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게 말걸기
'설마'와 '역시'라는 공식
해피제제
2013. 5. 27. 21:07
主の霊が私の上におられる。貧しい人に福音を告げ知らせるために、主が私に油を注がれたからである。主が私を遣わされたのは、捕らわれている人に解放を、目の見えない人に視力の回復を告げ、圧迫されている人を自由にし、主の恵みの年を告げるためである。
- '설마'와 '역시'라는 공식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 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 30여년을 살고 계신 신자 한 분이 내게 지지 후보를 물어 왔다. '정치'를 화제로 올려 젊은이건 어르신이건 별로 유쾌한 기억이 없던 나는, 그냥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궁금하신지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더 도망가지 못하고 지지 후보를 밝혔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그분을 말리며 그 지지 이유로 "그 사람의 지위도, 정당도,... 잘 생겼고 못 생겼고의 인물도 아닌, 그저 그 사람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그렇게 지지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감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든다. 그리고 나는 또 그렇게 한 참을 귀 기울이며, 마음 속으로는 '아무리 그러셔도 진심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자신한다.
그렇게 굳게 믿었던 때문일까. 12/19일 수요일 저녁 6시, 방송사들의 출구 조사 결과를 보고서 가슴 한 켠이 '쿵' 하고 내려 앉은 충격 속에서 저녁 공동체 미사를 어떻게 참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主よ哀れみたまえ(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입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왈칵 터져 버린 눈물로 미사 내내 그 감정을 추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설마, 출구조사결과처럼은 되지 않을거야. 어떻게 우리 국민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아니야 분명 아닐거야.'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그럴 수 없을 거야'를 되뇌이며 눈물만 뚝 뚝 흘린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당연하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런저런 말들로 진심을 가리려해도, 그 살아온 생을 보고, 그 사람이 해 온 일을 보고, 그 사람의 언행을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것들로 진심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그것을 잘 알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더우기 그게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아무리 악이 활개를 치고 승리하는 것 처럼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일지라도 마지막에는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믿음 때문이리라. 그래서 너무 명확해 보이는 진실들에,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각종 지지율과 이상한 현상들에 '설마 설마'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진심을 알아볼 수 있는 많은 진심들이 있으니 그 결과는 또 사뭇 다르리라 굳게 신뢰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신뢰와 믿음이 공허하게 무너지는 체험을 하면서 '도대체 내가 믿는 진실, 정의, 믿음, 그리고 신의 뜻'을 들먹여가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 '정말 신은 있는가?' 라는,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질문에까지 스멀스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눈물콧물 범벅 사건'이 있은 후 공동체 원장 신부님은 무슨 일인지를 물어온다. 그리고 '신이 정말 있기는 한 것입니까?'라고 구구연이 하소연 하는 내게 다짜고짜, "수사님, 그러니까 한국 돌아가지 말고 일본에서 삽시다." 한다. 선교사로 20여년을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원장 신부님은 한국의 상황에 낙담해 있는 내게, 전혀 문맥에도 맞지 않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 보다도 사흘 먼저 선거가 치러진 일본에서도 보수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과반 의석도 아닌,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3분의 2석을 차지했으니 선거권도 없는 외국인 선교사로, 그래도 개혁정당의 이런저런 정책을 지지해 오던 어른 신부님들부터 젊은 수사님들까지 이번 선거의 결과로 일본 정부의 보수우경화를 심각하게 우려하면서도, 어찌보면 더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이곳에서 함께 살자'라고 이야기 건네는 것을 보면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싶다. 걱정스러운 현실에서도 그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낙심에 빠져 있는 이를 피식 웃게 만드는 힘, '저 한 없는 낙천성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저 알 수 없는 "희망"의 정체는 무어란 말인가?'
선거 결과의 충격으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전해오는 소식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페이스북도 손을 떼었다. 아예 컴퓨터를 켜지도 않으려다가 성탄과 연초 소식을 전해야 할 벗들이 있어서 겨우 메일을 살펴 답신을 보내는 정도다.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으니 당분간은 또 이렇게 마음을 살펴야 할 일이다. 무엇을 희망했고 무엇에 실망했는지, 무엇에 기뻐했고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지, 무엇을 배웠고 또 무엇을 깨달았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알아 듣는 것은, 나와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이 나 보다도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의 희망함 보다 그이들의 '희망함'이 더 컸을지도, 상대방의 바램이 나의 '바램' 과는 또 다르게 더욱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내가 '말도 안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들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내 희망도 간절했지만 그이들의 희망이 나 보다도 더 절실했다면, 신은 또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로 당신의 뜻을 펼치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결과'로,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결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그날이, 나와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보게 했고, 또 무엇인가가 그이들에게 더 큰 '희망'과 '기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꼭 그랬을 것이다. 그 바램들이 모이고 모여 그이들에게는 또 그것이 '당연한 결과'로 돌아 온 것이다. 내가 편협하게 고집하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부, 명예, 권력, 지식이 아닌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살아 가는지'의 모습이라면, 그래서 내 적은 경험의 한계 안에서 '정의'라고, '신의 뜻'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낙담하면서 눈물 흘린 것이라면, 나와 다르게 선택한 이들이 걸었던 '희망'과 그이들이 생각하는 '정의, 신의 뜻'에 대해서 나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지금부터 지켜 보련다.
5년 전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선택'을 보고, 그리고 '설마'가 '역시나'로 거듭 확인되면서, 지난 5년간은 한 번 '비싼수업료' 지불했으니 또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지 '설마 설마' 했다가, 왜 항상 '설마'와 '역시나'는 쌍으로 들어 맞는 것인지 속상해 하면서도, 그럼에도 나와 다르게 더 많은 이가 '희망'을 걸었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던 나 역시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 보련다.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도, 다시 희망을 거는 이들에게도 이번에는 제발 '설마'와 '역시'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기를 간절히 청해 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걸음에 이사야 예언서를 택해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겠습니다'고 출사표를 던지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이도 국민들 앞에서 실천을 다짐했던 것들에,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눈에서 눈물 흐르지 않도록, 자신의 삶 터에서 애꿋게 쫓겨나지 않도록, 가진 것이라곤 목숨 하나 밖에 없기에 그 생명을 포기하게끔 절망하지 않도록,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자는 주장이 철장밖에서도 가능하도록, 먹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조금 부족해도 조금 덜 똑똑해도 조금 더 약해도 온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人(사람)일 수 있기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설마'와 '역시'라는 공식
한국의 '대통령선거'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 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 30여년을 살고 계신 신자 한 분이 내게 지지 후보를 물어 왔다. '정치'를 화제로 올려 젊은이건 어르신이건 별로 유쾌한 기억이 없던 나는, 그냥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 궁금하신지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더 도망가지 못하고 지지 후보를 밝혔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그분을 말리며 그 지지 이유로 "그 사람의 지위도, 정당도,... 잘 생겼고 못 생겼고의 인물도 아닌, 그저 그 사람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그렇게 지지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감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든다. 그리고 나는 또 그렇게 한 참을 귀 기울이며, 마음 속으로는 '아무리 그러셔도 진심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자신한다.
그렇게 굳게 믿었던 때문일까. 12/19일 수요일 저녁 6시, 방송사들의 출구 조사 결과를 보고서 가슴 한 켠이 '쿵' 하고 내려 앉은 충격 속에서 저녁 공동체 미사를 어떻게 참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主よ哀れみたまえ(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입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왈칵 터져 버린 눈물로 미사 내내 그 감정을 추스리느라 애를 먹었다. '설마, 출구조사결과처럼은 되지 않을거야. 어떻게 우리 국민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아니야 분명 아닐거야.'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그럴 수 없을 거야'를 되뇌이며 눈물만 뚝 뚝 흘린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당연하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런저런 말들로 진심을 가리려해도, 그 살아온 생을 보고, 그 사람이 해 온 일을 보고, 그 사람의 언행을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것들로 진심을 가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그것을 잘 알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더우기 그게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아무리 악이 활개를 치고 승리하는 것 처럼 보이는 부조리한 현실일지라도 마지막에는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믿음 때문이리라. 그래서 너무 명확해 보이는 진실들에,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각종 지지율과 이상한 현상들에 '설마 설마'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진심을 알아볼 수 있는 많은 진심들이 있으니 그 결과는 또 사뭇 다르리라 굳게 신뢰를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신뢰와 믿음이 공허하게 무너지는 체험을 하면서 '도대체 내가 믿는 진실, 정의, 믿음, 그리고 신의 뜻'을 들먹여가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 '정말 신은 있는가?' 라는,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질문에까지 스멀스멀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눈물콧물 범벅 사건'이 있은 후 공동체 원장 신부님은 무슨 일인지를 물어온다. 그리고 '신이 정말 있기는 한 것입니까?'라고 구구연이 하소연 하는 내게 다짜고짜, "수사님, 그러니까 한국 돌아가지 말고 일본에서 삽시다." 한다. 선교사로 20여년을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원장 신부님은 한국의 상황에 낙담해 있는 내게, 전혀 문맥에도 맞지 않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 보다도 사흘 먼저 선거가 치러진 일본에서도 보수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과반 의석도 아닌,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3분의 2석을 차지했으니 선거권도 없는 외국인 선교사로, 그래도 개혁정당의 이런저런 정책을 지지해 오던 어른 신부님들부터 젊은 수사님들까지 이번 선거의 결과로 일본 정부의 보수우경화를 심각하게 우려하면서도, 어찌보면 더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이곳에서 함께 살자'라고 이야기 건네는 것을 보면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싶다. 걱정스러운 현실에서도 그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낙심에 빠져 있는 이를 피식 웃게 만드는 힘, '저 한 없는 낙천성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저 알 수 없는 "희망"의 정체는 무어란 말인가?'
선거 결과의 충격으로 지금까지 한국에서 전해오는 소식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페이스북도 손을 떼었다. 아예 컴퓨터를 켜지도 않으려다가 성탄과 연초 소식을 전해야 할 벗들이 있어서 겨우 메일을 살펴 답신을 보내는 정도다.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으니 당분간은 또 이렇게 마음을 살펴야 할 일이다. 무엇을 희망했고 무엇에 실망했는지, 무엇에 기뻐했고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지, 무엇을 배웠고 또 무엇을 깨달았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알아 듣는 것은, 나와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이 나 보다도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의 희망함 보다 그이들의 '희망함'이 더 컸을지도, 상대방의 바램이 나의 '바램' 과는 또 다르게 더욱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내가 '말도 안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들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내 희망도 간절했지만 그이들의 희망이 나 보다도 더 절실했다면, 신은 또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로 당신의 뜻을 펼치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믿을 수 없는 결과'로,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결과'로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그날이, 나와 다른 선택을 했던 이들에게는 내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보게 했고, 또 무엇인가가 그이들에게 더 큰 '희망'과 '기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꼭 그랬을 것이다. 그 바램들이 모이고 모여 그이들에게는 또 그것이 '당연한 결과'로 돌아 온 것이다. 내가 편협하게 고집하고 있는 사람을 대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부, 명예, 권력, 지식이 아닌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살아 가는지'의 모습이라면, 그래서 내 적은 경험의 한계 안에서 '정의'라고, '신의 뜻'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낙담하면서 눈물 흘린 것이라면, 나와 다르게 선택한 이들이 걸었던 '희망'과 그이들이 생각하는 '정의, 신의 뜻'에 대해서 나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지금부터 지켜 보련다.
5년 전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선택'을 보고, 그리고 '설마'가 '역시나'로 거듭 확인되면서, 지난 5년간은 한 번 '비싼수업료' 지불했으니 또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지 '설마 설마' 했다가, 왜 항상 '설마'와 '역시나'는 쌍으로 들어 맞는 것인지 속상해 하면서도, 그럼에도 나와 다르게 더 많은 이가 '희망'을 걸었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던 나 역시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 보련다. 희망을 걸었던 이들에게도, 다시 희망을 거는 이들에게도 이번에는 제발 '설마'와 '역시'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기를 간절히 청해 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걸음에 이사야 예언서를 택해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겠습니다'고 출사표를 던지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이도 국민들 앞에서 실천을 다짐했던 것들에,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눈에서 눈물 흐르지 않도록, 자신의 삶 터에서 애꿋게 쫓겨나지 않도록, 가진 것이라곤 목숨 하나 밖에 없기에 그 생명을 포기하게끔 절망하지 않도록,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자는 주장이 철장밖에서도 가능하도록, 먹고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조금 부족해도 조금 덜 똑똑해도 조금 더 약해도 온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人(사람)일 수 있기를....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