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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청년토크], "성경, 내 삶의 길을 묻다." 송봉모 신부님 강의 정리 본문

마음에게 말걸기

[청년토크], "성경, 내 삶의 길을 묻다." 송봉모 신부님 강의 정리

해피제제 2012. 3. 4. 14:32

송봉모 신부님 청년토크 사진은 아직 이거 밖에 안 올라 있군요.


청년토크,
송봉모 신부 성경, 내 삶의 길을 묻다

20123청년토크의 시작은
예수회의 간판스타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로 시작됐다.
작년 젊은이들의 뜨거운 호응에 발맞추어
올 해도 젊은 청년들의 영혼을 일깨우고
그이들의 꿈에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예수회 청소년 사목위원회의 야심찬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다.
.
송 신부님은 첫 시작을 아주 썰렁한 유머로 시작하셨는데,
전대협의장으로 계시는 청년토크진행자인 최성영 신부님이
저는 항상 자리를 빛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농담에
청년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금 전대협이란 전국 대머리 협회라는 뜻임을 일깨워 주시고
웃음을 유도하셨지만 이미 작년 한 해 동안 최 신부님 자신이
수 없이 써먹으신 덕분에 청년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을
송 신부님 자신은 미처 알고 계시지 못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래도 몇 몇이 웃어 주어
(그 말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송 신부님의 애쓰는 모습 때문에)
그나마 뻘쭘함은 벗었으니 시작부터 애를 톡톡히 쓰고 계신다.
작년 한 해 동안 훌쩍 수준 높아져 버린 청년들의 귀에
과연 송 신부님께서는 어떤 강의로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실지
자못 기대가 된다.
.
신부님은 먼저 당신의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성경이 당신에게 길을 열어 준 계기를 소개하시며,
어릴 때부터 착한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자라면서 본당 미사는 물론이고,
주일학교 교사생활까지 그저 무난한 신앙생활을 해 오다가,
이냐시오 성인이 전투로 부상을 당해 요양을 하면서
평소 기사들의 이야기(요즘으로 치면 무협지”)’만 탐독하던 그분에게
당시 요양하던 방에는 읽을 책이라곤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들의 열전 단 두 권 밖에 비치되어 있지 않아서
그 책들을 읽음으로서 성인의 삶에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듯이,
송 신부님 역시 군대에서 행정일을 하면서
읽을 책이라곤 시커먼 표지의 성경책 밖에 없어서
그동안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한 번도 성경책을 손에 들고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이제는 너무도 심심하고 더 잃을 책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읽게 된 것이 성경책이었고
결과적으로 23세 처음으로 성경책을 읽음으로서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삶의 목표, 꿈과 희망들을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그러면서 처음 군대에서 성경책을 펼쳐 읽은 구절이
바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편으로 그 중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
당시 송 신부님에게는 크게 울림을 전해 줬던 대목으로
그저 부모님의 신앙을 물려받아 아무런 노력 없이 신자 생활을 했고,
그래서 대충 큰 죄 짓지 않고 스물 세 해를 살아 왔는데,
처음 씨앗은 좋은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튼실한 것이 없음에 틀림없었을 텐데,
송 신부님 자신의 가시덤불과 같은 삶의 양식으로
자라되 튼실한 열매를 영글지 못하고
한편으론 썩지도 못해 다른 작물들에 밑거름이 되어 주지도 않는
그저 그런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라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느님의 씨앗이 내게는 어떻게 뿌리 내렸는가?’라는 질문을 처음 하게 되었다.
.
두 번째 성경을 읽게 된 계기
칼리 지브란의 예언서”’라는 영성에 대한 시를 접하게 되면서
신비주의자 영성가가 그이의 신앙에 내재된 언어로
생명, 죽음, 고통, 인내, 영혼, , 낙원등을
일반인들에게 아주 쉽게 깨달음을 주는 것을 알고,
그렇다면 천주교의 경전인 성경을 통해서도
이렇게 알기 쉽게 삶과 신앙에 영감을 불러일으켜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심에서
성경을 더 주의깊이 읽게 되었다고 한다.
.
그렇게 시작된 성경 읽기는 다시금 말씀 묵상으로 이어졌고
그리고 깊은 관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성서와 인간 시리즈.
이것은 얇은 책자로 칼리 지브란이 전하고자 했던 삶의 문제들을
그리스도교 언어로 신앙인들에게 알기 쉽고
일상에서 경험 가능한 시선으로 소개하고 있다.
.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성경 읽기
매일 같이 성경의 한 구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 당신 일상을 소개한다.
매일의 성경 읽기를 통해,
1) 그 구절들을 밑줄 그으며 읽어 가다가,
2)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구절에 색연필로 체크해 두고,
3) 그 색이 입혀진 말씀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4) 하루 종일 기회 있을 때마다, 즉 계단을 오르다가,
잠깐 담배를 피우면서,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다가,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켜면서 등 등
일상 중에 오늘 붙들어 둔 말씀을 입술에 올려 본다.
5) 저녁잠들 때에는 오늘 하루 보살펴 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가슴에 품어 두었던 그 말씀대로 살았는지 다시금 성찰한다.
.
신앙인들이 주일을 제외하곤 비신앙인들과 전혀 다름없이 살아가면서
그이들과 꼭 같이 삶의 무게로 짓눌려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다.
생명의 말씀이 있고, 언제나 앞장 서 가시는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뒤를 졸 졸 따라 오시며
내가 던져둔 삶의 옷들을 하나 둘 집어 들고 오시는 엄마 마리아님이 계시는데
게다가 내 삶의 전체적인 길목에서
비록 내가 청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주시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삶의 여정에서 나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든든한 명품(?) 빽을 지녔으면서도
주일을 제외하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를 든든히 받쳐 주고 계시는 분들을 까마득히 잊고 사는 것은 무슨 연유에선가.
그렇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
송 신부님은 과거에는 신앙인들이 죽으면
고인의 손 떼가 묻은 십자고상, 묵주, 성경책을 함께 관에 넣어 묻었는데
요즘은 그 중 한 가지는 뺀단다.
바로 성경책이다.
이유는 요즘 사람들은 전혀 성경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이사 가서도 역시나 성경을 읽지 않을 거라나 뭐라나.
.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부탁을 해 온다.
결혼을 해서 부모가 되면 아이들에게 그들만의 성경책을 선물하라고,
그래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기만의 성경을 읽고, 밑줄을 긋고,
그 말씀이 하루 먹을 양식이 되고 결국에는 평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도록
부모의 이런 신앙생활과 하느님의 말씀에 기대는 일상 삶이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다른 어떤 선물보다도 멋진 선물이 될 거라는 의미다.
.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이 우리 일상 삶에 을 제시해 줄 수 있는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요한 4,1-42)’으로
성서학자로서의 당신 연구와 깨달음을 더해 강의하신다.
그러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임을 강조한다.
.
.
성경의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인이다.
게다가 다섯 번 결혼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 중이다.
중동의 한 낮 더위가 장난이 아닌 가운데
매일 40도를 넘나드는 길을 걸어서 물을 길러 다닌다.
시카르라는 마을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유대 근동의 마을들의 입지가 그렇듯이 산 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산 아래 우물까지 2km를 내려가서
다시금 무거운 독에 물을 가득 채운 채 그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매일, 40도의 더위에, 무거운 독을 지고,
다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운 여자라는 비난과 모멸감을 겪으면서...
.
이런 상태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유대 사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에게 별 두려움 없이 말을 건넨다.
오히려 주거니 받거니 그 장면의 대화가 참으로 정겹기까지 하다.
그 당시 유대 풍습에서는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외간 남자에게 그것도 혼혈이방인인 사마리아 여자 주제에 말이다.
아마도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
반면에, 예수님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이 여인에게서 어떤 목마름을 길러 낸다.
사마리아 여인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 그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하고
그 열띤 대화로 다시금 삶의 활력을 불어 넣는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가장 적합한 답을 알고 있듯이
나는 괜찮지 않아라고 자포자기해 있는 그녀를 일깨워 줌으로
그녀 스스로 나도 괜찮아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깡충깡충 뛰어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의 체험을 전하고
다시는 무기력증에 빠져 자신의 문제를 잠으로 회피하지 않고
그래서 밤사이 잠을 설치는 일도 없이
게다가 한 낮늦은 시간에 일어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세 가지의 목마름을 일깨우신다.
.
첫째는 육신의 목마름, 현실의 목마름이다.
목이 탄다는 말은 말 그대로 육체적인 갈증, 목이 마르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현실의 문제로 물을 마시면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먼 길을, 그것도 무거운 물독을 지니지 않아도 되는
육체적인 목마름을 없애줄 어떤 마법적인 을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이 굳이 일깨워 주지 않더라도
우물가로 가서 예수님 당신이 목이 말라 물을 달라고 청하듯이
물을 마시면 된다.
.
오늘날의 현실의 목마름의 종류에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좋은 경력 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것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면서도
자신의 맞갖은 재능에 따라 성취해 나가면 된다.
그렇지만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욕심낸다면
그것까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이유는 없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록펠러의 ‘1달러만 더의 예화).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다며 하느님을 원망하며 평생을 산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육신의 목마름, 현실적인 목마름은 하느님께 청하기도 하면서도
자신의 재능에 따라 멈추고, 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
두 번째는 정서적인 목마름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를 보자.
그녀가 하루하루 고되기는 하겠지만
육체적인 목마름은 어떻게 해서든지 물을 마시며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정서적인 목마름은 이야기 다르다.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은, 돌봄을 입고 싶은 갈증
다섯 남자를 갈아치웠고 또 다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다.
性的으로 매력이 넘치는 여자라서 지금까지 다섯 남자를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목마르다.
다행히 지금껏 성적인 매력이 넘쳐서
새로운 애인을 사귀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만고의 진리 ‘40 후반 미모의 평준화에 이르면
아무리 날고 기는 화장술에 성형술이라도 할지라도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다.
그때는 어떤 남자도 그녀를 거들 떠 보지도 않을 것이다.
.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낮에 깨어나는 것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회피의 수단이다.
요나가 하느님께서 니네베로 가라는 명령을 거스르고 도망치고 있을 때에
이제는 아무런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바로 그의 삶 전체를 주관하는 신의 뜻을 거슬렀기에
더 이상 희망도 꿈도 없는 삶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남들은 폭풍우가 몰아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 길을 찾는 데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배의 선창 깊숙한 곳에서 며칠 동안 잠만 퍼자고 있다.
만성적인 잠은 삶의 무기력증에 빠질 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상실하게 될 때,
모든 것이 벽이 되어 막막하게 될 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삶의 회피 수단이다.
.
사마리아 여인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한 낮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어난다.
꿈도 희망도 곁에 있는 동거남에게도 어떤 삶이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났다.
모두들 엄친아, 엄친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려서부터 엄마 친구 아들과 비교되면서
끊임없이 ‘You are not O.K’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이 경쟁사회에서,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사회에서는 1등과 말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아무리 반에서 1등을 했다 해도, 전교 1등 보다 못하고,
도내 1등 보다 못하고, 전국 1등 보다 못하기에
우리들은 늘 괜찮지 않아라는 존재로서밖에 취급 받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 자아의 깊은 곳에는
나는 그렇게 훌륭하거나 사랑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본인 스스로 낙인을 찍어 버린다.
.
만약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으리라.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WTO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사람들 10명 중 4명이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그 약 이름을 언급했는데 잊어 버렸음).
삶의 무기력감에 빠져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불확실성에서
지금 여기에 모인 젊은이들 역시 그 약 이름을 알고 있거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또는 실제로 복용하고 있는 청년들도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비록 그녀가 미모의 평준화에 이르러 자식 하나 없이
거렁뱅이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통해 사랑 받는 체험,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랑을 만나게 되면서
기쁘게(?) 길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나는(송신부님) 그렇게 믿는다.
.
한 가지 더,
예수님이 그녀의 육체적, 현실적인 목마름을 채워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이 없다고 마술처럼 빵을 맹글어 주시지는 않는다.
물이 없다고 마르지 않는 샘을 주시지도 않는다.
그런 것들은 현실을 살면서 우리들이 성취하고 일궈야 할 몫이다.
대신에 정서적인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에 대해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다음 행동을 보게 되면 분명하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마시게 했던 듯싶다.
.
사마리아 여인의 최대의 약점이자 수치심
그리고 끊을 수 없는 욕망 덩어리인 그 남자를 데려 오너라라는 치유의 말을 통해서
평생의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짓눌렀던 바위 덩어리를 손수 치워 주시며
위로를 건네주신다.
그분의 그 말씀에 깡충깡충 마을로 뛰어 들어가
자신의 신상내력을 온통 꿰뚫고 있는 점쟁이를 만났던 게 아니라
(그랬다면 마을 사람들 아무도 예수님께 달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아픔, 상처, 고통, 불안 등을 꿰뚫어 보시고
위로와 사랑을 체험케 해 주신 메시아를 만났기에,
방금까지 무기력감에 빠져 자살하지 못하고
질긴 목숨 짊어지고 우물가에 나타난 여인을 단박에 통 통 생기가 넘치도록,
얼굴에 빛이 나도록, 그 생명의 기운을 그대로 전해 받게 된 마을 사람들은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님께로 내달려가게 만든 것이다.
결국 여인의 말대로 그이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혼의 목마름을 적셔준 메시아를 만나면서
수 없이 남자를 갈아치운 사마리아 여인 역시 공동체에 받아 들여졌고
또 마을사람들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사흘을 머물며
그분께 사랑받고, 돌봄을 입는 상처 치유와 위로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
세 번째 영혼의 목마름이 먼저 선행된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역시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서 자유롭게 된 영혼이
(‘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시지 않았다.
다만 자유롭게 살라하셨다. 너무 착하려고 애쓰며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일을 행함에 그렇게 신적인 사랑 받음의 체험을 통해
든든한 명품 빽을 얻었다면
굳이 인간적인 사랑과 위로에 목숨을 걸지도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하느님 사랑의 인간적인 표현,
사랑의 주고받음이 무용하다는 것은 아니다. 꼭 필요하다.
사랑의 주고받음만큼 감미로운 게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현실적, 육체적 목마름에도 역시 과한 욕심내지 않고
내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만큼의 것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
여러 질문들 가운데
.
1) ‘건강한 자아를 갖게 되면 살면서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유롭게살기를 시도해라.
아니면 아닌 것‘No’라고 말 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삶이랄 수 있다.
나는 죽겠는데 착한 사람인 양 모든 것에 ‘Yes’라고 한다면
죽어나는 것은 나겠고, 더 끔찍한 것은
그 원망과 분함과 화가 쌓여 나중에 으로 꼭 죽게 된다.
재미난 삶 오래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서둘러 하늘나라로 이사 떠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2) 우리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무지하게 강하다.
나도(송신부님) 서강대 사제관에서 생활하면서
밥을 같이 먹는 식탁에서 나만 쏙 빼고 자기들(다른 신부님들)
영화 보러 가자는 둥 그런 말이 오갈 때면 엄청 서운하다.
비록 내가 너무나 바빠서
(여기저기 강론에 글 청탁에 송 신부님은 매일 시간을 사시는 분이다)
영화 보러 함께 갈 수는 없었고
그래서 형제들이 물어올 때면 매번 바쁘다며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서 몇 번 물어 보다가 이제는 당연히 바쁘겠거니하고
같이 가자는 말을 건네 오지 않으면 또 그것이 서운해서
써지던 글도 안 써지고,
왜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내 앞에서 하고 난리야 자기들끼리 있을 때나 하지라는
괜한 원망까지 올라오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렇게 원초적인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러니 이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인 목마름
하루하루 성사생활과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 하나 붙잡고서
하느님께 영혼의 목마름이 채워질 수 있도록 청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겠다.
.
3) 성경을 읽게 되면 자의적 해석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걱정은 그리 말았으면 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그것 자체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안에서 이미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다.
우리의 성경 읽기라는 것은 우리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시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다면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못 알아들은 건 내 책임이 아니다.
암호처럼 전해 주신 당신 탓이지 내 탓이 아니란 말이다.
그분께서는 대체적으로 내 역사, 내 삶의 방식,
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당신은 말을 건네 오신다.
그러니 아무리 여러분이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 혹은 오류운운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잘못해 보아야 얼마나 잘못할 수 있겠는가.
걱정하지 말아라. 그냥 들리는 대로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
4)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함께 있고 싶고, 같아지고 싶고
그래서 결국은 한 이불을 쓰게 된다.
성경을 밑줄 쳐 가며 읽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하고,
묵상관상을 하는 것에 맛 들이게 되다보면 더 그렇게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단순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믿는 존재가 아니라
(이건 굉장히 추상적이고 어려운 말이다)
대신에 인격적으로 내 삶에서 생생히 말을 걸어오시는하느님을 만나게된다.
사랑은 그런 힘이 있다. 사랑해본 사람은 다 알고 있다.
.
5) 오늘 들은 이 좋은(?) 강의도 딱 사흘이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냥 좋은 강의로 기억될 것이다.
반면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중에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 체험은 온 몸에 깊이깊이 새겨져
평생에 걸쳐 생생하게 내 삶에서 꿈틀될 것이다.
깨달아 새겨진 것들은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