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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내게 보여주실 땅 본문

매일의 양식

내게 보여주실 땅

해피제제 2011. 3. 20. 08:24
1독서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복음말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단상

살면서 끊임없이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게 수도 '삶이라' 합니다.
'삶이라' 따옴표 친 이유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문득 '아브라함의 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몸 부비며 살아온 터전과 가족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심정!

제일 처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올라옵니다.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불확실한데
삶을 깊게 뿌리 내린다는 것 참으로 요원해 보입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계시니 두려울 것 없어'라며
아브라함 자신은 이겨낼 수 있다 생각 됩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무슨 죄인지....

하느님 체험이 아직 요원한 가족들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지금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무엇인가 삶의 형태에 '변화'를 준다는 것, '변화'가 닥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도회 특히 예수회 안에서의 삶은 '한쪽 발을 들고 서 있는 삶'을 지향합니다.
우리 삶의 양식을 그래서 availibility(유용성), mobility(기동성), adaptability(적응성)라고도 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삶 속에서 언제든 '하느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가운데
그분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을 취하거나 혹은 버리며(어배일러빌러티)
지금 내가 뿌리 내리고 있는 이 자리를 떠나 어디든 향하며(모빌러티),
내가 지켜온 삶의 습관이나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를 몸에 다시 입는(어댑터빌러티)
그래서 '한쪽 발을 들고'살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항상 '파견'의 삶을 지향하고 '변화'를 몸에 익히라는 뜻입니다.

전 예수회 총장 콜벤바흐 신부님은 예수회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냥 대충대충(혹은 평범함)은 예수회 안에서 설 자리가 없다."

Magis(마지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라는 예수회의 모토 아래
개인적이 수도 삶이나,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사도직, 그리고 공동체 삶에서
평범함이나, 대강대강 사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해석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여 줄 땅이 어딘지 궁금합니다.
가끔은 어느 정도 두렵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껏 제 앞에서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제 길을 밝혀 주시고 이끌어 오셨으니
이렇게 쌓인 이 작은(?) '신뢰'가 남은 여정도 마냥 두렵게만은 하지 않습니다. 
겸손히 당신의 관대함을 청하면서 이 길 미소지으며 나아가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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