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신앙언어 본문
글쓴이, 서공석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대를 사는 지성인,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무슨 말로 하느님, 신앙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역사가 그 시대 문화의 옷을 입듯
신앙언어도 그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몇 가지 사례로 제시한다.
이 책은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조현철 신부님이
2012년 신학 공부로 떠나는 후배 예수회원들에게 선물로 주신 책이다.
감사인사차 전화 드렸더니 '특별히' 챙겨 주는 것이라며 '잘 다녀 오라' 말한다.
그 마음들이 고마워서 피정 내내 곱씹어 가며 읽어 본다.
모든 일을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자유롭게 사는 현대인입니다. 그들에게 믿으라고 말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믿을 만한 것이면, 그들이 선택하여 믿습니다.
- 섬김에는 그리스도 신앙언어를 오늘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쁜 소식’이 되게 하는 노력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1장 신앙언어
-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해석되어 표현되었다는 것은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비롯되어 신학의 격언이 된 말, 곧 “인간은 무엇이든 수용할 때 자기 방식대로 수용한다.”
- 현대인은 하나의 언어가 수용할 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할 때 그것을 수용한다.
- 신학은 전승된 신앙언어와 그 시대 인간 ‘인식의 망’이 서로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사명을 지닌 학문이다. … 신학은 그 시대가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신앙언어를 구원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는 창조적 학문이다.
- 그 ‘인식의 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 신뢰, 타인을 위한 투신, 선을 행하고 악을 거슬러 싸워야 하는 마음 등이다.
2장 신앙언어의 위기
- 한 시대의 교리언어 자체가 초월성이나 절대성을 지닌 것같이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 “신자는 순종하고 돈 내고 기도만 하기 위해(only to obey, to pay, and to pray) 있다.”라고. 이런 공동체는 오늘의 사회에서 실효성이 없어지고 그 구성원들의 수준도 저하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창의력을 지닌 인간의 집단이 아니라, 행렬하는 오리들의 집단과 같다. 지각 있는 현대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창의력과 자발성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이유다.
- 개인 고백 없는 공동 참회 전례와 같은 것을 만들어 실천해야 한다.
- 세상을 외면하면 할수록 하느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없는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3장 현대 사회와 신앙
- 현대 사회는 종교들의 제도적 측면은 비판하지만, 인간 실존의 종교적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콕스는 오히려 현대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 현대 세계에서 종교의 교의와 제도가 외면당한다면, 그것을 포장한 시대적 언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인류는 환경, 생명, 인종차별, 빈부 격차, 인권 등의 문제가 과학과 기술로써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종교적 결단은 개인적인 것이며, 인간이 이미 한 다른 체험들을 가지고 하는 반성적 응답이다. … 현대인은 자기의 체험들을 생각할 때, 어떤 특정 종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쉽게 종교적으로 해석한다.
- 현대인은 공백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념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마음이다. 소비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에 든다는 원칙이다. 현대인은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산다. … 현대인에게는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하는 것이 없다.
- 보편화는 획일성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다. 다원성 안에서 구현되는 보편성이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전달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 개인의 체험이나 개별 문화의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 언어는 오늘날 의사전달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 신앙의 언어가 유효하고,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대화하는 자세를 지닌 언어라야 한다는 말이다. 대화하는 사람은 상대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 무신론자들은 신의 죽음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로 제기하고 비판한 것은 그리스도교 문화권 안에 있어온 유아기적 신앙 현상과 대중의 기복적이고, 가상적인 신앙 현상이었다.
-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 긍정하고 팽창시키지 않았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공동체라면, 전혀 다른 자세가 요구된다.
- 신학은 수없이 많은 구체적 인간 고통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 신학의 모든 주제들은 실천적 언어와 더불어 설명되어야 한다.
4장 신학의 다원성
- 신학은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보편 신학은 있을 수 없고 신학은 다른 교파의 신학들과도 교류한다.
- 다원 현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은 그 실천이나 고백에서 항상 다양성을 나타내었다.
- ‘믿어야 한다.’ ‘지켜야 한다.’ ‘바쳐야 한다’라는 신앙언어는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믿을만 해야 믿고 스스로 실천할 동기가 있으면 관대하게 실천한다. 각자 자기 스스로 실천 동기를 부여하는 신앙언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5장 교의언어의 해석학적 성격
- 교의신학은 계시된 진리도 그것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해석하는 주체인 인간의 역사성도 진지하게 고려한다.
- 해석학적 신학은 과거와 같이 가톨릭 신앙의 불변하는 교의가 성서, 교부들의 저서, 신학 전통과 조화를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해석학적 신학은 현재를 위해 하느님 말씀의 의미를 나타내려 한다.
- 전통과 생성은 상반되지 않는다.
- 예수는 한 인간이고, 역사적으로 모호함을 지닌 인간이며, 우리의 해석에 열려 있는 존재다. 그런 존재를 필연적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역사 안에 있었던 공의회들의 그리스도론적 교의언어에도 필연성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언어다.
- 예수가 직접 한 말씀이나 행위라고 우리가 추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를 그 시대 교회 공동체로 인도한다. 예수가 실제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 지속되는 요인은 그리스도 신앙의 운동 혹은 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에서 비롯된 체험의 단일성이다. … 체험의 단일성이라는 말은 공동체가 함께 체험한 것을 말한다.
- 예수의 생애 안에서 두 가지 면을 보아야 한다. 첫째로, 그 생애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역사적 상황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 생애는 현세적 삶의 근본적 선택을 위해서 또 하느님과의 종말론적 관계를 위해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나자렛 예수로 말미암아 깨달은 우리 삶의 의미는 단 한 번의 발견으로 끝나지 않는다.
- 우리가 중시해야 하는 것은 예수가 현재 신앙인들 안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안에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신앙이 동의하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야 한다.
- 신약성서의 권위는 상대성을 지닌다.
- 살아 있는 나자렛 예수의 유일한 흔적이 초기 신앙 공동체 안에 있었기에, 교회가 신앙 이해를 위한 규범이라고 말하는 가톨릭교회의 해석이 옳다면, 성서 증언의 규범적 성격을 절대시하는 개신교의 원리도 옳은 것이다.
- 신앙의 선포와 신학은 시대성을 지녀야 한다.
- 예수의 놀이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더불어 된 것이듯이, 우리의 것도 당연히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 상속자는 자기가 받은 유산을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활용하면서 삶의 다른 모습을 발생시킨다.
6장 하느님에 대한 언어의 문제
- 세속화 현상이 중요시하는 인간 개체의 자유와 존엄성은 그리스도 신앙언어에서 온 것이다.
- 하느님의 신비가 사라지면, 인간의 신비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 니체가 100년 전에 신의 죽음을 선포한 후 행복해 보이는 무신론자를 볼 수 없다. 신의 부재는 세속화된 문화권이 지닌 상처로 보인다. 무신론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무너질 것을 기다리며 기뻐했지만, 그것이 무너짐과 동시에 사람이 무너짐을 볼 수 있다.
- 의미의 공백이 아시아 문화권에서 일으키는 부작용이 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교와 같은 신 중심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하는 노력이다. 신앙인도 비신앙인과 마찬가지로 신의 부재를 체험한다. 신이 계시지 않음을 체험하면서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 그러나 신학은 신에 대해 합리적 이해를 찾고자 하는 학문도 아니다. 신은 우리 사고의 대상으로 객체화시킬 수 없다.
- 신은 인간에게 영원한 문제 자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비라고 말한다.
- 신을 위한 투쟁은 동시에 인간을 위한 투쟁이다. 그것은 대단히 실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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