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인내로써 생명을...
해피제제
2011. 11. 23. 06:37
1독서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말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단상
몸이 아프니 만사가 다 귀찮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먹는 것도, 심지어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새벽녘에 잠이 깨어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죽하면 '아, 이래서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청원 기도를 드리는구나' 싶다.
복통이 너무 심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앉았다 일어섰다가 또 누웠다가 앉았다가....
가장 아프지 않을 자세를 찾아 보지만 5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공동체에 준비해 둔 약을 찾지만 마땅한 약이 없다.
겨우 '훼스탈'이라는 소화제를 찾지만 유효기간이 '2007년 4월', 한참이나 지난 날짜다.
그래도 어쩌랴 이거라도 먹어야지 이 고통이 줄어들까...
다행히 4년이 더 지난 약이지만 약기운이 서렸는지
속에서 미식거리기 시작하면서 변기통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댄다.
서너번을 그러고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맺힌 것이 풀리니 여전히 끙 끙 앓은 소리를 내지만 한결 좋아진 게 '살았다' 싶다.
간밤 설친 잠에 얼굴이 하얗게 뜬 것을 보고 신부님도 동기수사도 출근을 말린다.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이 몸에 배였다해도 오늘은 아니다.
해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못 잔 잠을 청해 본다. 만사가 다 귀찮다.
어떻게 알았는지(아마도 블로그에 글이 없어서였으리라) 동기수사님을 통해
와병(?) 중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나보다.
동기수사님은 손사래를 치며 공동체에서 조용히 쉬고 있고 약을 먹였으니 괜찮다며
미음을 끓여 가겠다는 것도 찾아 방문하겠다는 것도 거절했으리라.
주는 것에 익숙한 수도자들이 받는 것에는 늘 이렇게 조심스러우니
문 앞까지 찾아 왔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누군가는
마음에 서운함이 남았으리라.
그것도 넘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니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운함들을 짐작해 본다.
아픈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서 잘 찾지도 않는 병원을 찾아가서
맥없는 모습으로 한 참을 기다려서 간단히 '복통'이라는 진단을 받고
또 기다려서 약을 찾아서 그래도 약을 먹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니
병원 앞 죽 파는 집에 들어가 억지로 꾸역꾸역 들이민다.
년에 한 두 번 행사를 치르면서 이렇게 계획에 따라 척 척 일처리를 해대니
별로 집 생각이 나거나 곁에 누군가를 그리워 하지도 않는다.
그냥 몸이 아픈 것이고, 또 약을 짓고 하루 이틀 쉬면 되는 것이다.
연옥에 가서 먹어야 된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변질된 음식을 먹은 것도 그렇고,
간밤 끙 끙대며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을 부르며 애원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냥 내 몸에 병 주고, 약 준 것도 내 탓이니 그냥 조용히 머물면서 몸도 챙기고
올라오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아픔이 특별할 것도 없고 그냥 살면서 밥 먹듯이 일어날 일 그저 일어난 것이다.
유난스러울 것 없이 하루를 내주고 몸을 살피면 그것으로 족해 보인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그래 보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일의 일상에서 심지어 이런 잠 못 이루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지 못함을 경계해야 할 것,
'차라리 그냥 죽겠해 달라'는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며
오랜 병상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 듣게 되었고,
'주는 것에 익숙해서 받는 것에 조심스러움이 있구나'하는 깨달음,
그래서 '받는 것'에도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무리 후들거리는 아픔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삶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그래서 병원을 또 씩씩하게 찾아가서 마치 남의 일인양 일처리 해야 하는 내 삶의 모습,
이 아픔이 상한 음식을 먹은 내 탓이듯, 별 철 없는 이유로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붙잡고 싶은 것이 있어 낫기를 청하는 기도 등
복통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나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나다.
그리고 나 보다 더 아파해 준 벗에게는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다.
임금님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임금님의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찬송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말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단상
몸이 아프니 만사가 다 귀찮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먹는 것도, 심지어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새벽녘에 잠이 깨어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죽하면 '아, 이래서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청원 기도를 드리는구나' 싶다.
복통이 너무 심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서 앉았다 일어섰다가 또 누웠다가 앉았다가....
가장 아프지 않을 자세를 찾아 보지만 5분을 채 넘기지 못한다.
공동체에 준비해 둔 약을 찾지만 마땅한 약이 없다.
겨우 '훼스탈'이라는 소화제를 찾지만 유효기간이 '2007년 4월', 한참이나 지난 날짜다.
그래도 어쩌랴 이거라도 먹어야지 이 고통이 줄어들까...
다행히 4년이 더 지난 약이지만 약기운이 서렸는지
속에서 미식거리기 시작하면서 변기통을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댄다.
서너번을 그러고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맺힌 것이 풀리니 여전히 끙 끙 앓은 소리를 내지만 한결 좋아진 게 '살았다' 싶다.
간밤 설친 잠에 얼굴이 하얗게 뜬 것을 보고 신부님도 동기수사도 출근을 말린다.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이 몸에 배였다해도 오늘은 아니다.
해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못 잔 잠을 청해 본다. 만사가 다 귀찮다.
어떻게 알았는지(아마도 블로그에 글이 없어서였으리라) 동기수사님을 통해
와병(?) 중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나보다.
동기수사님은 손사래를 치며 공동체에서 조용히 쉬고 있고 약을 먹였으니 괜찮다며
미음을 끓여 가겠다는 것도 찾아 방문하겠다는 것도 거절했으리라.
주는 것에 익숙한 수도자들이 받는 것에는 늘 이렇게 조심스러우니
문 앞까지 찾아 왔다 얼굴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누군가는
마음에 서운함이 남았으리라.
그것도 넘어야 할 우리들의 몫이니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운함들을 짐작해 본다.
아픈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서 잘 찾지도 않는 병원을 찾아가서
맥없는 모습으로 한 참을 기다려서 간단히 '복통'이라는 진단을 받고
또 기다려서 약을 찾아서 그래도 약을 먹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니
병원 앞 죽 파는 집에 들어가 억지로 꾸역꾸역 들이민다.
년에 한 두 번 행사를 치르면서 이렇게 계획에 따라 척 척 일처리를 해대니
별로 집 생각이 나거나 곁에 누군가를 그리워 하지도 않는다.
그냥 몸이 아픈 것이고, 또 약을 짓고 하루 이틀 쉬면 되는 것이다.
연옥에 가서 먹어야 된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변질된 음식을 먹은 것도 그렇고,
간밤 끙 끙대며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을 부르며 애원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냥 내 몸에 병 주고, 약 준 것도 내 탓이니 그냥 조용히 머물면서 몸도 챙기고
올라오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아픔이 특별할 것도 없고 그냥 살면서 밥 먹듯이 일어날 일 그저 일어난 것이다.
유난스러울 것 없이 하루를 내주고 몸을 살피면 그것으로 족해 보인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그래 보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일의 일상에서 심지어 이런 잠 못 이루던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지 못함을 경계해야 할 것,
'차라리 그냥 죽겠해 달라'는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며
오랜 병상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 듣게 되었고,
'주는 것에 익숙해서 받는 것에 조심스러움이 있구나'하는 깨달음,
그래서 '받는 것'에도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는 마음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무리 후들거리는 아픔일지라도 '내가 선택한 삶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그래서 병원을 또 씩씩하게 찾아가서 마치 남의 일인양 일처리 해야 하는 내 삶의 모습,
이 아픔이 상한 음식을 먹은 내 탓이듯, 별 철 없는 이유로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러면서도 붙잡고 싶은 것이 있어 낫기를 청하는 기도 등
복통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나는
역시나 어쩔 수 없는 나다.
그리고 나 보다 더 아파해 준 벗에게는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