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개신교신자로 반쯤 넘어간 사연 본문
개신교신자로 반쯤 넘어간 사연
최근 동경대 한인 학생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열심인 개신교 신자인데 최근에 발생한 개인적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졌단다. 주위의 천주교 신자 친구들에게서는 좀처럼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했노라고... 무엇보다도 그이들과 '끝장토론'이라도 할라치면 어느 순간 "너는 왜 이렇게 따지자"는 반응이란다. 해서 언제가 딱 한 번 얼굴을 본 '수사'란 이상한 녀석을 기억해 냈...다가 이곳저곳 연락을 넣어 꼭 한 번 만나야겠다며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다.
물론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정말이지 열심히도 그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탐구해 왔다는 것이다. 다방면으로 신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었고, 그래서 누구와도 토론을 해도 해박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태세다. 그이의 열정적인 모습에 반한 나는, '그러게요. 맞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면서 벌써 반은 설득되어 개신교 신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이도 홀딱 넘어갈 판인데, 얌전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이의 앎에 누구도 토론 상대가 될 바가 못된다.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가며 어느새 나는 '천주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외에 같다 붙인 것이 너무 많고, 교회의 도그마는 너무 무거우며, 교황님은 왜 그렇게 잘못한 것이 많은지, 게다가 성모마리아님은 왜 하늘로 승천하셔서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까' 등 등 그이의 조목조목 따져 묻는 것들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쯤 넘어갔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니 여전히 그이는 처음과 같은 목소리 톤으로 지치지도 않은 듯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머리가 '머~엉'해지는 것이 이야기를 듣는 나는 그이 앞에 앉아 있는데, 어느새 정신은 하늘을 날고 있으니 너무 정신을 집중해도 유체이탈(?) 비슷한 것을 체험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하마터면 개신교신자가 되어버릴 뻔한 내게서 결국 그이는 시원스런 답을 얻어 간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 써져 있는 것이 '절대적'인데 그 외에 무엇도, 예를 들면 교황, 마리아, 이런저런 가톨릭 교리 등 등 천주교에서는 너무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 등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투다. 그리고 한 순간 외도를 했지만 여전히 천주교 수도자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그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지금 고요히 성당에 머물러 오늘 하루 받은 숙제를 꺼내들고 나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첫째, 당신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성경' 역시도 '하느님'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마태(90년), 마르코(70년), 루카(90년), 요한 복음(110년) 등 4대 복음서는 예수님 사후 100년이 다 되어서야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그리고 그 제자의 제자, 혹은 초기 갓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교회 공동체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네 복음서가 조금씩 다른 이유 역시 예수님의 직제자들이 자기가 체험한 범위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당신 신원에 대한 질문을 보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30) 라는 물음이 있다. 재미난 것은 제자들 입에서 흘러 나온 각각의 대답이다. 한 제자는 '세례자요한이요'라고 대답하고, 또 다른 제자는 '엘리야이십니다'하고, 또 다른 제자는 '당신은 여러 예언자들 중에 한 분' 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배 위에서 엄청난 고기를 잡던 그 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저는 죄인이오니 제게서 떠나가 주십시요' 청했던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제 각각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이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을 자신들의 언어로 신앙고백한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곳곳의 다른 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성경' 역시도 제자들이 자신들이 각자 체험했던 예수님을 기술한 것이라는 것. 열심인 학생이 이 말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보면 '하느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절대적'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성경도, 교회도, 교리까지도 말이다.
둘째, 종교는 그 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크리스마스'를 예를 들어, 예수님의 생일로 기리고 있는 12월25일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로마의 여러 신 중의 하나인 아폴로(태양)를 기리던 날이 기념일로 자리잡힌 것이다. 교황, 주교, 사제, 부제라는 위계제도 역시도 로마제국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그리스도교가 차용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던 분이 세상을 떠나고, 얼빵한(?) 제자들만이 남았을 때 그이들을 묶어 준 것은 예수라는 카리스마를 대신한 잘 짜여진 '교계제도', 즉 '시스템' 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로마의 통치구조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혹은 교회라는 제도가 역시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너무도 약한 인간이 그 교회 제도를 이루고,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실수도 하면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던 치뿌리아누스 교부(3세기)의 가르침이 오랜 기간 가톨릭 가르침을 대표해 왔고, 게다가'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여 이방인을 개종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4세기)의 가르침을 엄청나게 오해해서 받아들이기도 했다. 교회의 부패며 갈라짐 역시, 나약한 인간들이 이루고 있던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후 로마 바티칸 대성전에 앉아서 '교회가 답답하다'라며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 요한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를 시작으로 그동안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가톨릭은 철회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치뿌리아누스 성인의 '교회밖의 구원은 없다'를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로 '교회헌장 16항'에서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 구원을 행하시는 분은 하느님 그분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감히 '있다, 없다' 단죄할 수 없기에, 그동안의 교회 가르침을 철회하고 타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할머니가 열심인 불교 신자인데 그리고 너무도 착하게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그분이 구원을 못 받아 내가 믿는 하느님 나라에서 내 할머니를 뵐 수 없다면, 명동 한 가운데서 외쳐지고 있는 구호처럼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면, 그런 하느님이라면 나는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 이 또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교부들의 훌륭한 가르침도, 교회의 전통도 아니라는 것으로, 역시나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한 분 하느님 뿐이라는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 친구는 내 이러한 투의 대답에 '상대주의자'라고 힐난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점점 당혹스럽다는 표정의 친구를 보면서 내 머리를 이렇게 아프게 한 만큼(?) 자신도 조금씩 머리가 아파올 것임을 확신한다.
셋째, '상대주의'가 아니냐는 그이의 힐난에, 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확실히 고백한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신앙 전통과 문화 안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유다인들의 성경 '구약'도 그이들과 하느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 안에서의 그이들의 '신앙고백문'이고, 신약성경 역시도 그것이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씌여졌을지라도 받아 적은 이들은 실수투성이고 나약한 인간 제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전 교회도, 그 안에 교황님도, 지역 주교님도, 신부님까지도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2000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은 늘 실수를 되풀이 해 왔고, 그것은 감출래야 감출수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치열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교회는 삼위의 한 분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때그때마다 많은 성인들과 계시로, 심지어 '종교개혁'이라는 갈라져 나간 교회의 분열(?)까지도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갈라짐의 아픈 역사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더 치열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탐구하고 정화하고 때로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개신교 역시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뛰쳐나감을 정당화하고, 하느님께서 직접 한 인간 인간과 통교하신다는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이에게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를 부탁했다. 목사님(혹은 신부님)이 전해준 그분들이 겪고, 공부하고, 배우고, 체험한 예수님 말고, 이런저런 훌륭한 신학서에서 그 저자들의 지혜도 좋고, 지식도 좋지만 그런 간접적인 지식 말고, 교회제도 안에서 가르쳐주는 교리들에서 말고(과거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가장 안전한 그 지식들이 하느님을 아는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그래서 그것이 하느님과 교회를 아는 데 충분히 되었다면), 심지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던 '성경'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문자적인 모습도 말고, 그러면서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충분히 지표가 되어주는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의 '기록, 발자취'인 성경을 기초로, 또 교회가 2000년 간 치열하게 싸우면서 전통으로, 교회의 교리로 가르침으로 쌓아둔 것들에 토대를 두고, 그 안에서 나만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제는 내가 내 자신만이 체험한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부탁했다.
"당신은 저의 꿈, 제 삶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시는 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제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물론 이 '가슴 뛰는 고백문' 역시도 또 다른 앎과 체험과 세월이 더해진다면 지금과 다른 형태의 고백문이 될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분은 늘 당신을 알려 주시려 애쓰신다. 우리는 그저 고요히 귀를 기울일 뿐...
최근 동경대 한인 학생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열심인 개신교 신자인데 최근에 발생한 개인적 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어졌단다. 주위의 천주교 신자 친구들에게서는 좀처럼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했노라고... 무엇보다도 그이들과 '끝장토론'이라도 할라치면 어느 순간 "너는 왜 이렇게 따지자"는 반응이란다. 해서 언제가 딱 한 번 얼굴을 본 '수사'란 이상한 녀석을 기억해 냈...다가 이곳저곳 연락을 넣어 꼭 한 번 만나야겠다며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다.
물론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았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정말이지 열심히도 그이가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탐구해 왔다는 것이다. 다방면으로 신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읽었고, 그래서 누구와도 토론을 해도 해박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태세다. 그이의 열정적인 모습에 반한 나는, '그러게요. 맞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면서 벌써 반은 설득되어 개신교 신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이도 홀딱 넘어갈 판인데, 얌전한(?) 천주교 신자들은 그이의 앎에 누구도 토론 상대가 될 바가 못된다.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어가며 어느새 나는 '천주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외에 같다 붙인 것이 너무 많고, 교회의 도그마는 너무 무거우며, 교황님은 왜 그렇게 잘못한 것이 많은지, 게다가 성모마리아님은 왜 하늘로 승천하셔서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까' 등 등 그이의 조목조목 따져 묻는 것들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쯤 넘어갔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니 여전히 그이는 처음과 같은 목소리 톤으로 지치지도 않은 듯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머리가 '머~엉'해지는 것이 이야기를 듣는 나는 그이 앞에 앉아 있는데, 어느새 정신은 하늘을 날고 있으니 너무 정신을 집중해도 유체이탈(?) 비슷한 것을 체험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하마터면 개신교신자가 되어버릴 뻔한 내게서 결국 그이는 시원스런 답을 얻어 간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 써져 있는 것이 '절대적'인데 그 외에 무엇도, 예를 들면 교황, 마리아, 이런저런 가톨릭 교리 등 등 천주교에서는 너무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 등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투다. 그리고 한 순간 외도를 했지만 여전히 천주교 수도자로 살아가고 싶은 나는, 그이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지금 고요히 성당에 머물러 오늘 하루 받은 숙제를 꺼내들고 나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첫째, 당신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성경' 역시도 '하느님'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마태(90년), 마르코(70년), 루카(90년), 요한 복음(110년) 등 4대 복음서는 예수님 사후 100년이 다 되어서야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그리고 그 제자의 제자, 혹은 초기 갓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교회 공동체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네 복음서가 조금씩 다른 이유 역시 예수님의 직제자들이 자기가 체험한 범위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당신 신원에 대한 질문을 보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30) 라는 물음이 있다. 재미난 것은 제자들 입에서 흘러 나온 각각의 대답이다. 한 제자는 '세례자요한이요'라고 대답하고, 또 다른 제자는 '엘리야이십니다'하고, 또 다른 제자는 '당신은 여러 예언자들 중에 한 분' 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배 위에서 엄청난 고기를 잡던 그 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저는 죄인이오니 제게서 떠나가 주십시요' 청했던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제 각각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이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을 자신들의 언어로 신앙고백한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곳곳의 다른 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성경' 역시도 제자들이 자신들이 각자 체험했던 예수님을 기술한 것이라는 것. 열심인 학생이 이 말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보면 '하느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절대적'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성경도, 교회도, 교리까지도 말이다.
둘째, 종교는 그 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크리스마스'를 예를 들어, 예수님의 생일로 기리고 있는 12월25일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받아들여지면서 로마의 여러 신 중의 하나인 아폴로(태양)를 기리던 날이 기념일로 자리잡힌 것이다. 교황, 주교, 사제, 부제라는 위계제도 역시도 로마제국의 통치구조를 그대로 그리스도교가 차용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던 분이 세상을 떠나고, 얼빵한(?) 제자들만이 남았을 때 그이들을 묶어 준 것은 예수라는 카리스마를 대신한 잘 짜여진 '교계제도', 즉 '시스템' 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로마의 통치구조에서 따 온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혹은 교회라는 제도가 역시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너무도 약한 인간이 그 교회 제도를 이루고,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실수도 하면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던 치뿌리아누스 교부(3세기)의 가르침이 오랜 기간 가톨릭 가르침을 대표해 왔고, 게다가'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여 이방인을 개종하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4세기)의 가르침을 엄청나게 오해해서 받아들이기도 했다. 교회의 부패며 갈라짐 역시, 나약한 인간들이 이루고 있던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후 로마 바티칸 대성전에 앉아서 '교회가 답답하다'라며 공의회를 소집했던 교황 요한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를 시작으로 그동안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가톨릭은 철회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치뿌리아누스 성인의 '교회밖의 구원은 없다'를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로 '교회헌장 16항'에서는 교회 밖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그 구원을 행하시는 분은 하느님 그분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감히 '있다, 없다' 단죄할 수 없기에, 그동안의 교회 가르침을 철회하고 타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할머니가 열심인 불교 신자인데 그리고 너무도 착하게 평생을 살아오셨는데, 그분이 구원을 못 받아 내가 믿는 하느님 나라에서 내 할머니를 뵐 수 없다면, 명동 한 가운데서 외쳐지고 있는 구호처럼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면, 그런 하느님이라면 나는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 이 또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 교부들의 훌륭한 가르침도, 교회의 전통도 아니라는 것으로, 역시나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은 한 분 하느님 뿐이라는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 친구는 내 이러한 투의 대답에 '상대주의자'라고 힐난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점점 당혹스럽다는 표정의 친구를 보면서 내 머리를 이렇게 아프게 한 만큼(?) 자신도 조금씩 머리가 아파올 것임을 확신한다.
셋째, '상대주의'가 아니냐는 그이의 힐난에, 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확실히 고백한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신앙 전통과 문화 안에서 형성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유다인들의 성경 '구약'도 그이들과 하느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배경 안에서의 그이들의 '신앙고백문'이고, 신약성경 역시도 그것이 하느님의 영감에 의해 씌여졌을지라도 받아 적은 이들은 실수투성이고 나약한 인간 제자들이라는 것, 그리고 가톨릭이라는 전 교회도, 그 안에 교황님도, 지역 주교님도, 신부님까지도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도 2000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은 늘 실수를 되풀이 해 왔고, 그것은 감출래야 감출수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치열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교회는 삼위의 한 분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때그때마다 많은 성인들과 계시로, 심지어 '종교개혁'이라는 갈라져 나간 교회의 분열(?)까지도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갈라짐의 아픈 역사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더 치열하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탐구하고 정화하고 때로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개신교 역시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뛰쳐나감을 정당화하고, 하느님께서 직접 한 인간 인간과 통교하신다는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이에게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를 부탁했다. 목사님(혹은 신부님)이 전해준 그분들이 겪고, 공부하고, 배우고, 체험한 예수님 말고, 이런저런 훌륭한 신학서에서 그 저자들의 지혜도 좋고, 지식도 좋지만 그런 간접적인 지식 말고, 교회제도 안에서 가르쳐주는 교리들에서 말고(과거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가장 안전한 그 지식들이 하느님을 아는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그래서 그것이 하느님과 교회를 아는 데 충분히 되었다면), 심지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던 '성경'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문자적인 모습도 말고, 그러면서도 삶을 살아가는 데에 충분히 지표가 되어주는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의 '기록, 발자취'인 성경을 기초로, 또 교회가 2000년 간 치열하게 싸우면서 전통으로, 교회의 교리로 가르침으로 쌓아둔 것들에 토대를 두고, 그 안에서 나만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이제는 내가 내 자신만이 체험한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부탁했다.
"당신은 저의 꿈, 제 삶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시는 분,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제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물론 이 '가슴 뛰는 고백문' 역시도 또 다른 앎과 체험과 세월이 더해진다면 지금과 다른 형태의 고백문이 될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분은 늘 당신을 알려 주시려 애쓰신다. 우리는 그저 고요히 귀를 기울일 뿐...
# 작년 가을 무렵의 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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