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결혼은 왜 하나? 본문
1독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복음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시몬과 안드레아)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그들은(야고보와 요한)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단상
이웃살이 봉사자 자매님이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결혼 후 같이 산 기간이 꽤 지났고,
그렇게 그렇게 마음을 맞추어 살다가 최근에 다시금 결혼 생활에 대해
남편의 시선에서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사라져 보이는 지금
이노무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전혀 다른 두 사람과 두 문화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그러다가 서로에게 다름을 발견하고
또 그러다가 그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각자의 다름도 알고 그러면서 결혼 생활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놓는
그래서 서로의 노력과 헌신으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둘 사이에 좋았던 것들이 한풀 꺽여 시들해 졌을 때
그렇게 눈이 멀게 했던 사랑의 열병이 잦아 들고
둘 사이 수많은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넘어선 또 다른 이름,
세월의 흐름과 잔잔한 일상 속에서 어느덧 서로에게 잔잔한 신뢰가 그것이여 보인다.
세상 모두가 나를 틀리다고 해도 그이 한 사람만은 내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
모두가 나를 잘못 보고 있을 지라도 그이 한 사람만은 나에게 등 돌리지 않을 사람
내가 아프면 나 보다 더 아파할 사람, 밤 길 헤치며 기꺼이 약국 문을 두드릴 사람
지금은 위와 같지 않더라도 살아보니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을 사람
그게 고맙고 그런 노력이 감사해서 투닥투닥 하면서도 함께 밥 먹고 사는 이 사람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그 모습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삶,
이런 사람이 나와 한 이불 덮고 사는 이라면 그렇게 외롭지는 않으리라.
자매님도 이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
속이 상하고 화도 나고 실망이 깊어지면서 기대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미명하에 꾹 꾹 눌러 참았던 것들도 이제 그만 내려 놓고
갖은 의무와 율법과 관습으로 나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을 벗어 놓고
십자가여서 항상 무겁기만 했던 것들도 기쁘게 질 수 있음을 알아 들어서
하느님이 주신 본디 제 이름을 찾아 나설 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불러 주시던 그 이름,
'시몬아, 안드레아야, 마리아야, 데레사야...'
잊고 살았던 내 이름을 다시금 입술에 올려 볼 일
사랑은 가정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한 사람만의 몫은 아닌 일
혹여 이 사람이 모를 때는 그이가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혹은 깨우쳐 주고)
그러면서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도 못할 짓
결혼 삶이, 수도 삶이 새장에 갇힌 새 처럼 나를 부자유스럽게 한다면 왜 그짓을 할까
'결혼 전에는 훨씬 자유로웠는데...'라고 한탄스럽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일,
왜 결혼 후에 더 자유로운게 아닌가
결혼을 해서 서로의 자유를 더 풍성하게 가꾸고 성장시켜야 함은 당연한 일
지금 그렇지 않다면 왜 결혼을 했는가
안하니만 못한 결혼
우습다.
다행히 내 수도 삶은 기대도 있고 실망도 많고 그러나 희망은 더 큰,
그래서 투닥투닥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
그 덕분에 '그물도, 배도, 아버지도' 버리고 아무 것에도 매임 없이
오직 나의 하느님에게만 자유롭게 매여 유유히 하루를 맞는다.
결혼도 수도삶도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더 큰 자유로움이 나를 뚜벅뚜벅 이끈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 그곳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 보인다.
ps:
오해는 말라
갈라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유로움을 찾고 맛 보라는 얘기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복음말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시몬과 안드레아)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그들은(야고보와 요한)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단상
이웃살이 봉사자 자매님이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결혼 후 같이 산 기간이 꽤 지났고,
그렇게 그렇게 마음을 맞추어 살다가 최근에 다시금 결혼 생활에 대해
남편의 시선에서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사라져 보이는 지금
이노무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전혀 다른 두 사람과 두 문화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그러다가 서로에게 다름을 발견하고
또 그러다가 그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각자의 다름도 알고 그러면서 결혼 생활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 놓는
그래서 서로의 노력과 헌신으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둘 사이에 좋았던 것들이 한풀 꺽여 시들해 졌을 때
그렇게 눈이 멀게 했던 사랑의 열병이 잦아 들고
둘 사이 수많은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넘어선 또 다른 이름,
세월의 흐름과 잔잔한 일상 속에서 어느덧 서로에게 잔잔한 신뢰가 그것이여 보인다.
세상 모두가 나를 틀리다고 해도 그이 한 사람만은 내 편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
모두가 나를 잘못 보고 있을 지라도 그이 한 사람만은 나에게 등 돌리지 않을 사람
내가 아프면 나 보다 더 아파할 사람, 밤 길 헤치며 기꺼이 약국 문을 두드릴 사람
지금은 위와 같지 않더라도 살아보니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을 사람
그게 고맙고 그런 노력이 감사해서 투닥투닥 하면서도 함께 밥 먹고 사는 이 사람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그 모습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삶,
이런 사람이 나와 한 이불 덮고 사는 이라면 그렇게 외롭지는 않으리라.
자매님도 이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찾아 나서야 할 시간,
속이 상하고 화도 나고 실망이 깊어지면서 기대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미명하에 꾹 꾹 눌러 참았던 것들도 이제 그만 내려 놓고
갖은 의무와 율법과 관습으로 나를 부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을 벗어 놓고
십자가여서 항상 무겁기만 했던 것들도 기쁘게 질 수 있음을 알아 들어서
하느님이 주신 본디 제 이름을 찾아 나설 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불러 주시던 그 이름,
'시몬아, 안드레아야, 마리아야, 데레사야...'
잊고 살았던 내 이름을 다시금 입술에 올려 볼 일
사랑은 가정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한 사람만의 몫은 아닌 일
혹여 이 사람이 모를 때는 그이가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혹은 깨우쳐 주고)
그러면서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도 못할 짓
결혼 삶이, 수도 삶이 새장에 갇힌 새 처럼 나를 부자유스럽게 한다면 왜 그짓을 할까
'결혼 전에는 훨씬 자유로웠는데...'라고 한탄스럽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일,
왜 결혼 후에 더 자유로운게 아닌가
결혼을 해서 서로의 자유를 더 풍성하게 가꾸고 성장시켜야 함은 당연한 일
지금 그렇지 않다면 왜 결혼을 했는가
안하니만 못한 결혼
우습다.
다행히 내 수도 삶은 기대도 있고 실망도 많고 그러나 희망은 더 큰,
그래서 투닥투닥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
그 덕분에 '그물도, 배도, 아버지도' 버리고 아무 것에도 매임 없이
오직 나의 하느님에게만 자유롭게 매여 유유히 하루를 맞는다.
결혼도 수도삶도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더 큰 자유로움이 나를 뚜벅뚜벅 이끈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 그곳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 보인다.
ps:
오해는 말라
갈라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자유로움을 찾고 맛 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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