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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해를 바라기에 해바라기다 본문

매일의 양식

해를 바라기에 해바라기다

해피제제 2011. 10. 2. 08:55
1독서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2독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복음말씀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단상

10월 청토가 있는 날이다. 알싸한 아침 공기에 마음이 가볍게 설레는 것은
그 모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또 어떤 일을 준비하고 계실까에 대한 은근 두근거림이다.

청토 이 달의 강사는 '심종혁 신부님' 이시다.
수도회 내에서 '영신식별'에 대해서는 간판 스타라 할 수 있다.
'영신수련'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심 신부님은 이 둘이 다 조화롭게 꽃 피는 삶을 살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의 달란트 답게 오늘은 어떻게 청년들에게 '영신식별'을 이야기 할까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에 내가 다 마음이 설레고 있다.

가끔 괴팍한(?) 성격에 수녀님들을 여럿 울렸다는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수학/물리학을 공부했던 분이라 어떻게 하면 '지성적 호기심'이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평생에 걸쳐 고민해 오시는 신학자로서
되도 안는 이유로 '무엇인가 들렸다, 보였다' 하는 문제로 당신을 찾는 다면 
영신식별의 대가답게 무섭게 구박을 받기가 일쑤란다.
순진한 신자들이 당신 수업을 수강하러 오면서 지적 작업이 선행되지 않는
'따뜻한 것, 마음의 위로, 알듯모를듯한 그것, 자신들의 하느님 체험' 등을 운운할 때면
단칼에 사정없이 비수를 날리기도 유명하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지적인 작업을 통해 설명 가능하도록 당신 자신을 채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인의 의무요 영성신학자로서의 책무라 생각하신다.
그러니 혹여 청년들의 '이런이런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요?'라는 질문에
한 까칠한 성격 튀어 나와서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면박이나 주시지 않을지
은근 걱정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마태오 복음 1, 18-25절 '요셉의 식별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말씀을 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바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요셉에게 일어난 것이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셉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니다. 그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님을 보아야 별을 딸 것인데, 님도 본 적이 없는데 별이 생긴 것이다.
이 대략난감한 문제에 '의로운 사람', '법 대로 사는 사람'인 요셉은
평소 그가 사용한 판단 준거 틀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잣대'를 사용했다.
그래서 '남 모르게 파혼 하기로 생각을 굳힌 것' 이다.

하느님의 일은 항상 '반전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나는 별 어려움이나 걱정, 곤란함 없이 '직선'으로 가고 싶으나
그분의 계획은 나랑 다른가 보다.
시련과 실패, 세상의 유혹, 넘어짐, 일탈, 일어섬, 이별, 화해 등 등
'직선'이 아닌 빙글빙글 '곡선'으로 나를 정신없이 몰아 댄다.
그렇지만 종국에는 처음 내가 바라고 희망하고 꿈 꾸던 곳에 서있게 됨을 알 수 있다.

요셉의 '천사가 찾아 드는 꿈'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꿈'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이게 된다.
본전 생각날 만도 하지만 그의 이성을 한계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손길 앞에서
그가 가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준거틀은 더 이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

오늘 강의의 주요 주제인 '영신식별은이란?
우리 각자에게 심어주신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찾아 내는 것이다'
세상에 각자의 '은사'로서, '은총'으로서 주어진 처음 소중한 하느님으로 부터 불림 받은 그 '이름'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 이라고 이름 불렸던 소중한 이들이

그러나 태어나고 자라면서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싸아져 처음 내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된 꿈, 스펙, 돈, 명예, 권력, 체면, 올가미 같은 사회구조 등 등
우리의 눈을 가리고 '참 나'를 가리는 것들을 다시금 '개인 소명, 개인 성소'를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내 죽음의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관 속에 들어가 듣게 되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다면 무섭게 앞으로 나아갈 바를 꿈 꿀 수있다.

하느님께서 새겨주신 '이름'을 잃어 버린 우리는
대신에 나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무엇이 될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판/검사, 의사, 인기연예인, 유명 여성 정치인, 가수 등 등...
심 신부님은 이것을 '기능적 측면의 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상적 측면'에서의 하느님 고유한 은사 '이상적 카리스마'를 살도록 초대한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드라마 속의 '악당'을 보면
자기 처지는 잊고 '저 거지 발싸개 같은 XX' 이라고 욕하듯이
인간 누구에게나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선한 본성'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각 개인에게 심어주신 '이름', '이상적 자아', '개인 소명', '개인 성소',
그리고 '내 꿈'을 되 찾게 해 주는 방법이 바로 '영신식별'이다.

영신식별을 위한 방법으로는 '성찰'을 제시한다.
성찰은 바쁜 현대인의 삶에서 자기 자신을 '대상화' 해 보기를 권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씨앗 탓에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안다.
그렇지만 좋은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신부님은 좋으 것을 '알고' 그것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꿈'에 이르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일부터, 삶이 나아지면, 형편이 좋아지면, 몸이 건강해지면, 시험이 끝나고, 결혼을 하면' 등 등
좋은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돼지근성'이라며 막말(?)을 하기도 한다.
 
'성찰'은 1) 뒤 돌아 보는 행위와 2) 비추어 보는 행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는 시간을 돌이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 보는 행위이고,
후자는 '성경' 또는 '예수님의 행위'라는 거울을 통해 '대상화'의 기준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순수하게 '돌아보는 행위' 만으로도 삶을 충분히 성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성찰의 '거울'이 없다면 무엇에 비추어 내 자신을 대상화 시킬 수 있단 말인가.
신부님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거울이 바로 '성경'과 '예수님의 선택' 임을 보여 주신다. 

나를 이끄는'꿈'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것이 결혼 성소이든 수도 성소이든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은 몸이 아프더라도 한다.
시간이 없더라도 그 좋은 '꿈'을 위해 시간을 내고 온 몸으로 뛰어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아침 시간을 내서, 하느님 앞에 나 앉는 것,
그 올라오는 느낌과 이미지, 감정들을 글로 써 두고 벗들과 나누는 것,
또 그와 같은 깨달음들이 나를 하느님 당신의 꿈으로 초대하고 있음을 아는 기쁨,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이름' 붙여 나를 내시고 내 안에 심어 주신 '꿈'이란 그러한 경지다.

끝으로,
신부님은 짜디 짠 바다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물고기는 '짜지 않다'고 한다.
생명력 가득 찬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고기처럼 짠 맛이 나지 않는다.
세상의 혼탁한 물결 탓하며 살 일이 아니다.
세상은 온갖 유혹들로 사탄의 활동 없이도 알아서 우리를 꾀어내고 있다.
터무니 없는 유혹,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욕망들은 세상의'꿈'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갈 것, 나를 설레게 하는 꿈이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

덧붙여,
'해를 바라기에 해바라기가 되었다'
내가 하느님의 '꿈'을 통해 바라며 살기에 나로 하여금 '하느님의 꿈'이 되게 한다.
하느님의 꿈을 꾸는 이들에게는 먼 훗날 그것이 성취되든 성취되지 않았든
그 꿈 하나 품고 살았다면 그것으로 족해 보이지 않을까
청년이란 그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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