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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씨름하는 젊은이 본문

마음에게 말걸기

씨름하는 젊은이

해피제제 2011. 4. 3. 15:18


예수회센터 이냐시오 카페에서 ‘청토(가톨릭 청년 토크)’ 모임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삶에 대한 진지한 나눔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은 가운데
예수회 성소실에서는 젊은이들을 위한 사도직에 종사하고 있는 서강대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함께
젊은이들의 꿈, 희망, 고민, 관계, 삶의 자세, 性, 성소, 신앙, 교회, 하느님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강의와 토론, 나눔 그리고 미사를 함께하는 청년들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번이 두 번째 ‘청토’ 모임으로 매월 첫째 주 토요일 3시에
신촌 서강대학교 근처 예수회센터 이냐시오 카페에서 모임이 진행 된다.
어제도(4월 2일) 많은 젊은이들이 이냐시오 카페를 찾았다.
언제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판에
젊은 남녀들로 북적대는 예수회 센터 길목은 봄 기운이 가득하다.

유시찬 신부님(서강대, 이사장)의 첫 모임의 반향이 컸는지
여기저기 ‘청년(청토모임은 20-35세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이 아닌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신문에 기사도 났었단다.
그래서인지 교회 내에서 ‘젊은이’ 사도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이 모임을 참관하기 위해 이냐시오 카페로 발걸음을 향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주제는 ‘씨름하는 청년, 씨름하는 교회’
위의 포스터처럼 전체 프로그램이 이미 공지 되어 있는 것처럼
다른 주제들이
‘개인적’인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번 주제는
‘공동체’ 혹은 ‘교회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청년들이 사라지고 있는 ‘교회’와 ‘공동체’의 중요성
‘제도교회’의 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지고 나아가야하는
각자의 삶 안에서의 그리스도인 청년들의 역할 등 등
우리 존재 이유를 하느님과 교회에 깊게 뿌리 내리는 가운데
젊은이들의 꿈이 더욱 튼튼해지기를 초대하고 있다.

김우선 신부님(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경(창세기 32,25) 안에서
‘야곱이 동이 틀 때까지 하느님과 씨름을 하는 장면’을 소개하며,
밤이 새도록 하느님과의 힘겨운 대결을 통해
그는 하느님에게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된다는
‘존재변화’에 대한 성찰을 나누어 주셨다.

오늘 복음말씀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앉아서 구걸하던 이’라고 불리었다.
그렇게 밖에 취급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눈먼 이가 보게 된 것이다.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뚜벅뚜벅 걷고 바리사이들의 추궁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입을 열어
그이들의 오만함에 반박한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한 가지, 내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안다.
당신들은 ‘모세의 제자’라며 안식일을 지키지만 그날에 고통 받는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9,25.28.32)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감히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냐?”(9,34)
바리사이들은 겨우 한다는 소리가 ‘눈뜬 거지’에게 그저 호통을 칠 뿐이다.

‘씨름하는 이’는 그 ‘씨름’을 통해 존재 자체가 변화된다.
씨름하기 전과 씨름 후의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누가 감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타이틀로
불리 울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이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샅바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고 혹은 흔들대는 ‘씨름’들은
그이들의 팔과 다리를 튼실케 하고 대지 위에 굳게 발 디디게 하리라.
씨름을 통해 ‘앉은뱅이 눈이 먼 거지’에서 ‘예수의 제자’(9,28)로 존재가 변화된 그는
더 이상 앞이 캄캄한 존재가 아닌 푸른 하늘 아래 모든 그분의 창조물들을 사랑하게 되리라.

지금 이 자리에서 ‘씨름하는 이들’은 루저(Looser)나 쭈그렁 바가지일 수 없다.
씨름을 통해 성장한 이들은 ‘야곱의 하느님’처럼
‘사비오의 하느님’ 혹은 ‘누구누구의 하느님’이라 불려 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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