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바라만 봐도 기쁜 체험 본문
1독서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2독서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복음말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단상
하비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을 보면
하버드 대학 신학부에 교양과목으로 <예수와 윤리>라는 과목이 개설 되었을 당시
신학부 교수들은 과연 누가이 과목을 교양으로 수강할지 무척 걱정이었다고 한다.
사실 개신교인들이 설립한 대학이지만 지금의 하버드 대학은 과학과 진리를 우선하는
신학이나 종교는 뒷방 늦은이 취급 당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신학부 교수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적은 수의 학생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작은 강의실에을 배정했다가
나중에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ROTC관 대강당으로 강의실을 변경해야 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들에게 '왜 <예수와 윤리>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느지'를 질문해 보았다.
그이들의 대답은 현 사회의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만은 윤리 문제들이 발생한다.
부의 분배 문제, 시장경제체제의 무한경쟁, 줄기세포연구, 난자매매, 낙태, 자원전쟁,
테러, 종교전쟁, 책임 지지 않는 선거 정책, 난개발, 기후협약, 선진국의 재화 독점 등 등
무엇에 가치를 두고 기준 삼아 살아가야 할지 불확실한 미래 현실에
그래도 "예수"라면 그래도 무엇인가 대답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학생들 중에는 개신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가톨릭 심지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신은 없다'라는 무신론자들,
그리고 자기가 종교를 만들었다는 자칭 '나교주'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이들이 2000년 전 예수라면 무엇인가 대답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 예수회센터에서 열린 '청년토크'모임에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한달에 한번씩 꼭 꼭 이 모임에 찾아 가는지
그리고 이 젊은이들이 화창한 가을날, 극장이나 번화가와 같이 그들에게 즐거울 만한 곳이 많은
그런 곳이 아니어 보이는 이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지 의아함이 올라오면서
이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진로 문제,
내가 믿고 따르고 있는 신앙에 대한 궁금함, 앞서 간 선배들에게 지혜구함 등 등이
토요일 눈 부시게 멋지고 화창한 날, 바람도 좋은 가을에 서로를 끌어 당기고 있다.
팔 구십여명의 스무 살에서 서른 다섯 이하의 젊은 남녀 청춘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선배들의 지혜를 구한다.
궁금했던 그이들의 질문에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웃고 즐기며 '소통'을 하는 자리다.
어떤 것도 가능하다. 아무리 황당한 질문이라도 또 황당해 보이는 대답이라도
이미 마음이 열린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떤 대화도 가능해 보인다.
어른이라고 '내가 이미 한 번 가본 길인데!'라고 잰 척을 하지도 않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그대로 내 보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그 갈증에
그 절박함을 알아 들은 강의자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 그이들의 이미 한 단계 성장해 있다.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듣게 되면 다음 서로 간의 나눔도 용기가 난다.
열 명 정도 한 조가 되어 강의를 듣고 느낀 점, 아쉬운 점, 자신이 가진 고민을
한 공간에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과 한 발 두 발 용기를 내어 나누기 시작한다.
이 곳에는 '틀린 것'은 없다. 서로가 나누지 못할 '고민'도 없다.
내가 하는 고민과 곁에 나누어 주는 고민이 고만고만하다.
나만의 아픔, 나만의 갈등, 나만의 불안함과 두려움, 나만의 용기 없음이 아니다.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구나, 나도 이렇게 아픈데, 너도 또 그렇게 가슴앓이 하는구나!' 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마음에 함께 아파하고, 또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든다.
쭈뼛쭈뼛했던 무표정한 타인이 어느덧 환한 웃음을 가진 '친구'로 다가와 있다.
언젠가 '청년토크'도 '끝장 토론'의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그 이야기가 가진 '회복력'을 구현할 수 있으면 한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긴장과 무표정으로 숨겨버린 자신의 맨 얼굴을
'그래도 괜찮아' 친구들에게 서서히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이야기, 네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울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나 혼자, 너 혼자'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성장통'임을 알아듣고
그냥 그것에 '헤헤' 웃음을 지으며 내 아픔, 너의 아픔, 우리의 아픔을 보듬아 주었으면 좋겠다.
청년들이 모인 그 자리만에도 가슴이 뛴다.
그 아기(?)들의 세상 끝날 것 같은 고민들에게 소리 죽여 웃기도 하면서
그 젊음이, 그 에너지가, 그 열정이, 그 감동이
이 화창한 토요일 나로 하여금 예수회센터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반갑고, 고맙고, 기쁜 그이들 하나하나를(?) 하느님께서 꼭 안아주시길 기도한다.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2독서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복음말씀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단상
하비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을 보면
하버드 대학 신학부에 교양과목으로 <예수와 윤리>라는 과목이 개설 되었을 당시
신학부 교수들은 과연 누가이 과목을 교양으로 수강할지 무척 걱정이었다고 한다.
사실 개신교인들이 설립한 대학이지만 지금의 하버드 대학은 과학과 진리를 우선하는
신학이나 종교는 뒷방 늦은이 취급 당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신학부 교수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적은 수의 학생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작은 강의실에을 배정했다가
나중에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 ROTC관 대강당으로 강의실을 변경해야 했을 정도로
학생들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들에게 '왜 <예수와 윤리>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느지'를 질문해 보았다.
그이들의 대답은 현 사회의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수만은 윤리 문제들이 발생한다.
부의 분배 문제, 시장경제체제의 무한경쟁, 줄기세포연구, 난자매매, 낙태, 자원전쟁,
테러, 종교전쟁, 책임 지지 않는 선거 정책, 난개발, 기후협약, 선진국의 재화 독점 등 등
무엇에 가치를 두고 기준 삼아 살아가야 할지 불확실한 미래 현실에
그래도 "예수"라면 그래도 무엇인가 대답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학생들 중에는 개신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가톨릭 심지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 '신은 없다'라는 무신론자들,
그리고 자기가 종교를 만들었다는 자칭 '나교주'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이들이 2000년 전 예수라면 무엇인가 대답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 예수회센터에서 열린 '청년토크'모임에 다녀왔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한달에 한번씩 꼭 꼭 이 모임에 찾아 가는지
그리고 이 젊은이들이 화창한 가을날, 극장이나 번화가와 같이 그들에게 즐거울 만한 곳이 많은
그런 곳이 아니어 보이는 이곳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지 의아함이 올라오면서
이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진로 문제,
내가 믿고 따르고 있는 신앙에 대한 궁금함, 앞서 간 선배들에게 지혜구함 등 등이
토요일 눈 부시게 멋지고 화창한 날, 바람도 좋은 가을에 서로를 끌어 당기고 있다.
팔 구십여명의 스무 살에서 서른 다섯 이하의 젊은 남녀 청춘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선배들의 지혜를 구한다.
궁금했던 그이들의 질문에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웃고 즐기며 '소통'을 하는 자리다.
어떤 것도 가능하다. 아무리 황당한 질문이라도 또 황당해 보이는 대답이라도
이미 마음이 열린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떤 대화도 가능해 보인다.
어른이라고 '내가 이미 한 번 가본 길인데!'라고 잰 척을 하지도 않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그대로 내 보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그 갈증에
그 절박함을 알아 들은 강의자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 그이들의 이미 한 단계 성장해 있다.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듣게 되면 다음 서로 간의 나눔도 용기가 난다.
열 명 정도 한 조가 되어 강의를 듣고 느낀 점, 아쉬운 점, 자신이 가진 고민을
한 공간에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과 한 발 두 발 용기를 내어 나누기 시작한다.
이 곳에는 '틀린 것'은 없다. 서로가 나누지 못할 '고민'도 없다.
내가 하는 고민과 곁에 나누어 주는 고민이 고만고만하다.
나만의 아픔, 나만의 갈등, 나만의 불안함과 두려움, 나만의 용기 없음이 아니다.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구나, 나도 이렇게 아픈데, 너도 또 그렇게 가슴앓이 하는구나!' 라며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 마음에 함께 아파하고, 또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든다.
쭈뼛쭈뼛했던 무표정한 타인이 어느덧 환한 웃음을 가진 '친구'로 다가와 있다.
언젠가 '청년토크'도 '끝장 토론'의 시간도 가졌으면 한다.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그 이야기가 가진 '회복력'을 구현할 수 있으면 한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긴장과 무표정으로 숨겨버린 자신의 맨 얼굴을
'그래도 괜찮아' 친구들에게 서서히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이야기, 네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 울고 안아주기도 하면서
'나 혼자, 너 혼자'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성장통'임을 알아듣고
그냥 그것에 '헤헤' 웃음을 지으며 내 아픔, 너의 아픔, 우리의 아픔을 보듬아 주었으면 좋겠다.
청년들이 모인 그 자리만에도 가슴이 뛴다.
그 아기(?)들의 세상 끝날 것 같은 고민들에게 소리 죽여 웃기도 하면서
그 젊음이, 그 에너지가, 그 열정이, 그 감동이
이 화창한 토요일 나로 하여금 예수회센터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반갑고, 고맙고, 기쁜 그이들 하나하나를(?) 하느님께서 꼭 안아주시길 기도한다.
'매일의 양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길 곧게 가라신다 (4) | 2011.09.06 |
---|---|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다. (9) | 2011.09.05 |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을까 (8) | 2011.09.03 |
하느님의 모상 (4) | 2011.09.02 |
생명의 의사, 영혼의 의사 (0) | 2011.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