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하반기 수사모임 최시영 신부 나눔 정리
2011년 하반기 수사모임 최시영 신부 나눔 정리
; 예수회 양성을 중심으로
81년 2월 예수회에 입회 했으니 만으로 30년을 넘긴 수도생활이다. 수사모임에 참석한 연학 수사님들이 스물여덟이면 그 시절 예수회원 전체가 여름휴가를 떠나도 스물이 조금 넘었으니 지금의 170여명의 회원은 하느님의 은총을 단단히 입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수련원 2년을 보낸 후 첫 서원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다. 1)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가? 만약 잘 모르겠다면 2) 그분을 사랑하는가? 역시 여기에 대해서도 반사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3) 그분이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가?
당신 수련장이셨던 존 메이스 신부님 앞에서 솔직히 고백했다. 무언가 있기는 있는데 아직까지는 불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회에서 이 부족한 나를 받아 준다면 조금 더 살아보고 그 답을 찾아보겠노라고.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은 첫째와 셋째 질문에서만큼은 다소나마 ‘예’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과 역시나 첫째와 셋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1990년 서품을 앞두고 서품 준비 피정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수녀원 동산을 산책하는 데 그만 넝쿨이 엉크러진 숲풀로 길을 잘못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그 넝쿨을 헤치고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 참을 올라가다 보니 눈앞에 수풀에 묻혀 있던 커다란 청동 십자가와 마주서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와락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 ‘이 십자가 고상처럼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도 않고,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는다면 과연 내가 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혹여나 저 십자가처럼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에 서품을 코앞에 두고 십자가를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는 또 그렇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 그 두려움에서 비껴서 있었다.
그 후 다시금 진지하게 수도 삶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94년 필리핀에서의 3수련기를 보내면서이다. 그때의 피정에서는 ‘산상수훈’을 뿐따(Puncta)로 받아들었다.
27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도저히 이 말씀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런데 수도자입네 신부입네 과연 내가 이웃들 앞에 서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복음”은 기쁜 소식일 텐데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더 큰 난관에 부딪친 듯싶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걸었다. 서품 준비 피정 때 올라 왔던 두려움처럼 그때도 역시나 답을 구할 수 없는 마음 상태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으로 한 걸음 물러 서 있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는 그저 조용히 물러 서 있을 수밖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산상수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을 다시 읽었다. 3수련 피정 지도 신부님께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말씀 드리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나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나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내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겠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내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않겠다. 내가 남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 주겠다.
놀라운 일이다. 어제까지 읽었던 복음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읽힐 수 있는가? 이런 말을 인간의 생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예수가 하느님과 한 분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나보고 ‘그렇게 살라’는 초대로만 읽었다. 아니 지금껏 그렇게 들렸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나를’ 그렇게 대해 주시겠다고 한다. 아무 것도 ‘하라’고 강요 없이 그냥 ‘내가 너에게 그렇게 대해 주겠다’고 한다. ‘아! 내가 찾던 분이 이런 분이셨구나! 몸은 수도원 안에서 산다지만 13년을 이것도 모르고 살아왔구나.’ 성서 안에 말씀으로 살아 계시는 하느님, 그분의 현존은 ‘나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분에 고맙고 감사해서 또 그렇게 이틀을 울게 된다.
2003년 2월 무려 10년 동안의 수련원 삶을 마치고 안식년을 받았다. 양성소임을 끝내면서 2가지를 진지하게 체험하고 싶었다. 바로 1)가난과 2)복음이다. 오래전 수련원에서 주중 사도직으로 행했던 ‘영등포 시립병원’에서의 실습을 통해 병원 한켠에 그저 없는 물건처럼 방치되어 있던 행려자들에게서 엄청난 ‘두려움과 거부감 그리고 혐오감’ 체험은 2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같은 감정이다. 이것은 수도자로서, 아니다 사람으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죄스런 마음상태’다. 어찌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두렵고, 거북살스럽고 또 혐오스럽기까지’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감정들에 다시금 그 체험과 마주하고 싶었고 그래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뒤의 병원은 이름도 새롭게 ‘보라매병원’ 바뀌었고 또 시설 역시 말끔한 것이 현대식으로 잘 정비된 상태다. 그때의 체험은 깊게 새겨졌지만 이미 그 시절 끝이 난 것이다. 지금은 또 다르게 이 ‘거부감’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치열하게 찾고 싶었던 ‘복음’ 역시 요원한 일이다. 지금껏 내 사는 모습과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내 복음 사는 모습이 전폭적이지 않고 그저 ‘부분적’임에 고민스러운 날이 얼마나 많았는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살고 지금껏 그랬듯 또 비켜 서 있는 비겁한 모습에 수 없이 가슴을 치지 않았는가. 그런 차에 이번 안식년 기간을 통해 그이들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JRS(예수회난민봉사)에 의뢰하여 인도네시아 북수마트라 근처에까지 갔다가 발발한 내전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렇다면 ‘사막의 영성’을 알고 싶어 물리적인 ‘사막’으로 들어가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 않아 결국 이태리 쿠네오에 있는 ‘사막 영성’을 사는 수도원에서 40일 피정을 하기로 했다. 안드레아 가스팔디뇨 신부님의 세상을 향한 양성자들을 위한 초대의 글에서 ‘희석되거나 부분적인 가난을 살려면 이곳은 아닙니다. 이 삶은 당신의 전부를 원합니다.’라는 말에 이끌려 마음 한켠 환상을 지니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쿠네오에서 만난 수도자들은 복음을 철저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일하고 기도하고’의 반복된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 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고 두 번째다. 그렇지만 내가 꿈꾸었던 사막 체험은 커녕 내 지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피정 일정에서 기도하고, 밥 해 먹고, 산책하고, 사도직하고, 또 기도하는 평생 동안 연피정을 통해 30일 피정을 지도하면서 이미 몸에 배어있는 것들에 ‘밭일 하나’ 추가된 일정 안에서 나는 못내 못마땅한 것 투성이다. 기도하러 나앉은 곳에서 조차도 마음속에서는 ‘서울로 가 서울로’를 외치고 있다. 그렇게 보내기를 3주째, 역시나 궁시렁 궁시렁 ‘서울로 돌아가 서울로’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유다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집트로 돌아가 이집트로’...
세상에 3주 동안 머리를 싸매며 이곳에 남아 있을까와 서울로 돌아갈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사이 ‘광야 한 복판에서’ 단련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면적으로는 ‘가난과 복음의 삶’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싶었지만 그것 역시도 ‘목적’ 혹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내 안전, 내 영역’을 찾아 헤매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런 차에 피정 지도 신부님 역시도 ‘제발 단순한 마음과 단순한 정신을 가져라’고 주문한다. ‘가난과 복음’을 사는 삶이 분명 중요하지만 ‘왜 그렇게 살고자 하는데?’라는 질문에 나는 끊임없이 수도자로서의 ‘나’, 신부로서의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과 복음’의 삶을 사는 ‘내’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 하느님은 끊임없이 ‘나를 떠나라’는 초대를 하고 계셨다. 여전히 놓지 못하고 ‘나’를 붙잡고 가는 내게서 수도자로서, 신부로서의 삶에 가려진 그 깊은 곳의 ‘하느님을 위한’, ‘내 이웃을 향한’ 삶으로의 초대다. 내 안에는 1) 십자가 곁으로 가고 싶지 않은 두려움, 2)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 3) ‘가난과 복음’을 빙자한 ‘내 안전, 내 영역’을 추구하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서도 광야 40년을 떠돌아다니고, 수도회 혹은 수도자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서 있지만 여전히 비틀대고 있다. 두 눈 꼭 감고 ‘수도서원/복음’을 살면 그만이겠지만 또 그렇게 부침이 있는 것이다.
내가 왜 내 약함과 부족함을 수사님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 안의 ‘저항’을 만나야 한다. ‘저항’은 나를 크게 움직이게 하는 곳이다. 좌절·우울·혐오스러움 등의 감정이 큰 폭으로 출렁이는 장소, 두려움·공포·심장이 짜지는 고통·거부감 등 ‘저항’이 있는 곳에 내 ‘약함’이 있다. 바로 그 ‘약함’이 ‘자유’를 줄 수 있는 그날까지 내 ‘저항’이 있는 곳에 가 있어야 하고 또 그게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그곳은 참된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또 그곳은 나에게서 잊혀진 혹은 숨겨진 곳일 수 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아픈 곳을 굳이 건드리는가? 왜 ‘다섯이나 되는 남편’을 언급하면서 여인을 비참하게 만드는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반응들을 살펴보면 비로소 그녀의 ‘자유’를 알아듣게 된다. 그녀의 약함이 바로 그녀를 자유롭게 만드는 열쇠다. 그리고 그것은 감추고 숨기우고 싶을 아픔이지만 하느님에 의해 건들여졌을 때에는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된다.
다시 예수회 양성으로 되돌아 가보면 수련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습관’이 분명하다. 우리 삶에서 습관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기도를 통한 ‘영적 위로’는 분명한 하느님의 손길이다. 그것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 그렇지만 왜 또다시 우리는 예전의 삶의 모습으로 쉽게 되돌아 가는걸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습관’으로 자리 잡지 못해서일 것이다. ‘변화와 성장’을 하고 싶다면 ‘새로운 습관’을 몸에 새겨라. 수련원에 막 입회 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의 습관들을 버리고 수도자로서의 습관을 몸에 새긴다. 새벽을 밝히고 고요하게 기도의 자리에 나앉고, 미사를 드리고, 빵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 밭일을 하고 산책을 나서며 형제들과 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공동으로 성무일도를 노래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봉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매일, 한 달, 두 해 그리고 남은 생을 살겠다고 서원을 하면서 수도 삶을 시작했다. 습관은 습관으로서 밖에 바꿀 수 없다. 변화와 성장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입어라.
수사님들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가 이렇게 수도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힘은 나를 넘어서는 초월의 체험들 안에서 가능해 보인다. 세상이 주는 위로와 평화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 거기에 평화가 ‘있’되 지속적이지 않다. 나를 초월하는 삶을 선택했을 때에 느껴지는 위로와 평화, 그것을 이미 맛 본 삶에서 하느님을 떠나 살 수는 없다. 살되 사는 게 아니다. 복음을 선택 했을 때의 선물이 자기실현, 완성, 행복임은 그 답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최시영 신부님은 나눔을 전해 받으면서 그분에게서 ‘순례자’의 이미지를 엿보게 된다. 30년이 넘는 수도 삶을 통해 멈춤 없이 ‘나 자신’을 넘어 ‘하느님을 향한 발돋움’의 몸짓, ‘변화와 성장’에 목말라 하고 그 갈증을 ‘왜?’라는 질문을 통해 그분께 다가서기를 즐거워한다. 그리고 지금껏 살아온 수도 삶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습관’을 몸에 새긴다는 그분의 성실함, 게다가 후배들에게 ‘초월의 체험’을 살도록 부단히 이냐시오 성인의 순례길로 초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