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실패(?)'의 체험

해피제제 2012. 2. 4. 08:44

1독서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복음말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단상

실습을 마치고 신학을 준비하는 수사님 다섯과 실습으로 파견 받은 수사님 다섯,
그리고 실습 1년을 마치고 2년을 준비하는 수사님들의 나눔이 밤 늦도록 이어졌다.
‘나는 실습기때 무엇을 청하고, 무엇에 실패(?) 하였으며
그리고 이 체험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눔들이다.

이제 막 실습에 들어 선 수사님들은 실습에 임하는 자신들의 포부를 이야기하고 있고,
1년을 마친 수사님들은 조금 더 깊은 데서 길러진
그러나 여전히 고군분투해야 할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실습을 마치고 새로이 신학으로 파견 받은 내 동기 수사님들은
각자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고 또 품고 살아가야 할지를 이야기한다.

마흔이 훌쩍 넘은 동기 수사님은 사도직과 공동체 생활의 고투 속에
그럼에도 하느님과 함께 했던 깊은 체험을 이야기하며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기도 했고,
누구는 바쁜 사도직 일에 파묻혀 기도에 소홀했던 터에
영적 메마름을 통해 성소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며,
또 어떤 동기 수사님은 복음삼덕 중 ‘순명’에 대한 깊은 체험으로
40에 가까운 자신을 ‘애 취급’하는 장상(원장 등 수도회 내에서 책임을 맡은 이)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하느님 도구로 ‘양성 중’에 있음을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통해 아프게 체험하기도 하였다.

물론 내게도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이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하기도 하였지만
더 큰 화두는 역시나 ‘나 자신 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을 희생하며, 온전히 나를 살피지 않고,
나를 잊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의 체험이다.
형제들과 나눔 도중 사도직을 함께 했던 동기수사님께 ‘나에 대해’ 물었다.
매우 당황해하던 수사님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계속 채근하는 내게
‘생 날것’으로 수사님이 생각하는 ‘형욱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형욱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 단연 으뜸인 것은 한결같이 기도하는 모습이다.
늘 새벽이면 일어나 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모습에 자극도 받았고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동시에 사도직을 하면서 관계를 맺고 만나는 이들에게 헌신을 다하는 모습에 또 배운 것이 많다.
그러면서 예수회 행동양식의 “마지스Magis”를 생각하게 되면서
“너무 분명한 자신만의 수도생활 기준”에서 좀 더 다른 이들에게 시간을 내 주었으면 한다.
근무 시간 이외에는 다른 이들에게 시간을 내 주는 것에 인색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기도며 일에 관해서는 좋아하고 합리적으로 해내는 편이라
성실함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에 다른 이들에게 시간을 내 준다는 것에는 늘 마음 한켠
‘마지스’의 정신, 즉 ‘더욱 사랑하기, 더욱 성장하기’를 생각하면 미안함이 올라온다.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를 보호하고 싶은 것이 크다’.
알다시피 몹쓸 체력으로 이런저런 만남이 이어지면 내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근무 시간에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온갖 에너지를 다 뽑아 쓰기에
오후 3-4시쯤 되면 눈이 퀭하고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곧 쓰러질 태세다.
하니 일과 후 만남은 상상도 못하겠고 퇴근하기가 무섭게 에너지 보충을 해 주어야 한다.
조용한 방 안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넋 놓고 있기 혹은 영적 독서하기 등,
어쨌든 다음날 맑은 정신으로 사람을 만나려면 이런저런 약속도 부득이 멀리해야 한다.
그런 것을 곁에서 보아 온 동기수사님은 내 몸 상태를 잘 알겠으면서도
또 한 편 ‘최소한’의 시간만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같아 늘 불안했던 모양이다.
역시나 그것을 콕 찝어서 알려 주니
내 고민도 그와 같다는 것을 여러 수사님들 앞에서 고백하면서
앞으로의 수도 삶 안에서도 이런 부족함과 실패의 체험 덕분에
부단히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른 수사님들의 나눔도 듣게 되면서
이 천하의 낙천주의자는 그래도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고, 삐지고, 억울해 하는
고군분투 나눔 중에서 정신없이 바쁠 하느님을 생각하니
앞으로의 여정 역시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실 것을 신뢰한다.

실습 중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이아침 하얗게 세상을 덮어 내리는 창밖의 저눈 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또 고군분투, 당신의 자비로운 은총을 청한다.


주님 저희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