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순명의 기준 본문
1독서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둘 것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2독서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단상
“신부님, 장상의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명령에 어떻게 순명할 수 있습니까?
빤히 보이는 잘못된 판단에 그저 ‘하느님의 뜻’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따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장상의 명령’과 ‘하느님 뜻’을 현명하게 밝힐 수 있는
명확한 ‘순명 기준’ 좀 가르쳐 주십시오.”
.
일 년에 한 번씩 관구장 신부님과의 양심현현 면담에서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의 각각의 서원들에 여전히 비틀대며 살면서
그 중에서도 ‘중간실습기’를 보내면서 가장 큰 실패 체험을 꼽으라면
단연 ‘순명 서원’이었다는 생각에 경험이 많으신 관구장 신부님께 지혜를 청했다.
.
사도직 장상이 일을 추진하면서 비합리적인 일처리 방식이나 비효율적인 면
그리고 인간적인 미성숙함이 드러날 때 마다
나름대로 ‘나만의’ 일처리 방식이 몸에 배인 터에
함께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사사건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오죽하면 사도직 장상 신부님께서는
“수사님이 ‘대화하자’고 청할 때면 덜컥 겁이 다 납니다.” 라고
앓는 소리를 하셨을까.
.
아무튼 내 이런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시던 관구장 신부님께서는
명확한(?) 기준에 대한 한 말씀 들려주신다.
.
“합리적인 것이나 효율성은 예수회의 순명의 기준이 아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만약 그것이 ‘악’이라면 당연히 순명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악’이 아니라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순명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다.
그렇다. 합리성, 효율성, 생산성 그리고 인간적인 성숙함도
‘순명 여부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세상의 기준이고, 내 경험적인 기준이다.
세상은 이런저런 성과와 성취를 내면서
이것을 인간 삶의 합리적 조건으로 삼는다.
이 기준에 맞춘다면 경험적인 지식 안에서
그래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인가?
.
또한 내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정말로 ‘나만의 기준’ 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그렇게 해 보니, 내가 그렇게 체험했으니,
내가 그렇게 살아 보니 ‘내 방식’이 합리적여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머리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제 각각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기준들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믿지 못할 내 자신의 기준들을
어떻게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
관구장 신부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순명의 기준’은 그것이 ‘양심’에 비추어 ‘악’이 아니라면
비합리적, 비효율적, 비생산적 그리고 인간적인 미성숙함이 드러나더라도
‘순명’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가장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직 미성숙함이 철 철 넘치는 나는,
미숙함을 줄 줄 흘리고 다니는 나는,
내 의지를 꺾고서 저 미성숙해 보이는 이에게 나를 완전히 넘겨 줄 수가 없다.
나를 이리저리 휘둘러 대도록 맡겨두고 싶지 않다.
.
내가 좌충우돌 사도직장에서 장상과 삐걱댔던 데에는 이런 이유가 대부분이다.
자존심 강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똘똘 뭉쳐 있던 내 자신감이
‘하느님의 뜻’도 가리고 ‘장상의 뜻’도 헤아리지 못한 채 저 잘난 줄 알고 설쳐 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럼에도 묵묵히 들어 준 그분이 새삼 고맙고,
별 말 없이 참아 준 것 같아 그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꼭 너 같은 후배 만나 봐야’ 그 맘을 알게 될 거라는
동기 수사님의 말처럼 언젠가는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낼 것이다.
.
분명한 순명의 기준인 ‘악’은 아무리 떨어지는 장상이라도 감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잠든 척 하는 사람’과 ‘잠든 사람’을 구별하기는 쉽다.
비록 내 떨어지는 눈으로는 그 둘을 구분할 수는 없을지라도,
‘잠들지 않은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 뜻’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옷을 입고 주위 사람들을 휘둘러 댄다는 것은
각자의 양심이 가장 잘 알고 있을테다.
그렇다면 성질 좀 죽이고 그 ‘양심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아직 그만큼의 내공이 쌓이지 않았다면 몸에 새기는 작업을 매일같이 수행할 일이다.
더불어 무던히도 청해야 할 터이다.
그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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