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1독서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복음말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단상
2003년 젊은이 기도 모임에 나가면서부터 알았던 이들이 있다.
처음 형제님, 자매님으로 부르다가 같은 모임을 한 해 두 해 같이하면서
형․동생이 되더니 그 중에서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이들도 생겼다.
그리고 수도회에 입회하고서는 이제는 호칭이 바뀌어 뒤에 ‘수사님’을 대신 붙인다.
몇몇은 결혼을 했고, 또 어떤 이는 나와 같은 수도회를 바라보고 있고,
어떤 이들은 또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평소 오라버니 수사님이라고 따르던 친구는 참으로 예쁜 아이(?)다.
맑은 영혼에, 지혜롭고, 또 구김살 없는 온화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신앙심에 있어서도 늘 ‘목마름’이 강하기에 미사와 성사와 기도모임과 잦은 피정까지
어느 땐 수도자보다도 더 수도자스러운 모습이다.
주위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을 타입의 사람이다.
그래서 늘 주위에 사람이 많고
자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탓에 그이를 편안해 하는 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힘들 때는 기꺼이 그이를 찾는다.
그런데 이런 좋은 재능과 장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직 혼자다.
내 딴엔 일등 신부감이라 생각하지만
그이 주위의 남자들은 온통 눈이 삐었는지 진주를 몰라 보는 것 같다.
아니다.
내가 지켜본 바 그이에게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이가 편안해 하며 자주 만남을 가지는 것은 많은 경우는 수도․성직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듣는 이’ 역할을 해 주면서
그이의 고갈된 내적 에너지들을
영성 가득한 ‘수도자’들을 통해서 충전을 하는구나 생각했다가
2003년 이후로 내가 보아온 그이의 관계가 대부분
수녀, 수사, 신부들인 것으로(그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그러다가 어느 땐가 올라오는 것이 있어
‘영향가 없는 수도자들 그만 만나라’고 농담처럼 이야기를 전하곤 한다.
그러면서 그이의 꿈, 삶의 가치, 희망, 아픔, 두려움 등 등 하나 둘 알아듣게 되면서
그녀가 왜 수도자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지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온갖 좋은 스펙은 몽땅 갖춘 ‘일등 신부감’ 같은 그녀지만
그녀의 아주 깊은 곳에서는 삶에서 짊어지고 갈 십자가의 무게가
온통 그이를 짓누르고 있으니 수도자들 사이에서나마 가끔씩 그 평화를 누린다.
삶의 어떤 잔혹한 평가도, 엄청나게 짓누르는 무게도
게다가 ‘사랑받는 이’로써 한껏 사랑을 받게 되니
아직은 그 품을 떠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나는 또 왜 그렇게 그이의 처지가 절절한 것인지,
왜 그렇게 쉽게 공감할 수 있는지 묻다가
그이와 내가 참으로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이가 들려주는 그녀의 라이프스토리와 내 삶의 역사가
어찌 그렇게 꼭 같은지
그래서 오랜 시간 절친이며 오누이처럼 서로의 삶에 박수를 쳐주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에 또 그렇게 귀를 기울였던 듯싶다.
오늘 복음에서 가슴을 울리는 말씀이 있으니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내 사랑을 너의 품에 불어 넣어 주시겠다는 그 말씀에
괜히 고요한 아침 기도부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눌러야 하는 고통(?)과),
자꾸만 힘이 들어가려는 발자국을 조심하느라 온 몸이 근질거린다.
그 친구를 보면서 이제는 수도자들 그만 좇아(?) 다니고
얼른 제 짝 만나서 옴팡 사랑 받는 체험만이 그이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몇 차례 다짐을 받아 두면서,
나는 수도 가족들과 하느님을 통해서 그 ‘목마름’ 채웠노라고 염장질을 한다.
나 역시 오랜 동안 이리저리 사랑을 찾아 다녔노라고,
그렇지만 그게 쉽게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노라고,
그래서 자포자기하듯(아니 도망치듯) 수도원으로 숨어들면서
그분의 자비로 이제 겨우 그 무게들 하나 둘 벗어두게 되었고(물론 여전하지만)
비로소 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내 삶을 온통 짓누르던 무거운 책임감이라는 것,
그냥 누군가에게 옴팡 맡기고 나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라는 것,
내 곁에 눈에 보이는 이들을 통해 찐하게 전해 받게 된다면
그것 역시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
오히려 그제부터는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눈에 밟히고 고여
그이들을 품에 안아 주고프게 된다는 것 등 등
‘진하게 사랑 받는 체험’만이
나와 그이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리라는 것을 전하며
하느님께서는 오늘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는 그 사랑을
그이가 이 땅에서 하느님과 그 분을 닮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한껏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청한다.
주님, 당신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베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