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수, 산 예수
2000년 전 그리스도교 신앙내용을 어떻게 그 시대의 생생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즉, '교의'로 정리된 그리스도교를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통계를 보면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3할 가량이다.
그런 중에 젊은청년들은 점점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교회가 그이들에게 어떤 매력도 전해 주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단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서 갈등하느니보다 마음 편하게 자신 만의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그리고 하느님 말씀에 따라 착하게 살겠단다.
언뜻보면 옮아보인다.
그런데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기쁨'에서 교회의 '새로운 선교'에 대해 꿈을 꾼다.
선교란 교회가 세례를 베풀고 성경의 지식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다.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서 배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상처받고, 고통 중에 있고, 박해 받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의 '집'이라고 느낄 때 '선교'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이들이 가슴으로 느끼고 교회 공동체가 '내집'이라고 여기며 위로를 받을 때
그이들은 교회 공동체를 동경하고,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게 된다.
교회가 그이들에게 '내집'이라는 느낌을 전해주지 않을 때
가슴으로 울림을 전하지 못한다면 죽은 예수를 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계시와 전통은 2000년 전의 오래된, 지난 시대의 죽은 역사가 아니다.
여전히 인류 전체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부활을 살고 있다.
교황의 언어를 따르자면 교회는 '박물관'이 아니다.
우리 시대 한 가운데에서 생기 가득하게 살아 있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의 복음이 과거의 '좋은 말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고통 받고 소외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나야 한다.
그래서 예배당 내에서의 듣기 좋은 말씀에 국한 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리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세계 곳곳에서
붉은 햇살과 아침 이슬 같이 영롱하게 되살아 나야 한다.
그것은 예수와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것은 예수의 체험이 내 체험이 될 때에 가능하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전해질 때에 가능하다.
광적인 맹신이 아닌 이성과 실천의 언어로
그 시대의 '시대어'로 선포될 때 생생하게 살아 난다.
오늘 수도성직자들은 물론이고 신앙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속화와 다원화의 종교 문화 안에서
이 시대의 맞는 새로운 신앙 언어로 예수를 전해야 한다.
'교의'라는 내용을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그이들은 그때마다 하느님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이들에게 성경지식과 교리는 어떤 매력을 전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교회 공동체가 '내집'으로 따뜻함을 감지할 때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예수는 2000년 전의 죽은 인물이 아니다.
오늘 맑고 싱그롭게 살아 있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