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같게 또 '다르게' 본문
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2독서
형제 여러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말씀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르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단상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윤정숙씨가 예수회 실습수사 모임에 강사로 오셨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예수회 새얼 공동체에서 한 번, 이웃살이 사무실에서,
그리고 오늘 예수회 관구본부 회의실에서 일곱명 수사님들에게
'초짜 신자'의 시선으로 본 사제; 교회 안 사제들의 리더십에 관한 강의다.
참고로 그분은 2008년 세례를 받았다.
성모 마리아의 벗 엘리사벳이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윤정숙 이사는 우리나라에 '탁아, 보육, 여성' 이라는 말이 무색할 80년
목련이 피는 대학 내 평화로운 삶과 대학 밖 꿈틀대는 불합리에
'왜?'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봉촌동 공부방을 시작으로 '여성, 인권, 나눔' 운동에 30년을 투신해 온 삶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물음을 가지고 아름다운재단에서 '나눔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아름다운재단 나눔 10년 그 홍보 동영상을 보면서 몇 가지 눈에 띄는 키워드가 있다.
'사람, 관계, 변화, 진심'
아마도 아름다운재단이 걸어 온 한결 같은 10년의 가치들이리라.
'작은 것을 소중히', '민들레 홀씨 같은', '풀뿌리' ...
가만히 입술에 올려만 두어도 세상이 한결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몇 십년을 그렇게 꿈과 희망을 향해 앞만 보고 질주해온 삶이다.
넘어진 것은 셈할 수도 없고, 좌절하기는 밥 먹듯, 억울하기는...신만 아시리라.
그럼에도 꿈이 이끌어 주는 대로, '이 삶에 이게 다가 아닐거야' 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온 삶이다.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자신을 이끄는 '꿈'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가슴이 무너지는 체험으로 제발로 근처 성당에 찾아 들었단다.
그리고 매일 쏟아지는 은총에 펑 펑 눈물을 흘리기를 1년, 그렇게 성당엘 나가면서
그분은 또 그렇게 하느님이 처음 심어주신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초짜 신자의 눈으로 본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온다.
이럴 때가 제일 두렵고, 한편으론 호기심이 동하고, 또 한 편으론 마음이 설렌다.
이제부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이야기 해 보련다.
신자들이 '사제'를 바라볼 때 굉장한 '이중적 시선'을 갖는다.
윤정숙 이사는 이것을 '같고 또 "다르게"'라는 문구로 표현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그러나 또 같게....'
뭔 이런 해괴한 문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으면서 또 '다르게'라니....
그러나 그분 말씀에 따르면 성당 '형님들' 의견도 한결 같다 하신다.
몇 십년 신앙생활 해 오신 분들의 가르침이지만 윤정숙 이사 또한 다르지 않기에
이제 양성 중에 있는 수사님들에게 '같게 그러나 또 다르게' 살아 주시길 요청해 온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보적 인간으로서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적인 어떤 것'을 기대한다.
그것이 아픈 이, 마음 다친 이, 상처 받은 이, 희망을 잃어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삶이 다가 아니란다' 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주기를 기도한다.
그러하기에 '사제는 하늘이 내린다', '신자들이 사제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능해졌다.
위와 같은 요구를 대할 때면 그 담겨있는 '염원'을 알아 듣겠으면 서도
또 한 편으론 억울한 일이다.
정당해 보이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선택한 사람들 이기에 그분을 닮기 위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매일을 한결같이 깨어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신자들 앞에서 약속한 서원의 삶이다.
그러면서도 억울할 일은, 그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필요할 땐 응해주는
참으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원할 때의 경우다.
신자들과 모든 면에서 함께 있어 주면 좋겠다는 요구에
그러나 기도에는 마음을 담아, 강론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사제 답게(?)
약함 투성이인 나와는 달리, 큰 차는 안 되고, 골프는 어불성설,
저 자매와는 왜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거야 등 등
아주아주 '이상적 사제상'을 각기 다른 마음에 간직한 채
약하고 결점 많은 사제들에게 '하느님 처럼' 살라고
매일매일 신부님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친다.
주님 이 간절한 마음들을 어찌 해야 할는지요.
윤정숙 이사는 이러한 모습에 그래도 조금은 양심은 있는지
사제와 신자들 안에는 사제에 대한 두 가지 환상이 존재 한다며
완벽한 사제에 대한 환상과 완벽하려는 사제의 환상을 이야기 한다.
전자는 신자들이 사제에게 갖게 되는 환상이고 후자는 사제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환상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에
사제나 신자들 모두 '완벽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기를
그래야 보다 자유로울 수 있음을 당신 자신의 삶에 비추어 말한다.
'완벽은 불가능하다'
둘째 '솔직하기'를 바란다. 갑옷으로 무장한 사람 곁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잘 나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그러나 정내미 떨어지는 그이 곁에는 사람이 없다.
나사가 풀려 보이고, 흘리고 다니는 것도 있고, 그래서 힘 빠져 보이고 자유롭게 보이는
조금은 '결점 많아 보이는 이'라면 나도 그 곁에 함께 할 수 있겠단다.
사제는 '하느님'이 아니다.
셋째 '소통하기'를 부탁해 온다. 영어의 Understand는 under+stand의 조합이다.
'아래 서 있기' 다른 사람 아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로 예수님 발치 아래 있는 '마리아'의 귀 기울이는 모습이 그러해 보인다.
어른은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추한 노인네와 현명한 어른의 지표는 얼마나 나의 말을 줄이고,
남의 입장에 서서 같이 느낄 수 있는가가 아닐까
넷째 '영성'에 관한 빼어남이다.
그러나 그 빼어남이란 '영적지도'뿐 아니라 '영적동반자'로 즉 친구가 되어 달라는 요구다.
제주도 강정마을 문정현 신부님과 강우일 주교님의 현존은 시민활동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다.
강 주교님의 메시지에는 윤정숙 이사의 평범한(?) 눈에도 '하느님의 목소리'가 담겨있단다.
사제는 시민활동가의 세상을 향한 꿈이나 이상과는 달리
하느님의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대한 나눔을 전해 받으면서
신자들이 바라는 게 단순히 '하느님'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안다.
불의한 것이 많아 보이는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이 더 많다는 것을 전해 주기를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해 주기를 청한다.
그리고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로 매일 밥 '빌어먹으'면서 제 잘난 척 말기를 바란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는 지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신자들 수백명의 가슴에 피멍을 들인다.
그 때문에 연약함 투성이 교회와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과분하게 입는다.
그이들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 듣는다면 지금 부끄러워 잠들어 있지 못하리라.
그래서 이 아침 옷을 정갈하게 하고 고요함 앞에 나 앉아 있는 것은 그이들의 기도 덕분이다.
그이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사람, 나 답게 살아가기'
그러나 수도자의 옷을 입었으면 '수행자'로 세상에 한 꿈 더하기를 바람에 다름 아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2독서
형제 여러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말씀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르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단상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윤정숙씨가 예수회 실습수사 모임에 강사로 오셨다.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예수회 새얼 공동체에서 한 번, 이웃살이 사무실에서,
그리고 오늘 예수회 관구본부 회의실에서 일곱명 수사님들에게
'초짜 신자'의 시선으로 본 사제; 교회 안 사제들의 리더십에 관한 강의다.
참고로 그분은 2008년 세례를 받았다.
성모 마리아의 벗 엘리사벳이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윤정숙 이사는 우리나라에 '탁아, 보육, 여성' 이라는 말이 무색할 80년
목련이 피는 대학 내 평화로운 삶과 대학 밖 꿈틀대는 불합리에
'왜?'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에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그 답을 찾기 위해
봉촌동 공부방을 시작으로 '여성, 인권, 나눔' 운동에 30년을 투신해 온 삶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물음을 가지고 아름다운재단에서 '나눔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아름다운재단 나눔 10년 그 홍보 동영상을 보면서 몇 가지 눈에 띄는 키워드가 있다.
'사람, 관계, 변화, 진심'
아마도 아름다운재단이 걸어 온 한결 같은 10년의 가치들이리라.
'작은 것을 소중히', '민들레 홀씨 같은', '풀뿌리' ...
가만히 입술에 올려만 두어도 세상이 한결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몇 십년을 그렇게 꿈과 희망을 향해 앞만 보고 질주해온 삶이다.
넘어진 것은 셈할 수도 없고, 좌절하기는 밥 먹듯, 억울하기는...신만 아시리라.
그럼에도 꿈이 이끌어 주는 대로, '이 삶에 이게 다가 아닐거야' 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온 삶이다.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자신을 이끄는 '꿈'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가슴이 무너지는 체험으로 제발로 근처 성당에 찾아 들었단다.
그리고 매일 쏟아지는 은총에 펑 펑 눈물을 흘리기를 1년, 그렇게 성당엘 나가면서
그분은 또 그렇게 하느님이 처음 심어주신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초짜 신자의 눈으로 본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 온다.
이럴 때가 제일 두렵고, 한편으론 호기심이 동하고, 또 한 편으론 마음이 설렌다.
이제부터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이야기 해 보련다.
신자들이 '사제'를 바라볼 때 굉장한 '이중적 시선'을 갖는다.
윤정숙 이사는 이것을 '같고 또 "다르게"'라는 문구로 표현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그러나 또 같게....'
뭔 이런 해괴한 문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같으면서 또 '다르게'라니....
그러나 그분 말씀에 따르면 성당 '형님들' 의견도 한결 같다 하신다.
몇 십년 신앙생활 해 오신 분들의 가르침이지만 윤정숙 이사 또한 다르지 않기에
이제 양성 중에 있는 수사님들에게 '같게 그러나 또 다르게' 살아 주시길 요청해 온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보적 인간으로서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적인 어떤 것'을 기대한다.
그것이 아픈 이, 마음 다친 이, 상처 받은 이, 희망을 잃어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삶이 다가 아니란다' 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주기를 기도한다.
그러하기에 '사제는 하늘이 내린다', '신자들이 사제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말이 가능해졌다.
위와 같은 요구를 대할 때면 그 담겨있는 '염원'을 알아 듣겠으면 서도
또 한 편으론 억울한 일이다.
정당해 보이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선택한 사람들 이기에 그분을 닮기 위해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매일을 한결같이 깨어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신자들 앞에서 약속한 서원의 삶이다.
그러면서도 억울할 일은, 그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필요할 땐 응해주는
참으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원할 때의 경우다.
신자들과 모든 면에서 함께 있어 주면 좋겠다는 요구에
그러나 기도에는 마음을 담아, 강론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사제 답게(?)
약함 투성이인 나와는 달리, 큰 차는 안 되고, 골프는 어불성설,
저 자매와는 왜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거야 등 등
아주아주 '이상적 사제상'을 각기 다른 마음에 간직한 채
약하고 결점 많은 사제들에게 '하느님 처럼' 살라고
매일매일 신부님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친다.
주님 이 간절한 마음들을 어찌 해야 할는지요.
윤정숙 이사는 이러한 모습에 그래도 조금은 양심은 있는지
사제와 신자들 안에는 사제에 대한 두 가지 환상이 존재 한다며
완벽한 사제에 대한 환상과 완벽하려는 사제의 환상을 이야기 한다.
전자는 신자들이 사제에게 갖게 되는 환상이고 후자는 사제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환상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에
사제나 신자들 모두 '완벽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기를
그래야 보다 자유로울 수 있음을 당신 자신의 삶에 비추어 말한다.
'완벽은 불가능하다'
둘째 '솔직하기'를 바란다. 갑옷으로 무장한 사람 곁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잘 나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그러나 정내미 떨어지는 그이 곁에는 사람이 없다.
나사가 풀려 보이고, 흘리고 다니는 것도 있고, 그래서 힘 빠져 보이고 자유롭게 보이는
조금은 '결점 많아 보이는 이'라면 나도 그 곁에 함께 할 수 있겠단다.
사제는 '하느님'이 아니다.
셋째 '소통하기'를 부탁해 온다. 영어의 Understand는 under+stand의 조합이다.
'아래 서 있기' 다른 사람 아래서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바로 예수님 발치 아래 있는 '마리아'의 귀 기울이는 모습이 그러해 보인다.
어른은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했다.
추한 노인네와 현명한 어른의 지표는 얼마나 나의 말을 줄이고,
남의 입장에 서서 같이 느낄 수 있는가가 아닐까
넷째 '영성'에 관한 빼어남이다.
그러나 그 빼어남이란 '영적지도'뿐 아니라 '영적동반자'로 즉 친구가 되어 달라는 요구다.
제주도 강정마을 문정현 신부님과 강우일 주교님의 현존은 시민활동가들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다.
강 주교님의 메시지에는 윤정숙 이사의 평범한(?) 눈에도 '하느님의 목소리'가 담겨있단다.
사제는 시민활동가의 세상을 향한 꿈이나 이상과는 달리
하느님의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대한 나눔을 전해 받으면서
신자들이 바라는 게 단순히 '하느님'이 되라는 것이 아님을 안다.
불의한 것이 많아 보이는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이 더 많다는 것을 전해 주기를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해 주기를 청한다.
그리고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로 매일 밥 '빌어먹으'면서 제 잘난 척 말기를 바란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는 지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신자들 수백명의 가슴에 피멍을 들인다.
그 때문에 연약함 투성이 교회와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과분하게 입는다.
그이들의 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 듣는다면 지금 부끄러워 잠들어 있지 못하리라.
그래서 이 아침 옷을 정갈하게 하고 고요함 앞에 나 앉아 있는 것은 그이들의 기도 덕분이다.
그이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사람, 나 답게 살아가기'
그러나 수도자의 옷을 입었으면 '수행자'로 세상에 한 꿈 더하기를 바람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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