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그 어머니에 그 딸 본문
1독서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복음말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단상
꼬장꼬장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 다르게 편안함이 묻어 있다.
세수 95세, 평생을 한 집안을 지탱해 오신 분이라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꾸려오시느라
몸가짐 하나하나에 삶의 치열함이 배어 있다.
그런 덕분에 언제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 난다.
그러지 않아도 될 때에도
‘편암함’이나 ‘부드러움’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평생을 그리 살아 오셨기에
가족들 모두도 당연하게 여긴다. ‘
.
지금 병원이란다.
며칠 전 집안 거실에서 넘어지면서 여기저기 뼈가 부러져서 온통 기브스를 하고 계시단다.
급하게 방학 중인 서울 고모도 내려가시고 누님도 곁을 지키나 보다.
혼자 지내시면서 아침나절에 그런 일을 당하시고
저녁이 되어서야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셨단다.
누님도 전화를 받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다가 오후에서나 찾아뵈었더니
그렇게 끙끙 거리시며 누워 계시더란다.
다들 큰일 날 뻔 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오히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편안하게 들린다.
아마도 가족들의 돌봄을 받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틀림없이 그럴게다. 평소에는 남의(?) 돌봄을 끔찍이도 싫어하시다가;
사실 서울 고모든 전주 고모든 혼자 지내시는 게 딱해 보여 며칠 머물러 가시라 해도
남의 집이라 불편하다며 기어코 당신 집으로 내빼신다.
평생을 남의 눈치 안 보며 살아오신 터에
당신 집 놔두고 남의 집에서 손님처럼 지내시는 것을 좀처럼 견뎌내지 못한다.
어쩌겠는가 평생을 그리 살아 오셨는데....
.
어찌되었든 전화기 너머의 할머니 목소리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가득하니
또 저절로 애기 대하듯이 손자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이참에 앞 동의 큰 고모댁으로 들어가라는 둥,
큰일날 뻔 했다며
손자 신부님 되는 거 보고 하늘나라로 이사를 떠나셔도 떠나셔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할머니 연세가 곧 100살이라며 맨날 청춘이 아니셔서
이제는 남의 돌봄도 좀 받으면서 사시라는 둥,
그렇게 아픈 사람을 붙잡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 나니
그래도 전화기를 끊지 않고 그 이야기를 다 들어 주시는 것으로 보아
마음이 편안하기는 편한가 보다.
.
고모님은 할머니께서 이번에 퇴원하시면 요양할 수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실 계획인가 보다.
할머니 역시 평생을 혼자 지내셨던 터라 남의 손 탈 분이 아니시고,
그렇다고 혼자 지내게 할 수는 없으니
요양소에서 당신 집처럼 거처하시게 하시면서
가까이에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알아보겠단다.
그래야 가족들도 안심할 수 있고,
할머니도 낮 동안은 혼자 지내시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
고모님은 또 얼마나 놀랐는지 이런저런 계획들을 자세히도 전해 주신다.
마음고생이 무척 크셨던 듯싶다.
동시에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여 이번 일로 괜히 당신 탓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
겉보기에는 강한 체 하시며 늘 모녀가 티격태격이지만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내 보기에는 서로 닮은꼴이 더 많아
자존심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신지라
(헐~ 이러다 내가 제 명에 살 수 있을지...이왕 나간 김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듯싶고,
두 모녀가 병원 침상에서 ‘요양소’라는 말만 꺼내도
“내가 내 집 놔두고 그리고 자식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런 데를 왜 가냐”며
벌써부터 옥신각신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지만
할머니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받아 들이셨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돌봄을 입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인정하셨으면 한다.
.
할머니와 고모님의 ‘작은 전쟁’이 잘 끝날 수 있기를,
그리고 언능 일어나셔서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신부? 독신이 뭐가 좋냐, 내 눈에는 궁상스러워서 못 봐주겄고만...” 하시며
한 바탕 잔소리를 쏟아 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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