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본문
그 밤 잠들기 전 메일을 확인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그 궂긴 소식에 그 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른채 멍한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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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처럼 여겼던 어른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주지 않고 또 바쁘게 떠나가셨다.
홀로 남겨진 나는 멍하니 그 먹먹한 밤에 울다가 웃다가 그리워하다가 깼다가
언제그랬냐는 듯이 아침에 일어나 강의를 듣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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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신학을 떠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정일우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몸이 불편하셨던 신부님을 3년간 아침을 챙겨드렸던 사이라
(아니다. 식사를 챙겨 드린 것은 맞지만 삶을 챙겨 받은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그 빚 갚아달라고 안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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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일이 넘는 단식으로 몸이 많이 상하신 정일우 신부님께서
학생 수사님들이 생활하는 화곡동신학원 공동체로 오시게 되셨다.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한 신부님의 일상은 온통 수사님들의 손발을 필요로 했다.
집 앞 10여분의 산책도, 이발도, 목욕도, 옷 입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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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가끔은 볼멘 소리도 올라온다.
공부하는 수사님들이 모인 공동체라 그럴만도 하다
어느날엔가는 원장 신부님이 모두에게 조심스럽게 물으신다.
‘정신부님 양로원 공동체로 이동하시는 게 좋을까요?’
공동체 회의에 안건으로 부쳐졌다.
그리고 결과는 정신부님이 눕게되어 꼼짝달싹 못할 때까지는 ‘신학원에서 모시자’ 였다.
볼멘 몇몇 수사님들의 목소리에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던 공동체도
정신부님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다는 숨은 목소리들 덕분에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조금씩 더 시간을 내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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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적이고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우리 젊은 수사들도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신부님이 그 병중에도 수사님들 곁에 함께 계셔 주셨기 때문에
특별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내 존재가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체험을,
거룩함이 흘러넘쳐서 곁에 있는 나까지도 그 거룩함에 휩싸이고 만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말없이 자극하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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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신부님을 위해 ‘내 아까운 시간을 내고 있다’라고 여겼던 우리 철없는 수사들은
정신부님의 말없는 가르침을 통해 조금씩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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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언제나 당신이 필요한 곳으로 큰 걸음 성큼성큼 내딪으셨던 정신부님이
하나에서 열까지 아들뻘 후배 수사님들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당신에게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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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원에서 함께 살면서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드러내시는 모습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도움을 받는 쪽은 우리 젊은 수사들이 아니었을까!
동시에 도움을 베푸는 쪽 보다 도움을 받는 쪽이 얼마나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
그 거룩한 분이 짜증을 표시할 때는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정신부님과의 주고받았던 삶의 기억과 추억들이 그것마저도 뛰어 넘게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신학생들을 이만큼 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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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철거지역 주민들과 함께 살때도 그랬다신다.
파란 눈의 외국인 신부가 철거민들과 함게 산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가 취재를 왔다.
기자: “신부님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신부님: ‘함께 살지요’
그랬더니 다시 한 번 질문해 온다.
기자: “그러니까 이들과 함께 살면서 특별히 무엇을 하십니까?”
별 이상한 질문도 다 있다는 듯이
신부님: ‘그냥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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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역시나 이상한 대답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한 기자는 그렇게 떠나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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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신부님의 이 말씀은 신학원 공동체에 함께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인가 특별히 하시는 일 없이, 당신 일상의 모습으로 ‘함께’ 하셨다.
아프면 아픈 모습으로, 힘들면 힘들다는 표정으로,
반가운 이들이 찾아오면 내 앞에 있는 그이가 전부라는 해맑은 웃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때는 온 몸을 상대방에게 맡긴채 그렇게,
그런 당신의 모습이 화가 날 때는 솔직하게 짜증을 내기도 하시면서
그렇게 솔직한 모습으로 당신 몸을 후배 수사들에게 맡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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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무렵부터였으리라.
내 음식이 아닌, 신부님이 드실 아침 상 위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 둘 준비하면서,
그 드시는 모습에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더 맛있게 드실만한 것을 궁리하면서
누군가의 입에 넣어지는 음식에 내가 다 배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옷이 아닌, 다른 이의 옷단추를 서투르게 채우면서도 그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있음을,
힘겹게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혹시나 넘어질까 앞뒤에서 몇번이나 마음을 조리던 순간을,
집앞 산책을 나서면서 꽉 잡은 손도 부족해 온 몸을 내개 기대어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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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이 정 신부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동안 머리로서 알고 있었던 ‘사랑’에 대해서
지독한 ‘자기사랑’에 갇혀 그 틀을 깨보겠다고
수도원에까지 찾아들어 발버둥쳐 보았지만
끝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하나 깨트리지 못하던 내게
‘과연 내가 나 외에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자포자기 했을 그 시절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시작 했던 정신부님과의 소소한 일상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경 말씀이 되어
봄날 포근한 햇살이 되어, 그렇게 내게도 사랑이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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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나를 넘어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다는 체험.
당신이 늘 말씀하셨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던’ 신부님께서는
그저 병 중에 있는 당신 자신을 후배들에게 맡기시면서
내게는 나 자신을 넘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셨고,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내게,
그것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임을 이야기해 주신다.
‘그냥 함께 삽니다’라는 당신의 그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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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함께했던 시간 때문인지 일본에서의 내 아침 풍경도 정신부님을 닮았다.
버터바른 구운 식빵 한 장, 커피 한 잔, 과일 반쪽, 낫또!
그 분 삶을 닮았다면 더 좋겠지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대신 그분 삶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그 사랑을 키워나가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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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그 짧은 시간에 침묵이 힘들었던 나는 주절주절 말도 많았다.
그러다가 피곤하고 지쳤을 땐 한 마디도 없이 신부님이 얼른 드시기만을 눈빛으로 재촉한다.
도움을 받는 쪽은 이 쪽의 마음을 쉽게 감지한다고 하지
가슴에 손을 얹고 봐도 진심이 아니었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얼굴 찌푸리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고,
여튼 그럼에도 신부님은 언제나 이렇게 외국사람 티를 내며 한 마디 건네신다.
“형욱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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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를 받기위해 침대에 걸터 앉은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이 자세를 가장 좋아 한다)
처음 당신에게 고해성사를 하러 갔을 때
나를 당신 앉아 계신 의자 쪽으로 불러 앉히시더니 그대로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죄를 고백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용서의 기도를 청하시던 분이다.
그렇게 온몸을 꼭 안아 성사를 주시던 그날처럼 마지막 그날에도
‘형욱이가 예수님 닮은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안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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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도록’이 아니고
‘건강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도 아니다.
당신이 평생 한길 곧게 걸어 오셨듯,
진짜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램처럼
공부 떠나는 후배에게도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청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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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청해 주시는 것이니 고맙게 덥썩 받아들었는데
살면서 조금씩 그 말의 무게를 알아 듣기에
언젠가 다시 뵈면 물러달라고 떼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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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것은
한평생을 그렇게 ‘진짜 사람’으로 살고 싶으셨던 분의 등을 보며 생활했던 기억에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울까’에 대해서는 고민할 게 없다.
오히려 ‘예수님 닮은 사람의 모델’이 너무 분명해서 탈이면 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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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위태위태 널어질듯 제 팔뚝을 꼭 잡으시며 선명하게 남기셨던 손자국을 기억합니다.
제게 온 몸을 기대시며 한발한발 내딪으셨던 그 무게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형욱이! 고마워요’ 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감사도 귓가에 선명합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그 넗은 품으로 꼭 껴안아 주신 것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고
그렇기에 그 소중한 기억들로 ‘사랑하기’만 하면 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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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그곳에서도 신부님답게 마음껏 즐거우시고
이 땅에 신부님을 떠나 보내는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를 청합니다.
그렇게 많이 슬픈 것은 아닌데 그 품이 그리울 때는 어쩔지몰라 그것이 쬐금 걱정입니다.
많이 받았으니 많이 돌려 주어야 할텐데 그것도 그렇고…
가볍게, 깃털처럼 가볍게
사랑을 기억하며 김형욱 수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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