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 관계로서의 기도 ‘하느님과 그대’
인격적 관계로서의 기도 ‘하느님과 그대’
글쓴이, 윌리엄 A. 배리
“하느님은 언제나 더욱 위대하시다(Deus semper maior)”
제1장 의식적 관계로서의 기도
의식적 관계는 곧 기도이며, 기도란 하느님께 마음과 정신을 들어올리는 행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억지로 당신 자신을 떠맡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 우리가 당신의 현존을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한다 해도, 또는 우리가 당신의 현존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떤 반응조차 보이기를 거부한다 해도,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자유롭게 놔두신다.
일상에서 수 없이 마주하는 하느님의 현존, 그러나 또 쉽게 지나쳐버리는 그분 현존의 시간들...
내가 일상에서 소소하게 청하는 것조차도,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리라. 더 많은 청원기도를 올릴 때, 주일 미사에 참례하거나 혹은 더 많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자 할 때 그이들의 마음에는 벌써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의 섭리로 돌봐 주고 계심을 내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관계는 그 초석을 다지려는 하느님의 활동과, 아무쪼록 우리가 당신을 알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소망에 기초한다. 그분의 소망은 특히 우리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 당신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존재하심을 우리 모두가 깨달았으면 하는 것이다.
1) 아무리 하느님의 활동이 어렴풋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설령 내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때 나는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청원 기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사실 하느님께서는 정보(사실)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그런 ‘내 느낌’을 그분께서 이미 헤아리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믿는지, 내가 느끼고 소망하는 것을 기꺼이 그분께 알려 드리려는 의지가 나에게 있는지, 즉 나 자신을 그분께 알려 드러내려는 용의가 있는지의 여부이다.
3) 기도 중에 분심이 드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며, 그것은 어느 관계에서나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있을 때도, 친구와 대화 중에 지루하다고 느낄 때 딴 생각으로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4) 기도는 성인들과 신비가들만 누리는 비밀스럽고 난해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다.
제2장 하느님 알아 가기
“하느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사람과 사람이 상대방을 서로 어떻게 알게 되고 또 친해지는지를 한번 되물어 봄으로써 얻을 수 있다. …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더 잘 알고 친해지려면 그와 함께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과연 하느님과 더욱 가까운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잘 알려면 이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뜻 깊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함께 보내지 않고서는 어떠한 긴밀한 관계도 유지하거나 발전시키지 못한다.
그대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기를 바라고 있음을 아는 한, 그대는 하느님과 의식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을 내어야 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라.
유념할 것 하나 더, 흔히 사람들은 ‘참된 기도’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기도를 의식적 관계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기도에 들어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
좀 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이야기해 보자.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책을 읽으며, 산책을 하며, 꽃을 가꾸며, 목욕을 하는 등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하느님께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사고 청할 수 있다. … 나는 하느님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가 이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십사고 부탁할 수 있다.
관상적 기도란, 관계의 기도, 즉 서로 상대방의 현존을 의식하는 기도의 의미로 쓰고 있다. … 하느님의 창조를 관상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무엇보다도 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래서 제일 먼저 꽃, 바람, 별 그리고 나무 등을 감각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내도록 권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조각품에 경탄을 금치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낄지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조각품을 만지고 경탄하는 순간, 우리와 예술가 사이에는 친교가 이루어진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그보다는 주로 평범한 것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
제3장 성경 관상하기
시편 103편과 이사야 43장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1) 성경이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잡아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이 보태진 문학이다.
2) 우리는 성경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서 우리의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3)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사시며 우리의 상상력을 이끄시고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심을 굳게 믿는다.
제4장 하느님과의 관계 발전시키기
친구들끼리는 서로 무엇을 보여 주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어떤 정보다. … 우리는 그들의 마음, 곧 기분, 열정,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가치관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친구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관계는 상호성과 연관이 있다. 만일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원한다면, 나 또한 당연히 나 자신을 상대방에게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투명성이 서로의 마음을 개방케 한다. 더 큰 자유로...).
내가 나 자신을 보여 드리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드리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뢰와 투명성이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이상하게도 우리의 특정 느낌과 태도가 드러나는 것을 내켜하지 않거나, 심지어 하느님께 그런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조차 마뜩치 않아 한다.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지속적인 관계에서 새로운 차원의 친밀함을 맛보게 될 때 우리는 모두 끌어당김(매력)과 밀어냄(반감, 두려움)을 다 함께 체험한다. 우리는 새로운 체험에 대해 흥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대개 우정은 서로 격식을 차리고 깍듯할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 관계는 두 사람이 상대방 앞에서 투명해질수록, 달리 말해 우리가 서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할수록 깊어진다. 관계는 어떤 격한 감정을 의식적으로든 반의식적으로든 상대방에게 감추는 순간 정체되고 만다.
기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들 중 하나는 주님 앞에서 ‘선’해지고픈 욕심이다.
우리 안에 그처럼 친밀함과 투명함이 커질 때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제5장 하느님의 이미지와 기도
두 가지 상반된 감정, 관심-두려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자아’라는 이미지는 우리 어린 시절부터 발전하기 시작하며, 부모님과 우리의 관계, 다른 나이 드신 친척이나 돌보는 이와의 관계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작고, 상처 입기 쉬우며, 감수성이 풍부하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아주 복잡한 세상을 어린아이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도에 더욱 인격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어린 시절 하느님의 이미지가 그러한 잔상 효과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자아가 부정적인 모습으로 내 기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가능한 일은 무엇인가?’하고 되물어 보는 것이다. 어쩌면 하느님께 당장 내가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아무쪼록 당신을 덜 두려워하게 해 주십사고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성품은 오로지 서서히 변화할 뿐이요, 그것도 오직 온갖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의미 있는 관계를 끈기 있게 유지할 때에만 그렇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같은 우리의 성품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있는 그대로 그분께 알려 드리고, 그분 또한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있는 그대로 알려 주신다면, 우리는 우리 모습과 하느님의 이미지가 변화함을 이내 깨달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듭나는 것은 나아 주님의 관계가 발전하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살겠다고 굳게 결심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분명 예수님께서 생각하였을 하느님의 이미지와 점점 더 비슷하게 닮아 간다.
제6장 상상과 기도
기도의 두 방법
1) 상상을 하지 않는 정적인 기도를 강조하는 기도 방식으로 향심 기도
2) 기도에서 감각과 상상, 지성과 의지 같은 능력을 사용하도록 장려하는 예수회의 성 이냐시오 기도법
이미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 특히 복음을 관상할 때 상상을 사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복음 장면에 나오는 말씀을 접할 때 우리는 시와 소설을 읽을 때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 주님께 직접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사고 청할 수 있다.
사람들은 상상하는 능력이 제각기 다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달리 상상을 한다. … 그처럼 사람은 저마다 상상력의 정도가 다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닌 상상력을 쓰시도록 내어 드려야지 우리한테 상상력이 없다고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상상력을 이용하는 법
1) 가족 앨범
2) 기도 모임에서 작은 방에 예수님과 혹은 가족 중 대화하고픈 사람을 초대 한다.
3) 가장 편안한 곳으로 가족 혹은 예수님을 초대
우리는 기도 중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 자신의 과거 체험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 내가 제일 먼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바로 전통에 대한 신뢰이다. 많은 성인성녀들이 이 기도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맺을 수 있었다. …
내가 지적할 것은 식별의 필요성이다. 무엇보다 식별은 우리 인간 본성을 의심하는 데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고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식별의 규칙’ 서두에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은 상냥함, 평화로움, 흔들림 없는 확신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나타난다. 만일 상상력을 사용하였을 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물론 하느님과 예수님을 더욱 잘 알고자 하는 열망이 커질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감정까지 불러 일으킨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목적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고 계시다고 굳게 믿을 수 있다.
죄란 자신의 선함과 바람직함에 대한 부정,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사랑스럽고 선하게 지어내신 하느님의 창조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 세바스찬 무어
꼭 영적 지도자가 아니어도 그저 그 기도를 ‘잘 들어주는 사람’만 있어도 은총이다.
제7장 감정과 기도
우리가 그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정보뿐 아니라 감정과 느낌, 가치관까지 스스로 숨김없이 드러내려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감정과 어두운 감정까지도... 사목자들이 수많은 가르침과 강론에서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큰 실수다. …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데 사목적․영성적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를 그토록 바라셨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선하게, 진실로 참 좋게 바라보셨다(창세기 1장).
내 생각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자신의 분노와 공격성, 성적 느낌과 욕망을 드러내 보이기를 가장 어려워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분노의 대상이 될 때 그 관계가 어찌될지 한 번 생각해 보라. 그 참혹함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당연히 우리는 상처와 분노를 함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관계에서 서서히 격식을 차리고, 무덤덤해지며, 점점 더 멀어진다. … 예전에는 서로 생각과 느낌과 체험을 많이 나누었건만,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틀에 박혀 따분하기 그지없다. …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친구나 배우자이기에 차마 우리의 상처와 분노를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 주저한 까닭에 그리된 것이다. … 그러나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그 관계가 둘 사이에 쌓인 분노나, 원망 어린 느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견뎌 낼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신뢰가 약하다는 점이다.
기도가 지루하고 힘든 것은 대개 그와 같이 (감정이) 억눌려 있다는 표시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인내와 끈기를 지닐 필요가 있으며, 주님 앞에서 ‘선’해지고픈 열망이 오히려 기도에 장벽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더욱 솔직해지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형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고 그분이 들어주고 계실 때 점차 형에 대해 다른 것들이 찾아 들게 된다. 바로 형의 선함들이다. 그리고 서서히 화해가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성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인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한번에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 주님께 자신의 성적 측면을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심정을 극복하게 해 주십사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뒤 서서히 내가 가장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부분에 다가갈 수 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 상황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책 역시 투명함이다. 주님께 무조건 매달려 당신의 현존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려 주십사고 조르자. 강렬한 감정들은, 만일 그것이 우리 눈에 어떻든 ‘격식을 차리는 사이’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질 때는, 주님과 우리와의 성숙한 관계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님과의 관계를 ‘격식을 차리는 사이’에서 아주 친한 친구 사이로, 모든 것을 서로 이야기하거나 적어도 이야기하려 노력하는 관계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제8장 기도를 시작하는 법, 어디에서 어떻게 기도할까
친구를 만나면 “안녕, 나 조야, 어떻게 지내?”라고 말하듯이 우리는 주님께도 이와 비슷한 인사를 건넬 수 있다.
‘어디에서 기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 가까운 관계에서는 특별한 형식을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으며, 특별한 장소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 우리의 모든 행동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하든 그 일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먹고, 마시고, 목욕하고, 담배 피우면서 기도할 수 있다. 누구나 침대에서, 성당에서, 부엌에서, 야외에서 기도할 수 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또 의식하게 될 수 있는 한, 우리는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다.
진정 하느님과 관계 맺기를 원한다면, 가난한 대학생 연인이 비싼 식당이 아니더라도 싸구려 식당에서 얼마든지 행복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기도하면 된다.
제9장 기도에 대한 응답
예를 들면 제인 숙모가 임종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께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니다. 청원은 그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제인 숙모의 질병과 제인 숙모를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청원기도는 나의 관심사를 가지고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시작하나, 또한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도 고려한다. 하느님 앞에 내 모든 관계와 관심사를 가져가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그분을 더욱 잘 알게 되고, 나의 관심사와 나의 세계를 그분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술과 같은 해결책을 기대하던 마음을 버리고, 우리와 우리가 속한 세상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더욱 잘 파악해서 구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정의로운 세상 가설’을 추종하게 된다고 한다. 욥의 세 친구처럼, 우리도 ‘나쁜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단정을 내리고 만다. 요컨대, 나쁜 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틀림없이 죄를 지었거나 피할 수도 있었던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이른바 ‘피해자 탓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계시는 하느님, 곧 그들 자신이 희망할 수 있는 하느님, 그들 삶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발견한다. 욥기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정의로운 세상 가설’에서 제시하는 대답과는 전혀 다르다. 그 결과 그들은 청원 기도를 하면서도, 혹시 마법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과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바치는 청원 기도는 하느님과 함께 자신의 친구, 원수, 온 세상 곳곳에서 고통받는 형제자매와 통교하는 대화의 장이다.
제10장 교리와 기도
우리 체험의 종교적 영역을 눈여겨봄으로써 우리에게 단지 개념적이었던 교리는 실질적인 것이 된다.
단순히 과거나 미래로서의 부활은 우리에게 별다른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며,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험들이 이미 부활 체험이며, 이로써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새 생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제11장 기도의 효과
미국인들은 결과를 중시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절대로 과정 자체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도의 효과’를 묻는 질문은 적절치 않다. 왜 우리가 기도의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사랑하는 이와, 예를 들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함께 보내는 시간을 정당화해야 하는가? 우리가 관계에 참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려서이지, 그 관계 덕분에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식적 관계로서의 기도에 참여하는 까닭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대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의 가치관, 그대의 자세, 그대의 행동에 감탄을 터뜨린다. 그대를 알아갈수록 나는 나의 감탄을 자아내는 그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임을 눈여겨보라. 그대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내가 본 그대의 모습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분들이 사랑의 대가로 그와 같은 순종을 요구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감탄하고 또 우리가 그분들을 닮으면 닮을수록 그만큼 더 온전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가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그들 자신이 머물러 있기를 원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에게 더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친구,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같이 용서하기를 갈망한다. 바꿔 말하면, 즉 전통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관상하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청한다. 그러면서 점차 그들은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는 굳센 의지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총과 선물에 힘입어 거의 저절로 일어난다. 변화는 우리의 힘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기에 이른 사람들은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더 나은 배우자, 더 나은 동료, 더 정직한 일꾼, 더 진시하고 충실한 친구이다. 그들은 세상을 더 정직하게 바라보고, 몰인정함과 불의를 더 쉽게 깨닫는다. 그들은 더 측은지심을 가지며, 정의를 행하는 일에도 더 열정적이다. 예수님께서 평안히 계신 저이 거의 없으니 그들도 평안히 있을 수 없다. 오스터후이스는 자신의 기도 중 하나에서 예수님을 “까다로운 친구”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또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에서 까다로운 친구일 수 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 같은 효과가 기도의 첫째 동기는 아니다. 효과는 다만 부차적 산물일 따름이다. 기도의 첫째가는 동기는 사랑, 즉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눈뜨는 것이 둘째이다.
제12장 영적 지도
영적 지도자는 귀하가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하느님을 실제로 어떻게 체험하였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귀하의 체험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며, 끈기 있게 인내하며 귀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기도할 때 하느님께 바라거나 구하는 건 뭐죠?”
관계는 당사자인 두 사람이 서로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발전합니다. 귀하의 영적 지도자는 귀하가 삶의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가장 잘 만날지 결정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는 영적 지도란 비밀스런 것도,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나누는 두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기도 체험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제13장 결론
기도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바라시고 또 우리가 당신과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기회를 내어 드릴 때 무척 기뻐하신다. … 하느님께서 메리 스미스를 사랑하시는 것은, 그녀가 어떻게든 교회에서 선행을 베풀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단지 메리를 사랑하실 뿐이고, 그녀를 사랑하심으로써 또한 그녀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신다. 만일 메리가 그 사랑을 의식하고 받아들인다면, 단언컨대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이 몸담고 사는 세상에서 더욱 건강하게 살아갈 것이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그처럼 기뻐하시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말해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로지 ‘아빠’로서, 즉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로서 존재하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알려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