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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본성'과 '본능'에 대한 성찰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본성'과 '본능'에 대한 성찰

해피제제 2020. 4. 11. 10:27

 

"그들은 본성이 아니라 본능을 건든다."

- 극우가 표를 얻는 법

 

막말 정치인들은 의식(world of ego)이 아닌 무의식의 영역(world of id)를 건든다.


본성(nature)이란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써 결코 다다를 수 없지만 그 방향으로 가는 것, 

즉 "하느님 닮은" 모습을 향해 자신을 가꿔나가는(nurture) 성질이다. 

굳이 종교 언어를 쓰지 않더라도 

본성은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도덕과 정의, 연민과 연대라는 열매를 맺는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고민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좀 피곤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신줄 놓아버리면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본능(instinct)은 아주 단순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작동한다. 

그들이 '민중을 개 돼지로 본다'는 것이 농담이 아닌 이유가 

정말로 그들의 막말이 대중의 동물적 '본능'을 건들기 대문이다. 

한국의 극우인사와 트럼프의 막말은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이 아닌 생존에 관련된 파충류 뇌(편도체)를 자극한다. 

"싸움이냐 도망이냐(fight or flight), 잡아먹느냐 잡아먹히느냐(prey or frozen)", 

아주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건든다.


트럼프는 '익숙하지 않은 다름'을 마주할 때 

합리적으로 성찰하는 호의적 소통을 대놓고 무시하고 

그 '다름'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막말로, 

그 '낯섬'에 불안과 공포로 반응하는 '파충류 뇌'의 방어 공격 기제를 자극한다. 

한국의 극우는 안보 불안, 경제 위기 타령으로 

전쟁과 배고픔을 겪은 노인세대의 집단 무의식에 고착된 본능적 불안 두려움 적대감을 건든다.
20세기 지난한 문화투쟁을 거쳐 서구사회에서는 최근에야 

성별, 인종, 종교, 성수소자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이 '상식'으로 정착되었다. 

각자 속마음이야 어쨌건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편견 차별 발언을 했다간 

왕따 정도가 아니라 고소 고발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트럼프는 바로 이 '정치적 올바름'을 대놓고 '위선'이라 공격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차마 꺼내기 힘든 편견과 차별의 언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무의식 밑바닥에 가라앉혀 의식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온갖 금기의 단어들을 과감하게 끌어올려

동물적 반응을 부추긴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단순 반복이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아주 그럴듯한 가짜뉴스로 거짓을 진실처럼 느끼게 불안 두려움의 정서를 부추긴다.


그들은 무식하지 않다. 오히려 대중을 마음을 흔들 줄 아는 아주 똑똑한 이들이다. 

자기들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 머리 굴리는 교활한 선동가들이다. 

비난을 감수하고 온갖 혐오 대결의 언어를 쓰는 것은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욕 먹어도 집중 관심을 받으니까! 

적어도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에 기우는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우도 이를 간파하고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생각할 줄 모르는, 아니 생각하기 싫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이 방법이 잘 먹힌다. 

그들의 막말은 스펀지처럼 아주 잘 흡수된다. 

 

왜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이 극우를 지지하냐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이들이 언제 생각할 여유가 있겠는가? 

장시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데 

어떻게 '자유니 민주니 진보니' 하는 가치들이 비집고 들어가겠는가? 

극우는 여유없는 이들의 '빠듯한' 틈을 노린다. 

쉬운 단어, 혐오와 대결의 언어를 단순하게 반복하며 

'생각할 시간 없는' 일개미들, '생각한 적 없는' 나이 든 노예들의 본능을 사로잡는다.

 

왜 "옳고 그름"은 "좋고 싫음"을 이기지 못할까?
그럼에도 왜 "옳고 그름"을 포기해서는 안되는가?
본성은 어렵게 "옳고 그름"을 헤아리고,
본능은 쉽게 "좋고 싫음"을 갈라버린다.


제발 동물적 '본능'을 건드는 저들의 막말, 가짜뉴스에 흔들리지 말고, 

부디 '생각하고' 행동하는 '본성의 인간'이 되도록 본능이 아닌 본성으로 투표하자고 주변을 설득해보자.

 

- 위의 글은 '예수회 이진현 신부'의 나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