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거짓 평화, 참 평화 본문
1독서
형제 여러분,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
복음말씀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 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단상
요며칠 인천교구 사제 연수가 있는 터에 이웃살이 신부님이 본당 미사를 집전하셨다.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라 미사를 따로 드리지 않고
본당에서 함께 드리는 것으로 하고 출근길과 퇴근길에 본당 미사엘 참석했다.
본당 미사는 공동체 미사와 또 다른 맛이 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 앞에 서 계신 신부님도 평소의 과격함(?)과는 달리 한결 점잖아 보이고
신자석에 앉아서 듣는 신부님의 목소리 역시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이 정감이 가득 난다.
신부님은 마이크 성능 탓일거라며 사람에게 가장 듣기 좋은 상태로 셋팅이 되어 있을 것이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신다.
그래도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복음말씀을 두고서 열변을 토하는 태세에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4대강 국토 파괴, 용산사태, 쌍용자동차 분규,
부산 김진규 위원의 크레인 농성, 제주도 강정마을 환경 파괴 등 등
평화란 힘으로 눌러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상태로 폭압을 펼치는
그래서 모두가 숨 죽이며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 서로가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라며
그런 기준이라면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는 별다른 소음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찍소리 못하고 모두가 숨 죽여 살아야 했을 암울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각기 다른 의견을 내 놓을 수 있는 사회가
그래서 어느 정도 긴장이 흐르고 와글와글한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라는 주장이다.
다행히 강론이 끝나고 곳곳에서 '아멘'이라는 화답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오스트리아로 교포 사목을 떠나신 이전 주임신부님 덕분에 그래도 신자분들이
이웃살이 신부님의 막 나가는(?) 강론을 대하며 처음은 아닌 듯 싶어 마음을 놓아본다.
근처 다른 곳에서는 주임 신부님의 이 같은 강론을 듣던 중에 '왜 그런 강론을 하시냐?'며
미사 중에 낭패를 당한 신부님의 일화가 일파만파 전해지고 있다.
신부님과 면식이 있는 나는 그 대쪽 같은 선비 신부님의 마음 고생에 응원을 보내고
그럼에도 한결 같이 가난하고 정의롭게 사시는 분이라 지금은 그분 사는 모습을 보고
신자들이 쑥덕쑥덕 다른 이야기들은 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쎄게 이야기하시면 시골 분들이 많이 당황해 하지 않겠냐며
성질 좀 죽이시라고 권했더니 '그게 무서우면 다음 부터는 부르지 않겠지' 하신다.
본당 미사를 피하는 방법도 참으로 가지가지다 싶다.
삼일 동안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신부님은 제대로 당신 소개를 하셨다.
동네 아저씨 같은 통통한 모습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또 신부님의 강론에 간간이 웃음도 흘러 나오는 것이 그렇다.
모나지 않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모습'에 대한 강렬한 표현들은
또 다르게 신자들에게 매력이 되었는지 미사가 끝나고 인사를 건네오시는 모습들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공동체 형제 신부님이 본당에서 드리는 미사를 함께 하면서
그 여유로움과 따뜻함 그리고 날카로운 현실에 대한 참여는
또 새롭게 알아듣는 수도형제의 매력이다.
살면서 이게 다가 아니라 양파 껍질 벗기듯 자꾸 배울 게 많다면
또 이것도 내 복이다 싶다.
참으로 감사할 게 많다.
형제 여러분,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
복음말씀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 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단상
요며칠 인천교구 사제 연수가 있는 터에 이웃살이 신부님이 본당 미사를 집전하셨다.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라 미사를 따로 드리지 않고
본당에서 함께 드리는 것으로 하고 출근길과 퇴근길에 본당 미사엘 참석했다.
본당 미사는 공동체 미사와 또 다른 맛이 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 앞에 서 계신 신부님도 평소의 과격함(?)과는 달리 한결 점잖아 보이고
신자석에 앉아서 듣는 신부님의 목소리 역시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이 정감이 가득 난다.
신부님은 마이크 성능 탓일거라며 사람에게 가장 듣기 좋은 상태로 셋팅이 되어 있을 것이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신다.
그래도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복음말씀을 두고서 열변을 토하는 태세에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4대강 국토 파괴, 용산사태, 쌍용자동차 분규,
부산 김진규 위원의 크레인 농성, 제주도 강정마을 환경 파괴 등 등
평화란 힘으로 눌러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상태로 폭압을 펼치는
그래서 모두가 숨 죽이며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 서로가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라며
그런 기준이라면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는 별다른 소음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던 것이 아니라
그저 찍소리 못하고 모두가 숨 죽여 살아야 했을 암울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각기 다른 의견을 내 놓을 수 있는 사회가
그래서 어느 정도 긴장이 흐르고 와글와글한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라는 주장이다.
다행히 강론이 끝나고 곳곳에서 '아멘'이라는 화답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오스트리아로 교포 사목을 떠나신 이전 주임신부님 덕분에 그래도 신자분들이
이웃살이 신부님의 막 나가는(?) 강론을 대하며 처음은 아닌 듯 싶어 마음을 놓아본다.
근처 다른 곳에서는 주임 신부님의 이 같은 강론을 듣던 중에 '왜 그런 강론을 하시냐?'며
미사 중에 낭패를 당한 신부님의 일화가 일파만파 전해지고 있다.
신부님과 면식이 있는 나는 그 대쪽 같은 선비 신부님의 마음 고생에 응원을 보내고
그럼에도 한결 같이 가난하고 정의롭게 사시는 분이라 지금은 그분 사는 모습을 보고
신자들이 쑥덕쑥덕 다른 이야기들은 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쎄게 이야기하시면 시골 분들이 많이 당황해 하지 않겠냐며
성질 좀 죽이시라고 권했더니 '그게 무서우면 다음 부터는 부르지 않겠지' 하신다.
본당 미사를 피하는 방법도 참으로 가지가지다 싶다.
삼일 동안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신부님은 제대로 당신 소개를 하셨다.
동네 아저씨 같은 통통한 모습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또 신부님의 강론에 간간이 웃음도 흘러 나오는 것이 그렇다.
모나지 않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모습'에 대한 강렬한 표현들은
또 다르게 신자들에게 매력이 되었는지 미사가 끝나고 인사를 건네오시는 모습들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공동체 형제 신부님이 본당에서 드리는 미사를 함께 하면서
그 여유로움과 따뜻함 그리고 날카로운 현실에 대한 참여는
또 새롭게 알아듣는 수도형제의 매력이다.
살면서 이게 다가 아니라 양파 껍질 벗기듯 자꾸 배울 게 많다면
또 이것도 내 복이다 싶다.
참으로 감사할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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