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순명의 기준 본문

매일의 양식

순명의 기준

해피제제 2012. 2. 26. 08:57

1독서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2독서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복음말씀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단상

신부님, 장상의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명령에 어떻게 순명할 수 있습니까?
빤히 보이는 잘못된 판단에 그저 하느님의 뜻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따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
장상의 명령하느님 뜻을 현명하게 밝힐 수 있는 
명확한
순명 기준좀 가르쳐 주십시오.”
.
일 년에 한 번씩 관구장 신부님과의 양심현현 면담에서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의 각각의 서원들에 여전히 비틀대며 살면서
그 중에서도
중간실습기를 보내면서 가장 큰 실패 체험을 꼽으라면
단연
순명 서원이었다는 생각에 경험이 많으신 관구장 신부님께 지혜를 청했다.
.
사도직 장상이 일을 추진하면서 비합리적인 일처리 방식이나 비효율적인 면
그리고 인간적인 미성숙함이 드러날 때 마다
나름대로
나만의일처리 방식이 몸에 배인 터에
함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사사건건 조용할 날이 없었다
.
오죽하면 사도직 장상 신부님께서는
수사님이 대화하자고 청할 때면 덜컥 겁이 다 납니다.” 라고
앓는 소리를 하셨을까
.
.
아무튼 내 이런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시던 관구장 신부님께서는
명확한
(?) 기준에 대한 한 말씀 들려주신다.
.
합리적인 것이나 효율성은 예수회의 순명의 기준이 아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
만약 그것이 이라면 당연히 순명할 이유가 없다
.
그러나 그것이 이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순명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렇다. 합리성, 효율성, 생산성 그리고 인간적인 성숙함도
순명 여부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세상의 기준이고, 내 경험적인 기준이다.
세상은 이런저런 성과와 성취를 내면서
이것을 인간 삶의 합리적 조건으로 삼는다
.
이 기준에 맞춘다면 경험적인 지식 안에서
그래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인가?
.
또한 내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로
나만의 기준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그렇게 해 보니, 내가 그렇게 체험했으니,
내가 그렇게 살아 보니 내 방식이 합리적여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머리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제 각각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기준들이 다른 것이다
.
그러니 이 믿지 못할 내 자신의 기준들을
어떻게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
당연히 말이 안 된다.
.
관구장 신부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순명의 기준은 그것이 양심에 비추어 이 아니라면
비합리적
, 비효율적, 비생산적 그리고 인간적인 미성숙함이 드러나더라도
순명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직 미성숙함이 철 철 넘치는 나는,
미숙함을 줄 줄 흘리고 다니는 나는,
내 의지를 꺾고서 저 미성숙해 보이는 이에게 나를 완전히 넘겨 줄 수가 없다.
나를 이리저리 휘둘러 대도록 맡겨두고 싶지 않다.
.
내가 좌충우돌 사도직장에서 장상과 삐걱댔던 데에는 이런 이유가 대부분이다.
자존심 강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똘똘 뭉쳐 있던 내 자신감이
하느님의 뜻도 가리고 장상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채 저 잘난 줄 알고 설쳐 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럼에도 묵묵히 들어 준 그분이 새삼 고맙고,
별 말 없이 참아 준 것 같아 그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꼭 너 같은 후배 만나 봐야그 맘을 알게 될 거라는
동기 수사님의 말처럼 언젠가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낼 것이다
.
.
분명한 순명의 기준인 은 아무리 떨어지는 장상이라도 감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잠든 척 하는 사람잠든 사람을 구별하기는 쉽다.
비록 내 떨어지는 눈으로는 그 둘을 구분할 수는 없을지라도,
잠들지 않은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 뜻하느님의 뜻이라는 옷을 입고 주위 사람들을 휘둘러 댄다는 것은
각자의 양심이 가장 잘 알고 있을테다
.
그렇다면 성질 좀 죽이고 그 양심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아직 그만큼의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면 몸에 새기는 작업을 매일같이 수행할 일이다.
더불어 무던히도 청해야 할 터이다.
그래 보인다.




'매일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어머니에 그 딸  (4) 2012.02.28
예수회가 망(?)하게 해 주소서.  (2) 2012.02.27
재수없는 저라서 감사...  (1) 2012.02.24
'생기'를 불어 넣어 주던 사람들  (1) 2012.02.23
무한한 신뢰와 사랑  (5) 201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