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신이 뭔지... 본문
1독서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2독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말씀
단상
영적 동반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 학생이다.
바쁜 공부에 그럼에도 신을 안아 모시겠다고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하고
인천에서 김포까지 또 매주 한 번씩 면담을 하러 찾아 온다.
그런데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다
물론 그이의 사정에 매일 1시간씩 기도 역시 여간 힘든게 아닌가 보다.
공부하랴, 연애하랴, 기도하랴, 영적동반자에게 면담하러 오랴
서로의 시간 사정으로 매주 토요일 만나서 면담을 하는데
이제는 애인 만날 시간도 없다며 이런 난리가 없나 보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안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러다 애먼 젊은 청년 연애 사업 망쳤다는 원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다. 하느님이.....
몇 번 해야할 공부량에, 먼 거리에, 급한 것들이 산적한 이 마당에
아직은 19번 영신수련을 일상에서 할만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며
매일 양심성찰과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들로
영신수련의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권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청년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이야기하는데
이 청년 안에서 하느님은 그리고 그 자신에게 종교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엿보게 된다.
그리고 그럴때 마다 '그럼 너무 애쓰지 말고 자신의 사정을 잘 지켜보라'며
좀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한다.
카렌 암스트롱이라는 종교학자가 이야기하길
종교는 본래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행한 무엇이었다.
종교의 진실은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꾸준히 하다 보면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어떤 일이 가능해지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해냈는지 매번 알 수는 없다.
우리 몸이 의식적,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우리 마음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원래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종교는 우리 마음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실천적 수련이다.
종교적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종교의 가르침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겠다고
권위를 갖고 따져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종교의 교리를 의례나 윤리적 행동으로 옮겨 행했을 때만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도 다른 기술들처럼 인내와 노고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일에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고, 형편없이 서툰 사람도 있고
뭐가 중요한지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의례와 수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기 힘든데,
이는 마치 김연아 선수가 얇은 스케이트날로 빙판 위를 활주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법칙은 제대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청년을 보면서 그이 안의 갈망이 해야하는 일이 있고 만나야 될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느님을 향하도로 한다.
아마도 그 갈망 때문에 나는 매번 '한 주 더' 그이와의 만남을 유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사정 앞에서는 '그만'이라고 전해야 할 때도 있겠다.
영적 동반을 하는 이는 진퇴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2독서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말씀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단상
영적 동반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로스쿨 학생이다.
바쁜 공부에 그럼에도 신을 안아 모시겠다고 매일 한 시간씩 기도를 하고
인천에서 김포까지 또 매주 한 번씩 면담을 하러 찾아 온다.
그런데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다
물론 그이의 사정에 매일 1시간씩 기도 역시 여간 힘든게 아닌가 보다.
공부하랴, 연애하랴, 기도하랴, 영적동반자에게 면담하러 오랴
서로의 시간 사정으로 매주 토요일 만나서 면담을 하는데
이제는 애인 만날 시간도 없다며 이런 난리가 없나 보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여자쪽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안나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러다 애먼 젊은 청년 연애 사업 망쳤다는 원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다. 하느님이.....
몇 번 해야할 공부량에, 먼 거리에, 급한 것들이 산적한 이 마당에
아직은 19번 영신수련을 일상에서 할만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며
매일 양심성찰과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들로
영신수련의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권해 보기도 했다.
그러자 청년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이야기하는데
이 청년 안에서 하느님은 그리고 그 자신에게 종교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엿보게 된다.
그리고 그럴때 마다 '그럼 너무 애쓰지 말고 자신의 사정을 잘 지켜보라'며
좀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한다.
카렌 암스트롱이라는 종교학자가 이야기하길
종교는 본래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행한 무엇이었다.
종교의 진실은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꾸준히 하다 보면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어떤 일이 가능해지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들을 해냈는지 매번 알 수는 없다.
우리 몸이 의식적,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우리 마음이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원래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종교는 우리 마음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실천적 수련이다.
종교적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종교의 가르침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겠다고
권위를 갖고 따져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종교의 교리를 의례나 윤리적 행동으로 옮겨 행했을 때만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도 다른 기술들처럼 인내와 노고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일에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고, 형편없이 서툰 사람도 있고
뭐가 중요한지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의례와 수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하기 힘든데,
이는 마치 김연아 선수가 얇은 스케이트날로 빙판 위를 활주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법칙은 제대로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청년을 보면서 그이 안의 갈망이 해야하는 일이 있고 만나야 될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느님을 향하도로 한다.
아마도 그 갈망 때문에 나는 매번 '한 주 더' 그이와의 만남을 유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사정 앞에서는 '그만'이라고 전해야 할 때도 있겠다.
영적 동반을 하는 이는 진퇴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매일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받는 이가 모든 것! (1) | 2011.11.15 |
---|---|
예리코 소경의 달란트 (0) | 2011.11.14 |
'더 나은 나' (0) | 2011.11.12 |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3) | 2011.11.11 |
그게 다가 아님을.... (0) | 201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