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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본문

마음에게 말걸기

보십시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해피제제 2012. 1. 15. 07:36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의 예수회 피정집 연못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그녀는 머리 숙인다.
유순한 태도로, 그러나
밑으로 떨어뜨린 그녀의 눈길은
천사에게 묻고 있다. 왜
이 로맨스
내가?

사무엘 메나쉬 <수태고지> 중에서





이 꼬물꼬물한 아기는 무언가. 진짜 못 생겼다.

누가 그런 거야? 아기는 다 예쁘다고...,

눈도 뜨지 못하고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펼 줄 모른다.

이것만 보아도 한 성격 나온다.

바람결 잔 떨림 때문인지 살짝 품에 당겨 안는다.

그제서야 아기의 체온이 전해지면서 떨림도 잦아든다.

내 품에서 꼼지락 대는 아기가 마냥 신기하다. 그래도 못 생긴 건 못 생긴 거다.



아기가 아기를 낳았다.

품에 안았던 아기를 엄마에게 안겨 주니

소녀는 지친 품을 열어 조심스레 아기를 받아 안는다.

마치 바다가 해를 품어 안듯 그 경이로운 순간!

소녀의 아기를 향한 시선은 엄마의 눈빛이다.

추위에 떨며 생기 없이 지쳐 보이던 소녀는 간 곳 없고,

생명력 가득한 엄마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아기와 엄마로 맺어진 인연은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

설사 죽음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문득 이 말을 했던 날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흘러나오던 말,

그리고 그 말씀처럼 드디어 오늘 이 아기를 보았다.

앞으로 이 아기의 운명은 또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남편 요셉은 지금껏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이는 ‘의로운 사람’ 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이는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 이다.

내가 두려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을 때 그이는 나를 지켜 주었고,

내 떨리는 손을 말없이 잡아 주었다.

그리고 오늘 이 낯설고 어두운 곳에서 여전히 그 손을 놓지 않은 채다.

그이는 이 아기를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나이 쯤 되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시간 위에 살아가는 하느님 피조물들의 자연스런 삶의 이치다.

제국의 속국,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유대인들은

이 불의한 상황을 타개해 줄 메시아를 오랜 세월 기다려 왔다.

그런데 심상치 않은 마리아의 몸 상태를 대하며

남 몰래 그녀의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을 때,

그날 밤 꿈에서 항거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렸고,

나는 지금껏 그녀의 가녀린 손을 놓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녀 품안에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가 칭얼대며 안겨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야훼 하느님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평범한 우리 가정에 엄청난 일을 시작하셨다.



‘하느님이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

연일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반기는데 정작 오늘이 무슨 날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연인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날인가?

산처럼 쌓아둔 케이크를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 날인가?

아니면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흥청대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백화점 쇼윈도의 진열장에는 번쩍이는 성탄트리가 가득하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하느님은?

이 수많은 당신의 날을 기억하는 상징들 가운데서 당신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종교인들 외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아기 예수가 사라져 버린 오늘 당신의 날,

여기 당신이 세상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저와 같은 인간이 되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늘 위 하느님께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온 몸으로 사신다니 고마움을 보냅니다.

인간의 약함, 두려움, 불안함, 허무감, 갈등, 분노, 긴장

이 모든 감정들을 입게 될 테니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더불어 당신의 선물 사랑, 기쁨, 희망, 행복, 온유, 평화, 침묵, 기도,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나이 들어가며 얻게 될 인생의 지혜들을

에누리 없이 맛보게 되셨으니 멋지게 살아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게 되어 다행입니다.

주님 오늘 이 땅에 오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냐시오영성연구소 <영신수련> 12월 호에 기고했던 단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