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양식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세상
해피제제
2011. 9. 23. 07:57
1독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말씀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단상
몇해 전 정동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종교간의 대화,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세미나가 있었다.
목사님, 스님, 신부님, 신학 전문가, 교수 등 각 종교 분야의 패널들이 함께 했다.
역시나 수백명이 청중으로 참석한 성당 내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는 곳곳에서 신부, 수녀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천주교 측에서는 정양모 신부님이 주제를 발표했고
그분이 나누었던 학제간 연구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예수'가 아닌
이땅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간 예수'에 대한 수십년 학문적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이 되자
연 이어 쏟아지는 청중의 질문들은 이미 '학문'을 넘어선 '신앙'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살짝 염려가 되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가톨릭 신문 매체들과 인터넷에서는
정양모 신부님에 대한 날선 공방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발언은 마치 그분의 신앙고백(?)과도 같이 들려졌던
'예수는 인간이다' 라는 평생의 학자로서의 학문적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문적 결과 발표가 있기 전 서두에
자신이 몇대 째 가톨릭 문화 안에서 성장했고 또 그 문화를 존중하고 있으며
게다가 사제로서의 삶 안에서 신앙고백은 자연스레 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른 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이성과 감성' 안에서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는
수많은 세월 연구와 사료와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 예수'에서 보다는
'인간 예수'를 통해 얻어 낸 결과물이 당신에게는 더욱 예수님을 믿게 했으며
또한 이 불의해 보이는 세상,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 연약한 종교인들의 갈등들이
개인과 세상에서 하느님을 저기 하늘 나라에 거리를 두게 만들고
심지어 이 땅에서 하느님이 없는 것 마냥 살아가도록 모든 것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 처럼' 말이다.
해서 예수는 '그리스도교' 라는 종교 안에 갖혀 있지 않았고 그런 시스템도 몰랐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자신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오늘날'
심지어 코웃음치며 인간의 힘으로(과학과 기술과 돈과 능력 등) 못하는 게 없는
앞으로 더욱 더 하느님의 영역은 희박해 질 텐데 그래서 성당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등
소수의 종교인들만이 남게 될텐데 어느 한 종교의 죽어가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교 보다도 더 큰 하느님,
그리고 그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 땅의 세리, 창녀, 고아, 병자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또 시대의 부자나라, 자기들만의 권력자/ 위정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그런 하느님이 아닌' 이 땅의 하느님을 이야기 하는
철저히 인간이었던 예수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는 논지다.
그리고 그분의 주장은 성경의 '인간 예수'를 닮고 싶단 것,
당신 평생의 학문적 노력 그리고 하느님 체험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진실한 고백이다.
덧붙여 내가 그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이러한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직 덜 여문 수도자의 앎이지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솔직히 '인간 예수' 라는 지금까지의 체험적 응답을 이야기 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예수의 삶과 행동양식'을 닮고 싶고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분의 말씀을 살다간 '예수' 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고
신앙의 언어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믿음을 고백하지만
아직은 그 신비를 내 언어로 치열하게 살아낸 것이 아님을 더불어 고백한다.
그렇다고 풋내기 수도자가 '하느님을 인간'이라고 해다고 걸고 넘어질 일이 없을 테니
먼 훗날 다른 깨달음으로 마음으로부터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청해 본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단들 '나의 예수님'이 변할리가 있을까!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말씀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단상
몇해 전 정동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종교간의 대화,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세미나가 있었다.
목사님, 스님, 신부님, 신학 전문가, 교수 등 각 종교 분야의 패널들이 함께 했다.
역시나 수백명이 청중으로 참석한 성당 내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는 곳곳에서 신부, 수녀님들의 모습도 보였다.
천주교 측에서는 정양모 신부님이 주제를 발표했고
그분이 나누었던 학제간 연구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예수'가 아닌
이땅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간 예수'에 대한 수십년 학문적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 응답 시간이 되자
연 이어 쏟아지는 청중의 질문들은 이미 '학문'을 넘어선 '신앙'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살짝 염려가 되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가톨릭 신문 매체들과 인터넷에서는
정양모 신부님에 대한 날선 공방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논란이 되었던 발언은 마치 그분의 신앙고백(?)과도 같이 들려졌던
'예수는 인간이다' 라는 평생의 학자로서의 학문적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문적 결과 발표가 있기 전 서두에
자신이 몇대 째 가톨릭 문화 안에서 성장했고 또 그 문화를 존중하고 있으며
게다가 사제로서의 삶 안에서 신앙고백은 자연스레 교회의 신앙고백을 따른 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 '이성과 감성' 안에서의 학문적 연구에 있어서는
수많은 세월 연구와 사료와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 예수'에서 보다는
'인간 예수'를 통해 얻어 낸 결과물이 당신에게는 더욱 예수님을 믿게 했으며
또한 이 불의해 보이는 세상,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 연약한 종교인들의 갈등들이
개인과 세상에서 하느님을 저기 하늘 나라에 거리를 두게 만들고
심지어 이 땅에서 하느님이 없는 것 마냥 살아가도록 모든 것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 처럼' 말이다.
해서 예수는 '그리스도교' 라는 종교 안에 갖혀 있지 않았고 그런 시스템도 몰랐고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자신 자신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오늘날'
심지어 코웃음치며 인간의 힘으로(과학과 기술과 돈과 능력 등) 못하는 게 없는
앞으로 더욱 더 하느님의 영역은 희박해 질 텐데 그래서 성당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등
소수의 종교인들만이 남게 될텐데 어느 한 종교의 죽어가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교 보다도 더 큰 하느님,
그리고 그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 땅의 세리, 창녀, 고아, 병자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또 시대의 부자나라, 자기들만의 권력자/ 위정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그런 하느님이 아닌' 이 땅의 하느님을 이야기 하는
철저히 인간이었던 예수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는 논지다.
그리고 그분의 주장은 성경의 '인간 예수'를 닮고 싶단 것,
당신 평생의 학문적 노력 그리고 하느님 체험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진실한 고백이다.
덧붙여 내가 그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이러한 주장에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여직 덜 여문 수도자의 앎이지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솔직히 '인간 예수' 라는 지금까지의 체험적 응답을 이야기 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예수의 삶과 행동양식'을 닮고 싶고
'하느님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분의 말씀을 살다간 '예수' 가 있으니 다행이다 싶고
신앙의 언어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믿음을 고백하지만
아직은 그 신비를 내 언어로 치열하게 살아낸 것이 아님을 더불어 고백한다.
그렇다고 풋내기 수도자가 '하느님을 인간'이라고 해다고 걸고 넘어질 일이 없을 테니
먼 훗날 다른 깨달음으로 마음으로부터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청해 본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단들 '나의 예수님'이 변할리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