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게 말걸기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해피제제 2011. 8. 15. 15:35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오강남, 성해영 대담집

이 책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와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를 비교 연구하고 있는 성해영 교수의 대담집이다. 오강남 교수는 오랫동안 비교종교학을 강의하면서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글을 통해 21세기 언어로 ‘종교’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오 교수와 제자의 연을 맺고 있는 성해영 교수 역시 비교종교학을 연구해 오면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나열해 가며 무엇이 ‘종교’인가를 알기 쉬운 언어로 표현해 주고 있다.

먼저 종교학자들의 주장처럼 종교란 ‘엄청나며, 동시에 매혹적인 신비의 체험’(루돌프 오토)이며, 또 ‘궁극관심’(폴 틸리히), 무엇이든지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탐구이다. 요아킴 바흐는 종교의 네 차원을 소개한다. 첫째 교리적 차원, 둘째 제도적 차원, 셋째 사회적 차원, 넷째 체험적 차원이다. 그에 따르면 종교 체험의 네 가지 특성으로, 1)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체험, 2) 그것이 지,정,의를 포함하는 인간의 전존재와 관련된 체험이라는 것, 3) 인간의 다른 어떤 체험보다도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역동적 체험이라는 것, 4) 행동을 불러오는 체험이라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신비체험의 네 가지 특성으로 1) 불가형언성, 2) 앎의 특성, 3) 수동성, 4) 일시성을 나열한다. 형언할 수 없음과 신비적인 것은 인간 지성을 일깨워 앎으로 나아간다는 것, 절대자로부터 주어짐, 일시적인 현상으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핵심이란 다름 아닌 ‘궁극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이다. 종교 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변화’된다. 다마스커스 도상 위에서의 바오로 사도와 같이, 혹은 서서히 토마스와 같이 그리고 오늘날의 신앙인처럼 말이다.

우리와 같은 평신도(?) 였던 파스칼은 말한다; ‘자신이 체험한 신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지, 신학자, 과학자들의 하느님은 아니다.’

오강남과 성해영 교수는 종교를 표층과 심층으로 나누고 있다. 표층종교는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의 종교를 말한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더 큰 앎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산타 할아버지’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뜻에서 그이들은 심층이, ‘깨달음’ 체험에 뿌리를 둔 종교를 지칭하는 보다 간결한 표현이 바로 ‘심층종교’라 말한다.

표층적 차원: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로 문자 그대로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나에게 선물을 가져온다는 믿음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표층종교는 문자주의적이다. 즉 문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표층종교가 득세를 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신을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문자주의적(원리주의, 근본주의) 종교는 확실한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종교가 그런가?

문자주의적 종교의 위험성을 막스밀러라는 종교학자의 표현을 빌면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며 여타 다른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인들을 더 큰 앎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심층으로 안내하게 만든다.

물론 표층과 심층을 구분해 내기는 어렵다. 데일캐넌은 성스러운 미래, 올바른 행동, 헌신, 샤먼적인 접촉, 신비주의적 추구, 이성적 탐구와 같은 심층종교의 특성이 모두 표층종교일 수도 있고, 심층종교일 수도 있다고 한다. 때로는 심층이 드러나는 순간 이전의 층위는 모두 표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심층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로는 신비주의의 길, 1) 자의식으로서,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뜻, 2) 자기의 모자람을 없애려는 정화의 길, 이기적인 자기를 없애고 사랑을 하려고 시도하는 과정, 3) 빛을 보는 조명, 내면적 통찰과 직관이 가능해지는 깨침, 4)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임을 인식했거나, 나아가고 있거나, 나아간 경우를 말한다. 인생사에서는 여전히 도상 위에 있다는 말이 맞겠다.

종교의 표층 차원이 개인의 ‘믿음’을 강조한다면, 심층종교는 거의 대부분이 ‘깨침’을 강조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어린아이와 같을 때는 지금까지 이 교회를 지탱한 교리와 신학과 성인들의 지혜를 믿어 볼 일이다. 그러나 어른이 될 때는 파스칼의 말처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 아닌 ‘내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그것은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할 일이다.

한 가지 더, 카리스카를 가진 뛰어난 종교인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이들의 일탈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깨달음의 체험을 가지기 전에 도덕적인 수행을 끈기 있게 지속하는 것은 체험이 있은 후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망치지 않도록 만들며, 동시에 이기적이지 않은 제대로 된 봉사를 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하다. 요즈음 들풀처럼 번지고 있는 교회 내의 아동성추행이나 큰 스승들의 섹스 스캔들은 그래서 더 세간의 이목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종교의 심층으로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윤리적, 지성적 수행 없이 곧바로 체험만을 원하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 하겠다.

종교는 체험의 언어이다. 그런 터에 신앙은 지성을 넘어서는 것이지 지성에 반하거나 못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느님이 인간에서 이성을 그냥 주셨을 리가 없다. 늘 말하듯 ‘상상력’이 선물이듯 종교 체험과 신앙의 언어도 이성적 조명이 필요하다.

종교의 길은 희생의 길이 아니라 걸어가는 자체가 즐거움의 과정입니다.

오 교수와 성 교수의 대담에서처럼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 보는 것’이 상당수 심층종교인들의 견해다.

표층과 심층종교,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오늘 또 좋은 것을 배운다. 감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