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해월과 가톨릭신앙의 통합, 무위당 선생님을 그리며 본문
해월과 가톨릭신앙의 통합, 무위당 선생님을 그리며
[무위당 장일순 선생에게서 무엇을 배울까-1]
무위당 장일순은 이런 분이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 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 ‘걷는 동학’ 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 명이나 모였다는 사람....”(최성현, <좁쌀 한알>)
호명된 이들은 현재 여러 방면에서 내공 있는 분들로 잘 알려졌는데, 이분들이 장일순 선생을 아버지, 스승, 맏형으로 모신다니 글을 읽기 전부터 주눅이 들것만 같다. 하지만 정작 무위당은 앞에 나서는 일이 없이 늘 후배들을 앞세웠기에, 오히려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하다면 평범했던 가톨릭의 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그럼에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무위당 장일순을 알아가면 갈수록, 깊이 파면 팔수록 샘솟는 샘물과 같이 더 깊은 수원이 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는 그 깊고 넓은 수원의 물만 잠깐 맛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장일순을 따랐던 김지하는 한 대담에서 장일순의 사상적 맥락을 전체적으로 조명해 달라는 청을 받고, “개인을 영웅으로 역사에 부각시키는 시각으로 장일순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한다. 백범이나 여운형과 같은 방식으로 장일순을 연구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민중 속에 살아있는 운동가이며, 또한 그를 둘러싼 운동역량 등과 또 대중과의 관계를 전제해야하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장일순이라는 개인의 면에서 본다면, 한마디로 도덕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장일순은) 유학적인 수양으로 몸을 다지신 분이고, 마치 금강석처럼 부서지지 않는 도덕을 실현한 분이죠... 그래서 유학과의 관계를 밝혀야 그분이 보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쓰라린 일들이 생겨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도덕을 체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또 하나는 철저한 가톨릭 정신을 실현하신 분이죠. 세 번째가 해월 정신이 드러난 시기입니다... 이처럼 어떤 도덕적인 정신사의 맥을 이어가면서도 또 철저히 운동정치가입니다.”(김지하,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김지하는 장일순이 해월을 통해서 태생적인 유학을 넘어서게 되었다면서, 가톨릭도 예수의 가톨릭은 좋아하면서도 ‘바리사이식 가톨릭’은 넘어섰으며, 따라서 단편적인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유영모나 함석헌처럼 장일순을 종교를 통합해 사상을 펼친 인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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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순 선생의 난 (사진출처/무위당 사람들) |
“해월사상은 장일순 선생님이 가장 잘 이해하고 드러내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네같이 덕 없는 중생들은 해월사상을 흉내 내는 것도 힘들어요. 또한 그분은 해월의 정신대로 사셨지요. 그분의 해월사상은 해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까지를 모두 흡수하신 결과로 나타났지요.”
장일순이 삶으로 보여주고 살아낸 해월사상을 ‘흉내내는 것도 힘들다’고 한 김지하의 고백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한국 사회과학계의 대표적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리영희도 장일순과 가까운 관계였는데 무위당을 두 가지 면에서 자신과 차별화한다.
“나는 무위당처럼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아울러서 사는 분의 사상이나 자세에는 어림도 없죠... 무위당은 종합적이랄까, 총괄적이랄까, 잡다하게 많은 것을 이렇게 하나의 보자기로 싸서 덮고 거기서 융화해 버린단 말이에요... 둘째는 역시 나는 감히 못 따를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인데,... 그 삶이 얼마나 철저합니까... 한 예로 그 집 변소를 보면, 남들은 전부 개조해서 세상을 편리하게만 살아가려고 고치는데, 그냥 막 풍덩풍덩 소리가 나고 튀어 오르고 야단났어요... 부엌도 그렇지, 마당 그렇지, 우물 그렇지,... 철저하면서도 그렇다고 ‘난 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거 하는 거야’하고 이론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실제 생활인으로 하신단 말이에요. 그것이 놀라워요. 철저하면서도 조금도 철저하지 않은, 그저 일상생활이 되어 버리는 이런 인간의 크기 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그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단 말이에요.”(리영희,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리영희는 장일순이 농민, 사회문제, 문화방송과의 문제, 교구와의 관계, 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에 관여하면서 살던 때에도 그 살던 집의 모습과 사는 모양이 자연 그 자체였기에, 그의 생명사상이 어느 시기에 이렇게 전환된 것이라기보다는 장일순이라는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라고 본다고 했다. 리영희 선생은 장일순 영전에 이런 글을 남긴다.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지난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자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은 사람에겐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셨습니다.”
선생님 우리 곁을 떠나신지 20년이 지난 오늘, 선생님 빈자리가 점점 더 커지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계속)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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