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수도자야!!
먼 길 운전 때문인지 아니면 ‘母子’에 대한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 몸이 피곤하다.
저녁 밥시간이 다가왔지만 공동체 가족들이 도착 전이라 살짝 눈을 붙인다.
‘누군가 도착하면 출입문 벨소리가 나겠지...’
어스름 한기에 눈을 떠본다.
‘세상에! 12시 12분 한밤중이다’
정말이지 많이 피곤하긴 피곤했나보다 정신없이 잠에 빠졌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얼떨떨한 상황이지만 몸이 가뿐한 것이 기분은 좋다.
주방에 나가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하며 한밤중 적막감에 잠겨본다.
‘매일미사’책을 펼쳤다가 오늘의 말씀 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구절이 있다.
파란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스치듯 올라오는 여러 가지 것들에 마음을 모아본다.
초대교회에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한데 모여있다.
유다에서 독립전쟁이 끊이지 않자
로마제국이 유다인들에 대해서 디아스포라 정책을 서두르면서
유다인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강제 이주 된다.
소아시아의 갈라티아, 안티오키아, 고린토, 에페소,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등 등...
순수 유다인들이 이주된 곳의 민족들과 피가 섞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유다인들의 2세, 3세들은 정착지에 따라 그리스계, 로마계, 히브리계로 구분된다.
그리고 유다 이스라엘 역시 강제 이주되어 온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삶의 터전이 옮겨졌기에 역시 가난한 이들이 많다.
특히 과부들과 어린이들이 그렇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의 독서는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왜 그리스계 유다 과부들에게 배급해 주는 양이
히브리계 유다 과부들에게 주는 양과 차이가 있는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라더니 이게 그 ‘증거’인가?”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사도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사도들은 공동식별 끝에 공동체를 이끌 대표단을 선출한다.
사도들 스스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뽑아 세우라며
사도들보다도 다른 제자들이 여러 면에서 탁월함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원회에는 히브리계 유다인과 그리스계 유다인은 물론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인 니콜라오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열두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일, 부름 받은 일,
바로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매진하게 된다.
어제 공동체 미사 중에 동기 수사님의 나눔이 인상 깊었다.
내용인 즉슨, ‘어떤 것이 사도직활동을 위한 기준인지 모르겠다’이다.
어제 복음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있는데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들과 함께하며
그이들을 온전히 돌보시는 예수님을 동기 수사님은 닮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직장의 소장님과 다른 수사(‘나’를 지칭한다)는
온전히 투신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주 태클을 걸어
그렇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동료들까지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어 하는 자신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동기 수사님의 나눔에도 이해가 간다.
모든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함께 해 주려는 수사님의 노력은
내가 꼭 닮고 싶은 부분이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수사님인지라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아니! 예수회의 마지스(Magis)는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more’ 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러면서 내 가슴 한 켠 수사님의 아쉬움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그렇게 열심히 온 몸을 불살라가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데,
수사님은 왜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
처음의 그 기쁨과 행복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피곤함과 지침과 걱정과 스트레스만 잔뜩 쌓여 가는가?
그래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염치없음에도 불만이요,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스텦들도 원망스러울 뿐인가?
이제는 도움을 받는 이주민들이 수사님의 기분 상태에 따라 눈치를 봐야 하며
또 그런 이들의 반응이 못마땅해서 ‘이들은 또 왜 이러는가’ 하고 고민하고 있는가?’
물론 답은 없다. 그 답은 그 수사님만이 온 몸으로 살아 내야 한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내 대답’이고 ‘내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자칫 내 도움이, 도움이 아닌 ‘잘난 척’, ‘뻔한 답’일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이 다쳐 있는 상대에게는 늘 조심스럽다.
수사님에게 닥친 현상은 내게도 이미 찾아 왔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준다 했지만(이 얼마나 자만스러운가!)
그이들에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요구는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동시에 서 너 개씩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 앞에서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서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고백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내 약함을, 내 교만을, 동료들의 도움을, 하느님의 자비를....
그렇게 한 바탕 생손앓이를 하고 나서야 조금은 힘이 빠져나갔다.
1. ‘웬수와 친구’로 만감이 교차하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솔직할 수 있었고,
(내가 다 해결해 줄께! 라며 내 스스로 잔뜩 짐을 졌던 것에서 자유롭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그이들에게 솔직하게 밝힌다)
2. 옆 사람에게서 도움을 청할 수 있었고,
(내 부족함과 함께 함의 지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조금 모자란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데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3.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내 곁에 계심에 감사할 수 있었다.
(그분을 처음으로(?) 내 삶에서 필요로 하게 되었다)
수사님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서 불만이 많나보다
예수회 마지스(Magis)에 적합하지 않고,
너무 분명한 기준에 그것도 못마땅해 보이나 싶다.
혼자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꼴배기 싫을 수도 있겠다.
수사님이 체험한 마지스(more ‘더’)와
내가 체험한 마지스(keep love ‘계속 사랑’, keep growth ‘계속 성장’)는
이렇듯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가!
나는, 동기 수사님의 나를 향한 시선과 기준에도 불편함이 없는 데,
수사님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또 실재로 그렇기도 한데...
중요한 것은 내가 내 꼬락서니를 잘 알아듣고 있다는 데에 있다.
내 약함도 알고(아니 알아가고 있고),
내가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잘 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겠고,
또 그래서 매일매일 하늘을 보며 가슴을 치고 살아가는데,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데에 그저 감탄할 뿐인데,
그게 고맙고 기뻐서 이렇게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데,
또 이런 모습이 나의 벗들과 이웃들에게 보여 진다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고 조금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작년 9월 동기 수사님이 처음 이웃살이로 파견을 받아 왔을 때
이리저리 조바심 내며 일하는 나를 보고 수사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형욱아, 너는 예수회 수사지 ‘해결사’가 아니야!
우리가 하느님께 판단 받는 것은 ‘우리가 성취한 일’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수도자로서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그이들에게 하느님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늘 ‘매일미사’에 묵상한 사도행전의 독서를 대하면서
수사님이 내게 해 준 위의 말을 다시금 동기 수사님께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 사도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