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조심스러운 사람 본문
거실과 주방 쪽으로 온 집안에 핏자국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걸레로 치운 흔적이 있지만 짓쳐진 핏자국이 자욱하게 선명하다. 간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핏자국의 흔적을 따라가니 동기 수사님 방 안으로 이어진다. 현관에서부터 방 쪽으로, 방 문 앞에서 주방 쪽으로....거실 휴지와 주방 치킨 타월도 몽땅 사라졌다. 아무래도 동기 수사님의 소행임이 분명하다.
방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본다. 그러나 좀처럼 반응이 없다. 늦은 아침 이미 내 코도 비릿한 혈향에 저절로 아미가 찌푸려진다. 걸레로 핏자국을 따라 닦고 혈향을 없애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또 그것도 마땅찮아 여러 대 香을 피어 둔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도 동기 수사님의 방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어젯밤 모임이 어땠는지 온 집안 꼴을 이렇게 해 두고 잘도 잠을 잔다.
한 달 간의 준비를 한 끝에 어제 큰 행사를 치렀다. 매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이웃살이’에서는 스포츠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무려 석 달간, 매주 일요일 축구와 농구가 대곶중학교 실내체육관과 인조잔디구장에서 치러진다. 그 개막식이 어제 있었고 이웃살이 실무자들과 봉사자들은 하루 종일 땡볕에서 녹초가 되었다. 김포 시장님을 비롯해서 대사관 손님 등 많은 분들이 행사를 축하 해 주셨다. 물론 이 행사의 주인공인 외국인 노동자들도 무려 550여명이 참석해서 춤과 노래와 운동으로 그이들의 행사를 기념하였다.
성황리에 끝난 개막식 행사에 서로를 격려하는 간단한 식사자리가 있었고 이웃살이 센터 소장님을 비롯해 몇몇이 참석했다. 물론 땡볕에 체력이 바닥난 ‘저질체력’ 소유자인 나는 외식도 외면한 채 곧장 집으로 향했다. 공동체에 돌아오자마자 잠자리에 들었고, 덕분에 평소보다 늦은, 간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비릿한 아침을 맞게 된 것이다.
슬그머니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동기 수사님을 깨우기 위해 야단스럽게 인기척을 냈는데도 소식이 없다. 기계를 이용해서 원두커피를 시끄럽게 갈고, 식기들을 소리 내어 정리하고, 뭉쳐둔 빨래도 웽 웽 돌리고, 삑삑대는 현관문을 몇 번이나 여닫지만 좀처럼 반응이 없다. 무언가 큰 사단이 났다 싶다. 혹여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닌지 등 등 별별 생각이 다 든다.
그렇게 동기 수사님의 방안을 의식하다가 내 노력이 하늘에 닿았는지 수사님의 인기척이 들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장실로 향하는 그이를 보니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해서 내게서 나가는 말도 덩달아 퉁명스럽다. “아니, 온 집 안에 피칠을 해 놓고 잠이 와요? 대체 무슨 일이야?” 되돌아오는 답이 가관이다. “그냥 좀 다쳤어”
열려진 수사님 방으로 따라 들어가 현장(?)을 면밀히 검사한다. 수사님 방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헉! 이 비릿한 냄새는 뭐야! 아니, 지금 이 난리 속에서 잠이 와!’ 입 밖으로 쏟아지려는 말들을 주워 담느라 마음속으로 ‘성호경’ 무던히 그려야 했다.
참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얼마나 피를 흘려놨는지 여기저기 방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은 거실과 주방의 흔적은 그나마 양반에 속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건 숫제 쓰레기 더미 속 ‘난지도’도 아니고.....사라진 치킨타올과 거실 크리넥스는 처참한 몰골로 여기저기 팽개쳐져 있었다. 상처 때문인지 퉁퉁 부은 왼발 엄지발가락은 피 묻은 말라비틀어진 휴지 덕분에 더욱 가관이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노라니 애써 그렸던 ‘성호경’도 무용지물, 드디어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니 지금 정신이 있는 거에요? 이런 상처를 해 가지고 잠이 와요? 아니 발을 다쳤으면 병원을 가야지, 아니면 전화를 하던지, 또 그것도 아니면 나를 깨워서 같이 가자고 하던지 이게 뭐에요. 온 집안을 피칠을 해 놓고 지금 제 정신이에요?”
한참을 그렇게 쏟아 놓는데도 동기 수사님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얼굴은 또 얼마나 잠을 설쳤는지 새카맣게 퉁퉁 부은 것이 한 숨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다. 그게 또 속상해서 나는 툴툴 거린다.
병원 응급실에 와서도 나는 또 툴툴 거린다. ‘호기심천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동기 수사님은 응급실 간호사를 계속 괴롭히고 있다. “이거 과산화수소 맞죠? 코튼볼은 다 과산화수소로 재웁니까? … 와! 원래 소재용 가위가 그렇게 생겼나요? … 날카로운 것으로 베이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발가락도 잘 구부러지고 봉합만 해도 될 것 같은데..” 등 등 숫제 자기가 의사선생님 행사다. 나는 그게 또 못마땅해서 “아니, 형님이 의사야?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병원으로 올 생각은 않고, 발이 퉁 퉁 부어 오도가도 못한 채, 온 집 안에는 잔뜩 피칠을 해 놓은 건 또 뭐야.” 내 이런 핀잔에 ‘호기심천국’ 수사님은 야단맞는 소년이 되어 또 애꿎은 시트만 잡아 뜯고 있다.
그러면서 동기 수사님의 변명에 또 속이 뒤집힌다. “니가 깰까봐 그랬지, 니가 항상 방문을 열고 자니까 너 깨울까봐 조심해서 들어오다 보니 거실에 피 흘린 것을 제대로 닦지 못했어....”
이걸 핑계라고....차라리 말이라도 말았으면...
“형님, 내가 화가 난 건, 형이 온 집안에 ‘피칠’을 해서가 아니야. 생각해봐 우리 둘이 함께 산지가 벌써 7년째야. 그런데 이런 큰일을 당했을 때조차도 나는 형한테 여전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거야. 공동체에 딴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덜 속상했겠지. 그런데 단 둘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 내가 여전히 형에게 ‘전화하기 힘들고, 깨우기는 더더욱 조심스러운’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아? 이런 사실이 지금 나를 무척이나 슬프게 해. 형! 입장을 한 번 바꾸어 놓고 생각해봐. 내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밤새도록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피를 철철 흘리며 퉁퉁 부은 발을 해가지고 있는데, 다음날 ‘니가 깰까봐...’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래서 ‘병원에 함께 가달라고’ 말을 못했다면, 이 말을 듣는 내 기분은 어떨까?.......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래”
아픈 사람에게 이것저것 쏘아부치고 또 그것이 속이 상해 한 바탕 울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나는 여전히 동기 수사님에게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로, 처음과 별반 다름없는 내 모습에 참으로 불쌍한 놈이라는 생각이다.
주님, 이 불쌍한 놈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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