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同床異夢 본문
4주일 마태 16,21-27
참으로 서글프다. 그저 울고 싶은 마음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공생활 시작 전 ‘광야’에서 부터겠지. 그때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열정에 ‘아버지의 뜻’과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가려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그 의미를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3년간의 공생활을 겪어 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제자들을 부르고, 하느님 말씀을 설파하고, 아픈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를 살리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나고 자란 고향에서 오해를 받고 내쫓김을 당해도 그이들을 원망하지 않고 발길을 돌리면서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또 그렇게 기운내서 씩씩하게 걸어왔던 길이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또 떠나갔지만 그래도 함께 해 주는 친구들이 있고 한결같은 ‘아버지’가 계셨다.
그런데 오늘 또 한 번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당했다. 여지껏 ‘같은 꿈’을 꾸며 함께 해온 동료들이-나는 그이들을 ‘종’이 아닌 ‘벗’으로 대했다-내가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아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의 뜻을 나누고 들려주고 확인하며 걸어온 이 길에서, 누구보다도 더 잘 그분의 뜻을 깊게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그이들에 대한 내 기대가 형편없이 무너지는 날이다.
벗들이 나에게 바란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펼친 그분의 ‘기쁜소식’을 정녕 이해는 하고 있는 걸까? 혹여 병든 이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에서 무심코 펼친 치유들과 그이들을 먹인 기적들에 마음이 더 가닿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일들이 있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고 우리를 향한 시선들에 더 우쭐했던 것은 아닐까?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을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외치는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내 벗들은 나의 수난과 죽음을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는 듯싶다. 이 서글픔은 아무래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어 보인다.
모질게 마음을 먹고 베드로에게 아픈 말을 해본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이렇게 강한 표현은 처음인지라 베드로의 황망한 눈을 잊을 수 없다. 전에도 그이의 ‘단순무식한’ 행동 때문에 내게서 몇 번이나 핀잔을 듣곤 했지만 오늘 ‘사탄’, ‘걸림돌’이라는 표현은 내가 생각해도 좀 과했다. 머리로 깊게 생각하기 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는 베드로이다 보니 다른 벗들에 비해 사건사고가 많은 편이다. 그런 이유로 마음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 가르침과 의도를 잘 알아듣고 그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기에 적지 않은 핀잔에도 다시금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는 친구다. 그런데 그런 깊은 우정의 친구에게서 ‘사람의 일’만 챙기는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인간적인 것들을 놓는 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처음에 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부모님 밑에서 또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싶었다. 그러나 아빠 하느님은 나에게 다른 길을 준비해 두셨고 그 길을 따르도록 이끄신다. ‘하느님 뜻’을 내 마음에 새겨 주셨고 ‘그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길’이 나를 죽일 수 있음을, 아니 반드시 죽게 할 것임을 끊임없이 보여주신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시며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 하신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다. 내 앞에 펼쳐질 길이 어떤 길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알기 원했고 ‘그 길’에 희망을 두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분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끄신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희망을 두고 가는 ‘그 길’이 나를 더욱 더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게 한다. 내가 신뢰했던 벗들이 내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내가 세상의 길이 아닌 하느님의 길로 향할수록 더욱 더 고독해 지는 것 이 모두가 나를 두렵게 한다. 그러면서 올라오는 것은 어쩌면 이 인간적인 ‘두려움’이 나를 아버지께 향하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항거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불확실’하고 결코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굳게 신뢰케 만들고 나를 살게 만드는 ‘경외’할 수 있는 아버지!
나는 그저 묵묵히 ‘그 길’을 믿고 나아가 볼 일이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겠지. 그렇게 믿어 볼 일이다.
* 이 글은 이냐시오영성연구소 책자 '영신수련'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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