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진짜로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행동양식' 맞아?" 본문
1독서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2독서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복음말씀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단상
어느 경제학자가 그랬다. 이 사회는 20:80의 사회라고,
20%의 사람이 80%의 사람을 먹여 살린다고...
철저히 경제, 재화적 측면에서 사람을 숫자와 퍼센티지로 단순화한 계산이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사회는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듯하다.
그 기준을 수도회를 끌여다 놓고 이리저리 적용해 보면 역시나 그래 보인다.
김포에는 2일과 7일 5일장이 들어선다.
오랜만에 공동체 저녁 외식이나 할 겸 장터로 마실을 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장터로 앞장을 서서 길 안내를 해 가는데
신부님과 동기 수사님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로 길 안내를 했나 보다.
그러더니 '왜 그 길로 가는데?'라고 묻는 신부님께
'이 길이 장터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인데요' 한다.
내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은 '그럼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친다.
이유인 즉슨,
그이들이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가장 짧은 길, 가장 효율적인 방법, 가장 최선의 길을 선택한단다.
처음 다녀보는 장터 가는 길에 이런 길이 있었냐며 '이건 또 어떻게 알게 됐냐'며 감탄을 한다.
이곳 저곳 다녀보고 그 중에서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결과이니 묻지 않아도 답은 뻔하다.
그이들 말 마디처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그래서 최고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판단 기준'
그것이 바로 내가 길과 사물과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다.
의식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몸에 배였는지 그냥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할 정도의 경지다.
이런 것을 두고 다들 감탄(?)을 해 대는 것이다.
그랬다. 가끔 나를 알고 있는 어른 신부님들은 내 이런 결정 방식에
반쯤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곤 하셨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시선, 예수님의 행동양식'이 내 기준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하는 스킬들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깊게 배인 덕분에
쉽사리 변하지 않은 판단 기준들에 걱정과 우려를 표시하시곤 하셨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런 내 모습에 가끔은 우울할 때가 있다.
늘 달고 다니는 말은 '하느님의 시선,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닮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일을 판단하고 사물을 결정해야 할 때는 늘 예전의 그것들이 내 판단기준이다.
막상 판단을 내릴 때는 인식하지 못했다가 한 발 떨어져 바라볼 기회가 생기면
또 다시 가슴을 치는 내 모습이 선하다.
동시에 오늘 같은 복음말씀을 듣노라면 여전히 불편함이 올라온다.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 일꾼과
저녁무렵 서늘한 때에 겨우 1시간만 일한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씩 같은 임금을 지급한다.
포도원 주인의 입장에서는 공정한 것이 분명하다.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 계약을 했으니 그대로 지급해 주면 그만, 무엇이 문제일까!
그러나 같은 임금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입이 한 댓발은 나올 일꾼도 분명 사실이다.
공정 경쟁 사회에서 상도덕을 무시한 포도원 주인의 이러한 행태는
부지런한 일꾼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을 것이고 다음날부터는 아무도 새벽 이슬을 맞으며
이른 시간에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영리해진 일꾼들은 늦은 시간 어슬렁 거리다가 포도원 주인의 하애와 같은 은혜를 입고자
하나 둘 포도원 주변으로 모여들 것이다.
당장은 가엾은 마음에 늦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한 일꾼들에게 똑같이 임금을 주었지만
분명히 하루 벌어 먹는 일용직 일꾼들 사이에서와 그 인력시장에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역시나 가엾은 마음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무턱대고 가엾은 마음에 혹은 내 재산 가지고 내가 한다는데 누가 뭐랄까 라며 행동하게 되면
잘 짜여진 시장 구조를 흔들어 대게 될 것이고 당장은 일꾼들에게 회자될 테지만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는 외면을, 그리고 포도밖 주변에는 포두원 주인의 호의만을 입고자 하는
일꾼들로 가득할 것이다.
머 오늘 복음말씀이 이것을 의도한 것이 아님은 알지만
나와 같은 뇌 구조를 가진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와 같은 계산적인 이들에게 '불편함'을 불러 일으켜
내 시선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의도라면 그 안에서 건져지는 이 불편함의 어떤 것들은
또 다른 예수님의 선물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늘 '하느님 뜻,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떠벌리고 다니는 나에게
'진짜로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행동양식에 따라 살고는 있냐?'고 묻고 있다면
돌이켜 보건대 금세 탄로나는 대답이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안 하고 있지 않은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2독서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복음말씀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단상
어느 경제학자가 그랬다. 이 사회는 20:80의 사회라고,
20%의 사람이 80%의 사람을 먹여 살린다고...
철저히 경제, 재화적 측면에서 사람을 숫자와 퍼센티지로 단순화한 계산이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사회는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듯하다.
그 기준을 수도회를 끌여다 놓고 이리저리 적용해 보면 역시나 그래 보인다.
김포에는 2일과 7일 5일장이 들어선다.
오랜만에 공동체 저녁 외식이나 할 겸 장터로 마실을 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장터로 앞장을 서서 길 안내를 해 가는데
신부님과 동기 수사님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로 길 안내를 했나 보다.
그러더니 '왜 그 길로 가는데?'라고 묻는 신부님께
'이 길이 장터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인데요' 한다.
내 뒤를 따르던 두 사람은 '그럼 그렇지!' 하고 맞장구를 친다.
이유인 즉슨,
그이들이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가장 짧은 길, 가장 효율적인 방법, 가장 최선의 길을 선택한단다.
처음 다녀보는 장터 가는 길에 이런 길이 있었냐며 '이건 또 어떻게 알게 됐냐'며 감탄을 한다.
이곳 저곳 다녀보고 그 중에서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결과이니 묻지 않아도 답은 뻔하다.
그이들 말 마디처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그래서 최고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판단 기준'
그것이 바로 내가 길과 사물과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다.
의식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몸에 배였는지 그냥 자연스럽게 몸이 반응할 정도의 경지다.
이런 것을 두고 다들 감탄(?)을 해 대는 것이다.
그랬다. 가끔 나를 알고 있는 어른 신부님들은 내 이런 결정 방식에
반쯤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곤 하셨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시선, 예수님의 행동양식'이 내 기준이 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하는 스킬들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깊게 배인 덕분에
쉽사리 변하지 않은 판단 기준들에 걱정과 우려를 표시하시곤 하셨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런 내 모습에 가끔은 우울할 때가 있다.
늘 달고 다니는 말은 '하느님의 시선,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닮고 싶다'고 하면서도
정작 일을 판단하고 사물을 결정해야 할 때는 늘 예전의 그것들이 내 판단기준이다.
막상 판단을 내릴 때는 인식하지 못했다가 한 발 떨어져 바라볼 기회가 생기면
또 다시 가슴을 치는 내 모습이 선하다.
동시에 오늘 같은 복음말씀을 듣노라면 여전히 불편함이 올라온다.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한 일꾼과
저녁무렵 서늘한 때에 겨우 1시간만 일한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씩 같은 임금을 지급한다.
포도원 주인의 입장에서는 공정한 것이 분명하다.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 계약을 했으니 그대로 지급해 주면 그만, 무엇이 문제일까!
그러나 같은 임금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입이 한 댓발은 나올 일꾼도 분명 사실이다.
공정 경쟁 사회에서 상도덕을 무시한 포도원 주인의 이러한 행태는
부지런한 일꾼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을 것이고 다음날부터는 아무도 새벽 이슬을 맞으며
이른 시간에 나와 있지 않을 것이다.
영리해진 일꾼들은 늦은 시간 어슬렁 거리다가 포도원 주인의 하애와 같은 은혜를 입고자
하나 둘 포도원 주변으로 모여들 것이다.
당장은 가엾은 마음에 늦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한 일꾼들에게 똑같이 임금을 주었지만
분명히 하루 벌어 먹는 일용직 일꾼들 사이에서와 그 인력시장에는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역시나 가엾은 마음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무턱대고 가엾은 마음에 혹은 내 재산 가지고 내가 한다는데 누가 뭐랄까 라며 행동하게 되면
잘 짜여진 시장 구조를 흔들어 대게 될 것이고 당장은 일꾼들에게 회자될 테지만
부지런한 일꾼들에게는 외면을, 그리고 포도밖 주변에는 포두원 주인의 호의만을 입고자 하는
일꾼들로 가득할 것이다.
머 오늘 복음말씀이 이것을 의도한 것이 아님은 알지만
나와 같은 뇌 구조를 가진 그리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와 같은 계산적인 이들에게 '불편함'을 불러 일으켜
내 시선을 돌아보게 하고 다른 것을 볼 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의도라면 그 안에서 건져지는 이 불편함의 어떤 것들은
또 다른 예수님의 선물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늘 '하느님 뜻,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떠벌리고 다니는 나에게
'진짜로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행동양식에 따라 살고는 있냐?'고 묻고 있다면
돌이켜 보건대 금세 탄로나는 대답이다.
많은 부분에서 그렇게 안 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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