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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연피정을 다녀와서... 본문

마음에게 말걸기

연피정을 다녀와서...

해피제제 2011. 3. 18. 12:48

피정을 함께 한 벗들과....


영신수련은 '자유'다

# 피정,
쉼이자 영적투쟁의 시간

나는 기쁜가?
나는 행복한가?

당연히 내 삶이 기쁘고 행복하다면
기도가 무어고, 성당이 무어고, 하느님이 무언가?
그냥 기쁘게 살면 된다. --‘

근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화두를 찾을 시간이다.

피정은 내 삶의 기쁨과 행복을 다시 찾아 나서는 것이다.
이 말은 ‘하느님 뜻’과 ‘하느님이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과 선택’에 나서는 여정이다.


# 의식성찰

구체적으로 내 삶의 목표인 ‘기쁨과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을 찾아 나서는 작업이다.
삶에서 나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적 자유’를 억압하고 ‘무질서한 애착’과 ‘충동’으로 이끄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 성령께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 관상기도

창조는 기쁨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기쁨’에 쉼 없이 일하셨다.
창조는 에너지다.

관상기도는 창조다.
두 눈을 감고 하느님 창조의 때를 ‘관상’한다.
그 엄청난 기쁨과 넘치는 에너지, 수많은 이미지들, 온 몸을 휘감는 환희와 생기를 전해 받는다.
관상기도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 기억력, 이해력, 추리력, 의지력,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지는 오감과 육감까지 모든 것이 짬뽕되어 작용한다.
관상은 기쁨이다.

복음관상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그렇지만 자주 그런 착각을 하며 산다)
그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이 땅에서 살아가신 그 모습에 즐겁고, 가슴 뛰며 닮아갈 뿐이다.
그렇게 그렇게 복음 속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좋고, 마음에 들면 나도 어느 사이 그분을 눈꼽만치라도 닮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 기도와 침묵의 자리는 ‘지금 여기(유식한 말로 hic et nunc)’다.
저~기 멀리, 理想의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나는 자주 ‘꿈속’에 산다는 말을 듣는다)
내 ‘지금 여기’는 컴퓨터 앞 지금 이 자리,
내 친구, 가족, 동료, 이웃살이, 예수회, 대한민구, 지구, 우주다.

그렇다. 내가 발 디디며 살고 있는 ‘여기’도 벅차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그분을 찾겠는가!!!
저어기 멀리에 있는 시선을 거두고 바로 지금 ‘나’를 ‘여기’를 바라볼 일이다.


# 상처

영신수련의 ‘죄 묵상’은 ‘죄’라는 무시무시한 단어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나를 죄책감, 의기소침, 열등감, 못난이, 우울하게 만든다.
때론 반발심에 ‘내가 얼마나 사랑 받고 사는데...’라며 항변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죄 묵상’을 내 삶에서의 ‘실수, 후회’의 때라 명명한다.
삶에서 많이 ‘실수’하고 내 자신과 타인들에 ‘상처’를 주고받던 시간들을 살핀다.
반복되는 ‘실수’가 주는 그 불쾌감, 찝찝함, 초라함, 비참함, 나를 질리게 하는 것들을 인식하여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흠..흠..) (매일) 하느님의 자비와 관대함을 청한다.

돌아보면 내 ‘상처’를 수없이 울궈먹었다.
이제는 그 ‘자기연민’에서 과감히 벗어날 때다.
‘절벽 끝 낭떠러지’라고 여기던 순간들, 우울할 때면 꺼내보던 애물덩어리들,
이 같은 ‘상처’들은 절벽 아래로 절대 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지금 “죽겠네, 힘들어” 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두 눈 부릅뜨고 살아 가는 너와 나에게는...)
태양을 향해 훨 훨 날아오르게도 한다. 물론 성령과 함께라면....

‘상처’란 그래서 내 ‘날개’다.
절벽을 박차고 힘차게 날개를 짓쳐 볼 일이다.

‘과거’ 혹은 ‘상처’라는 씨앗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산천초목이 푸르를 수 없다.
살면서 내 신세를 한탄하며 20-30년 울궈먹었다면
그만 싹도 틔우지 못하는 ‘썩은 씨앗’은 버려야 할 때다.
그 불행한 씨앗들 마음을 열고 발화시키면 꽃이 피고 나무가 되어 푸르른 숲을 이룬다.

믿어도 좋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 이들을 피우고 키우고 입히는 이는 하느님의 몫이다.


# 수난

위에서 내게 ‘상처’란 ‘날개’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복된 죄’라고 까지 하더라.
선배 예수회원은 자기의 ‘좋은 것’들은 다 ‘거기(상처)’서 길러졌다고까지 한다.

맞다!

예수님의 수난은 ‘사랑’이다.
허걱! 이건 또 어느 수준의 ‘깨달음’인가!

예수님 수난을 관상하면서 별 별 상상을 다 해본다.
그래도 별(?) 건져지는 것들이 없다. --‘
아직은 ‘수난이 사랑 때문’이라는 ‘십자가길’의 속 뜻이 요원해 보인다.

언젠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만약 수사님이 결혼을 해서 ‘아빠’가 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신다.
흠.. 흠.. 결혼으로 나서야 할까! --‘

아직은 그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결혼해서 애 아빠가 되기 전까지....ㅋㅋㅋ)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게’해 준 벗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직은 이거면 충분하다 싶다.


# 부활

일찌감치 예수님의 부활이 생물학적으로 ‘죽었던 육체가 살아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아니, 나도 잘 모르겠다. 그때 내가 무덤을 살펴본 것도 아니고...
그냥 ‘신비’라고 해 두자.

재미난(?) 것은 그래도 내가 체험한 예수님은,
바로 내가 ‘만난’ 또는 ‘만나고 있는’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매일 매시간, 내가 눈만 돌리면 마주하는 예수님이다.
이게 ‘부활’하신 예수님 아닌가!!!

마리아도 사랑하는 ‘스승님’을 앞에 두고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았다(눈이 삐었나!!!)
예수님 발치에서 사랑에 눈이 멀어 마르타의 타박에 신경도 쓰지 않던 마리아다.
생전의 예수님이었다면 마리아가 몰라볼 리가 없다.
베드로도 요한도,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 그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이가 없다.
(그들 눈이 삐꾼가!!)

누군가 빵을 들고 기도할 때,
누군가 구약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들려주었을 때,
누군가 ‘마리아’라며 친근하게 불러줄 때,
그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오늘 아침 기도 중에 그리고 지금 컴퓨터 앞에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께 시선을 두고 당신의 일을 하는 ‘지금 여기서’ 내 마음은 즐겁고 내 가슴은 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여기가, 당신을 알아보는 지금이 ‘부활’이다.
부활은 그러한 것이다.


# 영성

내가 발 디디고 사는 세상에서,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혜다.
어려운 말로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

영성은 어려운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보시기 좋은’ 이 세상에서
또 당신을 닮은 사람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지혜다.

영성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을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성은 하느님 안에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구함이다.

다시 말한다, 영성은 그냥 삶이다.
하느님 성령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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