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영성을 사는 협력자들에게
최전선에서 요청되는 지혜의 언어
2013년 8월 4일, 레바논 CLC 총회에서 총원장 니코라스 신부님의 말씀
1.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것들
오늘 저는 한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던 것을 나누겠습니다. 한 달 전 즈음 6월 25일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아침 저는 두 명의 수도자를 만났습니다. 만남이 끝나갈 무렵, 그들이 저에게 묻더군요, ‘오늘날 교회에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야기가 다 끝나가는 중이었는데,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우리가 생각과 마음으로 거듭 고민해온 주제입니다.
그 날 오후 교황 프란치스코를 만났는데, 우리 둘 다 바로 똑같은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어떻게하면 예수회가 교회를 가장 잘 돕고, 가장 잘 섬길 수 있을까?'
사실 그로부터 삼 일 전 교황께서 그레고리안 대학 원장인 두모르티에르 신부를 만났을 때 같은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 때 원장 신부에게 예수회원들이 지적 사도직(Intellectual Apostolate)에 아주 심각하게(seriously) 투신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사제들이 변방(periphery)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변방에서 교회를 더 잘 알 수 있고, 변방에 가야 교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functioning) 비로소 알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황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변방에서의 체험은 몹시 중요하지만, 중심(center)에서의 성찰이 보완되어야만 함을 강조하십니다. 중심에서의 성찰이 함께하지않는 변방만의 체험은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찰입니다.
또한 2010년 멕시코에서 있었던 전 세계 예수회 대학들의 모임에서, 참가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슬로건은 ‘피상성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Superficiality)가 오늘날 가장 위험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멕시코 모임에서 나온 메시지는 우리 예수회원들이 성찰에 있어서, 현실 이해에 있어서, 그리고 영성과 그 밖의 모든 것에서 깊이(Depth)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께서는 저를 만날 때마다 제 손을 꼭 잡으며 거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회에 깊이 있는 투신을 원합니다. 깊이 있는 학문, 깊이 있는 영성을 원합니다.'
지금 세상은 깊이(depth)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당장 어떤 주제에 관해서 구글 검색을 해 보십시오. 수많은 페이지의 정보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알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실(truth)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구글도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진리, 진실에 대한 감각, 사실들이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지를 가늠하는판단 기준이 없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저는 ‘킨들(전자책 리더)'로 ‘Difficult Conversations'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모두 가정에서든, 종교에서든, 또는 어떤 경영 현장에서든 대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이 대화에서 어려움에 봉착하는 이유가 각자에게 중요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 주장합니다. 그를 따르면 대화는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 사실의 대화, 즉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를 묻는 단계, 둘째는 감정의 대화인데, ‘내가 상처받았는지, 무시된 건지, 아니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취급되는지?' 셋째는 아이덴터티의 대화인데, 이 대화에서 관건은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라는 질문이 중심입니다.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든 결국) 대화에 이처럼 세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대화를 더욱 잘 이끌어 갈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 모든 주장은 결국 우리에게 깊이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성찰과 지혜를 통한 앎이 필요합니다. (정보, 혹은 주제 자체가 아니라 대화 주체의 깊이 있는 성찰이 관건이라는 말씀이다.)
2. 이 깊이에 대한 요청이 파티마(지난번 CLC 모임 장소)에서 우리가 말한 것과 다른 주제인가?
파티마에 있었던 분들은 우리가 지난번에는 예언자적 사명, 예언자됨의 차원들, 어떻게 하면 예연자적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뭔가 다른주제를 말하고 있는 건가요? 우리가 뭔가 새로운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건가요? 이에 답하기위해서 먼저 성서적 성찰을 좀 나누겠습니다. 이 성찰은 로마 성서 대학 교수들에게 확인을 받았으니 아주 많이 틀린 소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마에 사는 좋은 점은 이렇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 안에는 세 가지의 아주 다른 종류의 언어가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이(a people) 어떤 경험을 해 왔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첫째 언어는 먼저 사람들을 한 민족으로 만든 언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애초에 어떤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노예였고, 착취당하며 빌붙어 살던 이방인들(migrant)이었으며 막 이집트를 탈출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의 앞부분은 그들이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역사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푼 위대한 일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가 함께 섞이며, 사실과 사건들을 드높여 그들이 이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성서에서 역사를 기록한 책들에서 사용한 역사적 언어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며 자신들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당사자들이란 사실에서 자긍심을 느끼도록 해 줍니다.
이렇게 일단 정체성이 형성되면, 예언자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예언자적 언어(prophetic
language)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의 신앙이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아주 깊이 결부되면서 상징조작, 정치적 협소함, 그리고 배제의 논리로 오염되는데, 예언자들이 이 신앙에 도전하며 신앙을 정화합니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성전순례와 축제들을 비판합니다. 종교의 핵심은 연민(compassion)인데, 이스라엘이 연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자 예언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예언자들은 사람들이 계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무시한다면 하느님은 그들의 봉헌이나 희생 제물 따위를 돌아보지 않으시리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예언은 언제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신앙을 정화합니다.
그 뒤에 유배(the Exile)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 대부분이라 말할 때 그 규모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정말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버립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 남겨진 자(remnant)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킵니다. 신앙이 처음에는 하느님이 그들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여 활동하신 내용에 근거하였는데, 어느 날 성전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되자, 그들은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이냐고 묻게 됩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신앙을 떠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는 예언자들도 사라집니다. 신앙이 없는 곳에는 예언의 언어도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떠나게 하는 유배의 상황에서) 예언자들의 노력조차 완전히 실패하고, 사람들은 더는 이들로부터 감화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순간 새로운 언어,즉 지혜의 언어(the language of wisdom)가 등장합니다. 이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바로 그 지혜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 언어가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이 언어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 안에서, 아이들 안에서, 문화 속에서 그 밖에 모든 것 속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즉 깊이와 지혜가 담긴 관계로 들어섭니다. 이 언어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다가가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가 바로 오늘 이 순간 세상의 최전선에서 사용해야 할 바로 그 새로운 언어일 것입니다.
3. 우리는 세상의 어디쯤에 있는가?
유럽과 서양, 소위 서구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언어가 더는 사람들의 삶에 유의미한(relevant)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정화해야 할 신앙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이 때, 성경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지혜가 아시아에 있다(wisdom belongs to Asia)'는 말은 우리가 수년 동안 들어온 말(rhetorics)인데, 저 역시 오랫동안 이 말을 흥미롭게 생각해 왔습니다. 예언자적 언어가 서구 크리스천의 언어라면 아시아의 종교적심성(religiosity)은 지혜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새 우리는 교육 현장에서, 사회 사도직에서, 사목 현장 등등에서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지혜에 대한 요청은 아시아 공동체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께서 세상의 최전선에 가실 때마다 지혜의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프랑스에 가서는 세상(secularity)에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런던에 가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셨고, 독일에 가셔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어에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가난함의 언어, 연민의 언어, 모두에게 ‘굳 모닝', ‘식사하셨어요?'라고 인사하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그 무엇입니다. 이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고, 무엇인가에 맞추어갈 수 있습니다(an ability to change, an ability to adapt).
이 모임에서 여러분은 뿌리(roots)에서 최전선(frontiers)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과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역사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할 시간, 형성된 정체성을 정화할 시간, 그리고 지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 이 세상 속에서는 특히나 지혜의 언어가 더 필요합니다.
무엇인가 궁금해 하며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서는 영지주의자들이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는 크리스천보다 더 좋다는 교황 베네딕토의 말씀은 놀랍습니다. 자기가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아무도 모든 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마닐라에 있는 아시아 사목 센터에오랑우탄이 바닥에 앉아서 위를 쳐다보는 포스터가 하나 있습니다. 포스터에서 오랑우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모든 답을 다 알아냈는데, 갑자기 질문이 다 바뀌었다.' 이 말은 많은 사제들이 가지는 일종의 태도, 즉 일종의 포기 상태를 보여줍니다. 모든 답을 아는 상태로 신학교를 졸업했는데, 막상 나와보니 질문 자체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포스터 속 오랑우탄처럼 느끼는 것이지요...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우리는 이 문제를 좀 진지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서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문화는 점점 더 다원주의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은 지혜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문화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일반적 특징입니다.비록 어떤 지역에서는 이것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지만, 결국 오고야 말 현상입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젊은이들의 삶을 보십시오. 젊은이들은 내내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세상의 주민 같습니다. 저같이 나이 든, 우리는 이 곳을 지나가는 과객이지만.
우리는 세 종류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크리스챤과 새로운 CLC 회원들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할 역사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일단 정체성이 형성된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는 믿는 자들을 쇄신시킬 예언자적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최전선(frontiers; 변방, 힘든 곳)에서 사용할 지혜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 모임에서 여러분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최전선에 대해서 논의할 것입니다. 최전선에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어떤 입장으로 대처할 것인지 논의할 것입니다. 바로 그 곳에서 지혜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피상적 경향을 거부하고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언어입니다.
4.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대해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던 아루페 신부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삶에 대해서 삼중 응답을 제시하였는데,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또 크든 작든 성서에 따른 언어를 사용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많은 사람을 돌보셨지만, 그 많은 사람을 돌보는데 사용할 협조자로 소수의 사람을 선발하셨다는 것입니다.아루페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 모든 예수회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만 한다. (work for the poor)
- 많은 예수회원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만 한다. (work with the poor)
- 소수의 예수회원들(하느님의 부르심과 순명에 따라)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아야만 한다. (live like the poor)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의 한복판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누고,이웃들 안에서 전적으로 삶을 의탁할 수 있었던 시작점이었습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 역시 같은 영감을 줍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교구장으로서 주교관을 거부하고, 그의 집무실 위에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면서... 교황으로서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있습니다. 리오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 대회를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교황은 차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습니다. 교황에게는 독일정부가 희사한 국가 원수급의 멋진 차가 있지만, 그는 그 차를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그보다 조금 낮은 급의 차를 주었지만,여전히 좋은 차였고, 그는 그마저도 거부합니다. 결국, 모든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작은 차를 선택하여 이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리오에서 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그의 차를 에워싸버렸기 때문인데, 교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이를 정말로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교황은 그의 소명이, 그리고 사제들의 소명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처럼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목자란 양들의 냄새를 풍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예수회원들은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요점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조건에 맞추어 아루페 신부님의 삼중 분류를 적용해 볼수 있습니다. 먼저 소수로 부터 시작합니다.
- 소수의 CLC 회원이, 먼저 본인의 자질과 능력이 있고, 여건이 허락하는 조건에서, 학문 연구와 조사 그리고 저술 등의 지적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았다.
-많은 CLC 회원이 탁월하고, 자격을 갖춘 전문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모든 CLC 회원들이 성찰, 기도(meditation), 그리고 사유를 통해서 지혜로서 세상에 응답하도록부르심을 받았다.
5. 이냐시오 영성이 유의미한가?
이런 점에서 이냐시오 영성과 이냐시오 평신도 영성(Ignatian Laity)은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 의미있는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응답하기 위해서 지혜와 깊이가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냐시오 영성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헛것인지,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깊이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성찰과 기도를 통해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이냐시오 영성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깨어서(sensitive) 식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사람들에게 선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식별할 것입니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에게 지침을 주는 분은 교황님입니다. 교황께서는 바티칸의 성 마르타의 집 경당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계십니다. 미사는 그의 강론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조차 그의 강론을 듣고,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전해 준다고 합니다. 교황께서는 성모님에 대해서 특별한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보통 그는 세 개의 요점을 줍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이런 점이 그가 예수회원이란 걸 보여준다고 합니다. 때때로 저는 네 개, 혹은 두 개의 요점을 주는데,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니... 여하튼 교황께서는 성모님을 이해하는데 세 개의 중요한 열쇳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듣기(listening), 식별하기(discerning), 그리고 실천하기(action)입니다. 치비타 카톨릭카의 편집장인 스파다로 신부에 따르면 이 세 단계는 교황의 사유방식을 잘 드러낸다고 합니다. 교황은 지난 봄 동안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름 동안 식별하셨고, 이제 가을이 되면서 실천에 옮기며 결정들을 내리시리라 생각합니다. 곧 많은 중요한 결정들이 발표되리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이냐시오적입니다. 우리는 듣기(listening)라는 아주 핵심적인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세월을 일본에서 살고 난 뒤에 드는 생각인데, 저는 듣기에 보기(seeing)를 더하고 싶습니다. 듣기가 매우 유럽적인 방식임에 반해 보기는 아주 아시아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유럽사람들은 동양사람들과 눈이 좀 다릅니다. 우리(서양인)가 무엇인가를 볼 때, 우리의 시선은 마치 화살처럼 날아갑니다. 그런데 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은 뭔가 좀 더 차분합니다(contemplative). 얼굴에 조화가 있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 어떤 고즈넉한(contemplative) 태도가 있습니다. 만일 성 바오로가 일본인이었다면, 신앙이 듣는 것과 함께 보는 것에서 왔다고 말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 단계는 귀와 눈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이 관여하는 식별(discerning)이 뒤따르고, 손과 발로 이루어질 실천(acting)이 옵니다. 이렇게 우리 몸 전체가 관여하게 됩니다.
6. 이냐시오 영성의 적용
이냐시오 영성은 부단히 시대와 함께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유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성령께 전적으로 의지하기에 놀랄만한 유연성과 창조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론 너무 많은 규칙에 매여있는데, 이냐시오는 이것들에서 벗어나라고, 성령이 우리를 움직이시는 대로 따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예수회원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식별의 대상에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각 지역 장상들이 그들의 현 상황에 기초하여 식별해 나가도록 그들에게 엄청난 자율성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영성은 우리를 식별하는 사람으로 훈련시키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훈련시킵니다. 식별은 반드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식별로 끝나버린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테지요. 그는 도미니칸 신부님입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해방 신학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세상에 가난이 존재하는 한 해방신학은 여전히 의미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영성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가지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 기자는 교회 안에서 백성(lay persons)의 양성에 가장 좋은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구티에레즈는 조금도 망설임없이 ‘이냐시오 영성'이라 대답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성이 현실에 뿌리 박고 있기에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습니다. 총원장의 편지나 훈화보다 우리의 변화를 이끄는 보다 좋은 도구는 현실 자체입니다. 이 영성은 현실에서 출발하며,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중요한 질문은 ‘하느님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느냐'입니다. 이 년 전 수도생활에 대한 세미나에서도 두드러진 하나의 주제는 ‘사명이란 언제나 하느님의 사명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Mission Dei)'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것입니다.
캐런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쓴 ‘위대한 변화(The Great Transformation)'란 책을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칼 야스퍼스가 일컬은 ‘축의 시대(Axial Age)'란 틀로 영성과 종교의 성장을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이 책은 중국, 인도,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에서 인간성의 영적 토대들이 성장하던 결정적 시기를 살펴봅니다. 저자는 이 네 개의 서로 다른 문화 안에서 사회를 바꿀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바로 인간 안에서 일어난 (내적) 변화라는 통찰을 전해 줍니다. 그것은 내적 변화를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내적 여정(inner journey)입니다. 인간의 변화 없는 공산주의가 결국 비인간화되고, 인간의 변화 없는 자본주의가 이기주의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알고 있습니다. 내적 변화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냐시오 영성은 특별히 바로 이 인간의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절에 들어간 한 불교 수도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수도생활을 하려느냐고 묻자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기 때문이라 대답하며 절에 들어갑니다. 일 년 뒤, 같은 친구들이 그에게 무엇 때문에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느냐 묻자 그는 그 주위에 있는 몇 사람들이라도 변화시켜보려고 계속하고 있노라 대답합니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친구들이 그에게 무엇을 배우고 있느냐 물었을 때, 그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고 응답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세상의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이 말하는 바로 그 통찰입니다. 이냐시오 성인 역시 이 점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에서 종교재판소가 이냐시오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여덟 차례나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여덟번 이었습니다! 재판은 매번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냐시오가 아주
조심스러워서, 어떤 정식화된 신학적 주장(formulations)이나 교의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종교재판소는 이것을 위험하게 여겼습니다. 그에겐 자유가 있었고, 통제될 수 없는 성령에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통제되지 않으면 권력자들은 불안해합니다.
7. 누가 이냐시오 영성을 전달할 것인가?
누가 이 영성을 실행해 나갈 것입니까?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현실과 하느님의 영에 열려 있는 모든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 생각합니다. 식별의 과정에 깨어있는 누구라도 이 지혜의 담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전통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를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식별해 내고,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뿌리로 가자(going to the roots)'는 말의 의미는 50년 전이나 450년 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아시아와 유럽과 이스라엘의 ‘어른들’에게로, 결국 하느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뿌리로 돌아갈 때, 최전선에서 두려움 없이 선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최전선에서 우리는 선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제가 어제 강론에서 언급한 그 의사선생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그는 대희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연민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와 연민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을 잊을 때, 우리는 하느님도 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들이 바로 우리 속에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 응답이 바로 우리의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현 교황님이 지금 큰 호소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영성은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따라가며 돕는(accompany) 것입니다. 어제 EA(CLC 동반사제)들과의 만남에서 나온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회원들을 어떻게 동반자로 양성할 것인가였습니다. 우리는 예수회원들을 공동체의 리더가 되도록 훈련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공동체와 함께 하는 사람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성(mind)도 물론 필요합니다. 이성적판단이 없으면 마음은 통제 불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은 언제나 도우미(help)일 뿐입니다.추진력은 반드시 성령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령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냐시오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현실이고, 사람이며,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원의입니다. 우리는 늘 겸손한 질문을 품어야 합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accompany)?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은 신비 중의 신비이십니다.
저는 이냐시오 영성과 이냐시오 백성(Laity)의 영성이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극히 유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제 나눔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들이 진정한 필요에 응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CLC가 교회 안에서 더 많이 기여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로 이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이삶의 방식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논의해 보아야 할 과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냐시오 영성이 오늘 이 특별한 순간에 성령이 움직이시는 곳, 교회 안으로 우리를 더욱 깊이 이끌어 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냐시오 영성은 우리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맙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