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게 말걸기

오랜만입니다

해피제제 2013. 5. 27. 21:04

 

 

'사쿠라'라는 일본말에 경끼를 일으키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따뜻한 봄날 탐스럽게 핀 벗꽃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건
조금은 더 일본삶에 익숙해진 듯 해 보입니다.

일본에서의 생활도 1년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더 많고,
... 신문을 휙 하고 훑다가도 빽빽한 한자에 쳐다도 보기 싫을 정도랍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신문배달 등 우편담당을 하고 있으니....)

전례 순번이 돌아 오면 전날 예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저녁 성무일도 담당은 또 왜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글자 하나하나에 후리카나(발음표)를 달아 두는 것은 물론이요
아는 글자도 어떤 때는 생각나지 않아 순간 당황하기도 한답니다.
이건 뭐, 매 담당일 때마다 마음 속에서는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매번 물을 때마다 귀찮은 내색 않고 소소한 것까지도 마음 써 주는 공동체 형제들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연명해 가고 있는 건 아닌지요.

지난 2월 우역곡절 끝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르고
올 해 부터 STL과정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좀더 언어공부를 하고 싶다고 청했으나 신학과는 후기입학이 없는지라
겨우 '밥 주세요'하는 실력으로 4월 봄학기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뭐 생각해 보면 올 해 시작하건, 내년에 시작하건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그냥 기회가 주어진대로 또 뚜벅뚜벅 걸어가 볼 수밖에요.

처음 얼마간은 모르는 것 투성이에 성질을 부려대며 머리 속에 꾸깃꾸깃 짚어 넣다가
'이러다가 머리 터져(?) 죽겠다' 싶어 고개를 치켜드는 욕심에 토닥토닥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한주가 끝나는 금요일 오후에는 반드시 서너시간씩 산책을 나섭니다.
(그러니 제 페북에 올리는 사진들에 너무 놀러 다닌다고 타박 마시기 바랍니다. ^^)

지금은 책을 사러 책방에 다니기도 하고,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도쿄의 이름난 공원으로 나설 때는 인증샷을 찍어대고 있습니다.
일년 내내 일본어 교과서 이외에는 책이라고는 구경도 못했기에
뭔가 콱 콱 막혀 버린 기분에 이러다가 사단이 나겠다 싶어
처음 도전한 일본어 책, 무려 한달 반에 걸쳐,
모르는 글자가 더 많아 몇 번이고 내팽겨치고 싶은 것을 십자가를 긋고그어대며
그래도 칼을 뽑았으니...라고 생각해서 마지막까지.....
얼마 전 무라카미하루키의 '1Q84'을 손에서 내려 놓고
하루종일 얼마나 뿌듯해 했는지 모릅니다.

좀 더 가벼운 기분으로, 좀 더 여유로운 것이 1년이 되어가는 요즘입니다.

다행히 동경대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기도모임과 학생미사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한국인 신자들의 미사에 함께 하는 시간은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모를, 그래서 치이는 시간들에 쉼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어디서건 열심인 한국인신자들 덕분에 일상생활에서건, 이런저런 먹거리에서건
여러가지 신세를 지고 있기도 합니다.
저야 늘 구정모 신부님에 묻어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지난 해 연피정은 구 신부님이 함께 해 주셔서 뜻 깊은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역시나 선배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에
뭘 하든 믿는 구석이 있으니 불안감은 덜해 보입니다.
저야 하나에서 열까지 새롭게 입고 있는 입장이니 더 그래 보입니다.

어제로 일본어 학원도 졸업(?)을 했습니다.
일년간 중급까지의 과정이지만 나머지는 또 대학원 공부하면서 익혀가야 하겠습니다.
쌩으로 1년을 언어공부해 본 적은 처음인지라 여러가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알아가는 기쁨들, 어느 때건 문득문득 알아듣게 될 때의 고마움들,
게다가 어떻게 언어 공부하는지에 대한 '언어공부법'은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영어'도 일본어 공부법을 통해서 조금씩 시도해 볼 요량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동안은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인 일본어에 더 매달리겠지만
언젠가는 몸에 새겨진 것들이 도움이 되겠지요.

대학원에서는 뭘 공부해볼까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를 쉽게 풀어낼 수 있도록 공부를 더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해당 과목을 거의 수강한 상태고
반면에 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영성'과목은 거의 듣지 않았기에
이왕 수강해야 한다면 그쪽에 초점을 맞추어 전공분야로 삼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법, 전례, 영성, 고해성사, 교회사를 비롯해 서품에 필요한 과목은
올해와 내년이면 얼추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학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동안 작년 오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오호, 1주년 자축파티라도 해야 하려나....별일없이 잘 지냈다고...고맙다고...

많은 분들의 사랑과 기도 덕분에 이렇게라도 바등대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갈수록 내 힘으로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 알아듣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알수없는 연이 닿아 사랑하고, 사랑 받는 체험을 하면서 그렇습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 형제들, 학원에서 만나는 사람들, 예수회원들, 한인 신자들 등등
어디서건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선물같은 인연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연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것, 그래보입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좀더 분명하게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약점을 지니고 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는지,
어느 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지,
수도회 카리스마에 즐겁게 응답하는지, 내적 자유 안에서 살아가는지,
인간적인 약함들을 잔뜩 안고 있지만 그 부끄러움들 세상에, 사람들에,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내어 놓고 천연덕스럽게 웃음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 등 등

여전히 고군분투 하면서도 감사하고, 고맙고, 기쁨으로
그리고 매일같이 흔들대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고백 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마한 은총인지요.


인터넷을 통해 이곳저곳의 소식들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로마, 영국, 필리핀, 캄보디아 최근에는 바티칸의 소식까지도...
(특별히 바쁜 중에도 실시간 소식에, 유려한 번역글, 교회 안팎까지...형제들에게 감사)
그래서인지 더 깊이 수도회 형제들, 교회를 위해, 게다가 교황님에게까지 기도하게 됩니다.
수고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와 기도를 더합니다.

제 게으름으로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뭐,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늘 그 부족함들 안에서 그 마음들 올라올 때마다 기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써야 될 편지, 전해야 할 소식들, 보내야 할 원고들 앞에서 더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미안함으로 화살기도를 날리오니 너무 나무라지 마시길....^^


사순시기 십자가길 위에서의 예수님'온유함'을 기억하며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