을 때, 나이 지긋한 어르신 신자분이 한 마디 건네 주십니다. “사비오 신부님! 그래도 신부님은 낯선 이에게 세 번이나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의 어느 노숙자도 이제는 가정집 벨을 누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빵을 주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경찰에 신고해 버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수도원 문을 열고, 빵과 음료와 과일을 대접하다니, 그것도 세 번이나 그러셨다는 것은 저희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저희 신자들은 신부님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많은 군중들이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군중들은 어제도 따라다녔고, 오늘도 그분을, 놓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허둥지둥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어제도 그분은, 그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또 오늘도 ‘장정만해도 오천명이나’ 먹이셨습니다. 아마도 내일 역시, 예수님께서는 비를 흠뻑 맞고 있는 수많은 치치상들에게, 제자들의 걱정과 ‘이백 데나리온’이 어디있냐는 불만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찾아 먹이시겠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좋으신 아버지, 저희는 많이 약합니다. 또 새가슴에 겁도 많습니다. 낯선이에게 문을 열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저희가 이렇듯 부끄러운 모습에도, 매일 같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소서. 지금은 ‘단 한명’ 뿐이지만, 아드님을 닮아 ‘장정만도 오천명’이라도 두려움 없이 환대하고 섬길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그럴 수 있기를 아버지께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