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차마 밝힐 수 없는 이야기!
해피제제
2011. 2. 1. 11:34
1독서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복음말씀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단상
미국 어느 피정센터 성당에 걸린 십자가상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지 못할 정도란다.
처음 그 십자가를 대하는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다.
미사 내내 제대 쪽으로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한 채
그리고 미사를 마치는 순간에도 십자가상에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물러나기가 십상이란다.
이유인즉슨,
예수님상이 천 조각 하나 걸쳐져 있지 않은 채,
그것도 그냥 발가벗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 예수님의 생식기가 꼿꼿이 발기된 상태란다.
처음 그것을 대했던 신부님 왈
'부끄러워서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 역시 어떠한 기분일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지켜본다.
유대 지역의 회당장이라면 함부로(?) 고개 숙일 군번이 아니다.
누구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지탄을 받을 일이다. 수치스러울 정도다.
하혈하는 여자의 수치심은 또 무엇에 비할까!
주위 사람들에게도 차마 말 못하고
남들 모르게 이곳 저곳으로 의사를 찾아 다니며
낫기위해 가진 것 마저 모두 잃어 버린 처지,
게다가 매번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
어디 그게 한 여자로서 쉬운 일일까!
내 경우 다를 게 없다.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라 하지만
노출증 환자처럼 내 온 부끄러움을 사방팔방 소문내고(?) 다닌다.
그럼에도 비밀번호로 Lock을 걸어 둔 것이 있으니
바로 '영혼에게 말걸기' 코너이다.
이웃살이 봉사자 자매님이 이 코너에 발 길을 돌렸다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에
'1촌'을 맺은 사람만 글을 읽을 권한이 있냐며 당장 '가족 관계'를 맺잖다.
안 그래도 '부끄러움' 많다고 소문내며 사는 사람이
그럼에도 어떤 부끄러움이 있기에 또 이렇게 Lock까지 걸어 두었을까!!
이것은 하느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야기'다.
나도 알고, 하느님이 아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나의 실수담, 망설임, 용기없음,
두려움, 질투, 부끄러움, 욕심, 시기심 등 등
차마 더 소문낼 수 없는 내 약함의 고백이다.
만약 누군가 이 코너의 비밀번호를 알고 내 고백을 듣게 된다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게다.
그렇지만 이 '비밀이야기'를 계속해서 고백하게 되면서
이런 부끄러움을 안고 당당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갈 것이다.
예수회 영성가 래리길릭 신부님은 그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교회가 십자가 위, 예수님 상에서 천 조각을 걷어 올릴 때
그 부끄러움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 때
우리의 구원, 즉 '저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아버지 앞에 나섭니다.'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구원 받았다' 고백할 수 있으리라.
기도 중에 내게 힘을 주는 한 마디,
'사비오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당신의 음성에
기쁨에 겨워 찬미 노래 부른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복음말씀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단상
미국 어느 피정센터 성당에 걸린 십자가상은
차마 눈 뜨고(?) 바라보지 못할 정도란다.
처음 그 십자가를 대하는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다.
미사 내내 제대 쪽으로는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한 채
그리고 미사를 마치는 순간에도 십자가상에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물러나기가 십상이란다.
이유인즉슨,
예수님상이 천 조각 하나 걸쳐져 있지 않은 채,
그것도 그냥 발가벗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 예수님의 생식기가 꼿꼿이 발기된 상태란다.
처음 그것을 대했던 신부님 왈
'부끄러워서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신자들 역시 어떠한 기분일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지켜본다.
유대 지역의 회당장이라면 함부로(?) 고개 숙일 군번이 아니다.
누구의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지탄을 받을 일이다. 수치스러울 정도다.
하혈하는 여자의 수치심은 또 무엇에 비할까!
주위 사람들에게도 차마 말 못하고
남들 모르게 이곳 저곳으로 의사를 찾아 다니며
낫기위해 가진 것 마저 모두 잃어 버린 처지,
게다가 매번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일,
어디 그게 한 여자로서 쉬운 일일까!
내 경우 다를 게 없다.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라 하지만
노출증 환자처럼 내 온 부끄러움을 사방팔방 소문내고(?) 다닌다.
그럼에도 비밀번호로 Lock을 걸어 둔 것이 있으니
바로 '영혼에게 말걸기' 코너이다.
이웃살이 봉사자 자매님이 이 코너에 발 길을 돌렸다가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에
'1촌'을 맺은 사람만 글을 읽을 권한이 있냐며 당장 '가족 관계'를 맺잖다.
안 그래도 '부끄러움' 많다고 소문내며 사는 사람이
그럼에도 어떤 부끄러움이 있기에 또 이렇게 Lock까지 걸어 두었을까!!
이것은 하느님과 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야기'다.
나도 알고, 하느님이 아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대부분은 나의 실수담, 망설임, 용기없음,
두려움, 질투, 부끄러움, 욕심, 시기심 등 등
차마 더 소문낼 수 없는 내 약함의 고백이다.
만약 누군가 이 코너의 비밀번호를 알고 내 고백을 듣게 된다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게다.
그렇지만 이 '비밀이야기'를 계속해서 고백하게 되면서
이런 부끄러움을 안고 당당하게 하느님 앞에 나아갈 것이다.
예수회 영성가 래리길릭 신부님은 그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교회가 십자가 위, 예수님 상에서 천 조각을 걷어 올릴 때
그 부끄러움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들 수 있을 때
우리의 구원, 즉 '저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아버지 앞에 나섭니다.'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구원 받았다' 고백할 수 있으리라.
기도 중에 내게 힘을 주는 한 마디,
'사비오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여라'는 당신의 음성에
기쁨에 겨워 찬미 노래 부른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