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다.
해피제제
2011. 9. 5. 07:46
1독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말씀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단상
이웃살이에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님이 방문했다.
처음 김포에서 이주사목을 하셨던 예수회 신부님이시다.
3년간 초석을 놓으시고 미국 아틀란타 본당 사목을 떠나셨는데
어느새 3년이 흘러 옛 친구들을 만나러 김포를 찾은 것이다.
양곡성당 영어미사에서는 아직도 그분을 기억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얼마나 열렬히 신부님을 환영하던지 미사를 다녀온 동기 수사님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의 청으로 강화도로 나들이를 떠나시더니
같이 식사를 하시고 또 지난날들의 추억들을 서로 꺼내어두고 시간가는 줄 몰라 하셨다.
이웃살이 일정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도 안 신부님은
이주노동자 친구들을 동행해 오셨다.
그러면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또 풀어 놓기 시작하는데 곁에서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다.
일화 중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는 공장 기숙사를 찾아가 함께 미사를 드렸던 일과
매주 공장에서 시작한 미사를 계기로 점차로 퍼지고 퍼져 자그마한 신앙공동체가 결성됐고
그리하여 인천 교구장님의 허락으로 더이상 공장 기숙사가 아닌
양곡성당 성전에서 처음 미사를 드리게 되었던 가슴 벅찬 숨간들의 회상은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게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순간들에 담겨진 이주노동자들의 외로움과 두려움과 희망을 찾는 과정들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그러면서 그렇게 한땀 한땀 새겨진 결과물이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신부님과 그이들의 추억 속에 있는 공동체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약해진 공동체를 보게 된다.
미사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쓰는 노동자들의 한국적 소비문화를 빠르게 닮아가더니
성당 보다는 번화한 시내로, 공동체 보다는 개인적인 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신앙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던 전례, 성가 봉사자들도 점차로 줄어들더니
지금은 그이들 서로간에도 시간 내기가 힘들다고 호소한다.
이래저래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곁에서 듣고 있는 나는 여러가지 반성을 하게 된다.
평신도 소장님이 센터의 장이 되고 대표 신부님이 없었던 9개월의 공백기에
새롭게 꾸려진 필리핀이주노동자공동체의 회장단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면서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했던 이주노동자 친구들의 서운한 마음을 듣게 되니
지금처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해서 그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후회스러움이다.
내가 가진 선물들이 많기도 하지만 또 부족한 면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어제처럼 술 자리의 소란스러움이 그렇고
많은 이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며 들어야 하는 마음이 그렇다.
한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하여 듣는 것이 내가 쓸 수 있는 용량이 한계임에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한 없이 빠져나가는 저질스런 체력이 못내 아쉽고
술 한 잔을 해도 두통이 밀려 오는 내 허술한 신체가 또 그렇다.
부끄럽지만 수도자인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 하는 이유다.
이 아침 어젯밤의 즐거운 자리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음에도
일어나기가 버거운 뚝 뚝 떨어진 체력과 파리해진 표정은 그 여운을 무색케 한다.
그래서 내 자신의 시간과 몸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과
무거워지는 몸 사이의 갈등은 거의 대부분 후자의 승리로 끝이 나기에
이런 달란트 없음에 맥없이 하소연하면서도 나름대로 마음을 정했음에도
(언제나 모임의 자리에는 동기 수사님을 내보낸다)
때때로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또 괴롭기까지 하다.
그래도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말씀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단상
이웃살이에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님이 방문했다.
처음 김포에서 이주사목을 하셨던 예수회 신부님이시다.
3년간 초석을 놓으시고 미국 아틀란타 본당 사목을 떠나셨는데
어느새 3년이 흘러 옛 친구들을 만나러 김포를 찾은 것이다.
양곡성당 영어미사에서는 아직도 그분을 기억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얼마나 열렬히 신부님을 환영하던지 미사를 다녀온 동기 수사님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의 청으로 강화도로 나들이를 떠나시더니
같이 식사를 하시고 또 지난날들의 추억들을 서로 꺼내어두고 시간가는 줄 몰라 하셨다.
이웃살이 일정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도 안 신부님은
이주노동자 친구들을 동행해 오셨다.
그러면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또 풀어 놓기 시작하는데 곁에서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다.
일화 중에는 이주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는 공장 기숙사를 찾아가 함께 미사를 드렸던 일과
매주 공장에서 시작한 미사를 계기로 점차로 퍼지고 퍼져 자그마한 신앙공동체가 결성됐고
그리하여 인천 교구장님의 허락으로 더이상 공장 기숙사가 아닌
양곡성당 성전에서 처음 미사를 드리게 되었던 가슴 벅찬 숨간들의 회상은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내게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순간들에 담겨진 이주노동자들의 외로움과 두려움과 희망을 찾는 과정들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그러면서 그렇게 한땀 한땀 새겨진 결과물이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신부님과 그이들의 추억 속에 있는 공동체와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약해진 공동체를 보게 된다.
미사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지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쓰는 노동자들의 한국적 소비문화를 빠르게 닮아가더니
성당 보다는 번화한 시내로, 공동체 보다는 개인적인 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신앙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던 전례, 성가 봉사자들도 점차로 줄어들더니
지금은 그이들 서로간에도 시간 내기가 힘들다고 호소한다.
이래저래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곁에서 듣고 있는 나는 여러가지 반성을 하게 된다.
평신도 소장님이 센터의 장이 되고 대표 신부님이 없었던 9개월의 공백기에
새롭게 꾸려진 필리핀이주노동자공동체의 회장단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면서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했던 이주노동자 친구들의 서운한 마음을 듣게 되니
지금처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해서 그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후회스러움이다.
내가 가진 선물들이 많기도 하지만 또 부족한 면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어제처럼 술 자리의 소란스러움이 그렇고
많은 이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며 들어야 하는 마음이 그렇다.
한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하여 듣는 것이 내가 쓸 수 있는 용량이 한계임에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한 없이 빠져나가는 저질스런 체력이 못내 아쉽고
술 한 잔을 해도 두통이 밀려 오는 내 허술한 신체가 또 그렇다.
부끄럽지만 수도자인 내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 하는 이유다.
이 아침 어젯밤의 즐거운 자리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음에도
일어나기가 버거운 뚝 뚝 떨어진 체력과 파리해진 표정은 그 여운을 무색케 한다.
그래서 내 자신의 시간과 몸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것과
무거워지는 몸 사이의 갈등은 거의 대부분 후자의 승리로 끝이 나기에
이런 달란트 없음에 맥없이 하소연하면서도 나름대로 마음을 정했음에도
(언제나 모임의 자리에는 동기 수사님을 내보낸다)
때때로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또 괴롭기까지 하다.
그래도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