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다 본문
1독서
“임금님께서 우시며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신다.”는 말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그리하여 모든 군사에게 그날의 승리는 슬픔으로 변하였다.
그날 임금이 아들을 두고 마음 아파한다는 소식을 군사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말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단상
예수님은 왜 굳이 회당장의 딸을 직접 일으키시는가?
또 하혈병 걸린 여인을 꼭 집어서 창피를(?) 주시는가?
당신에게서 힘이 빠져나가 치유케 해 주셨다면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둘 것을...
물론 내 관점이다.
이럴 때는 내가 온전히 예수님의 마음에 가깝게 헤아리지 못하고 있음이다.
아니다. 어떤 울림을 주신단들 그 역시 내가 그 수준에 알아들을 수 있는 그만큼이다.
내 삶과 내 앎이 그정도이니 그만큼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수없이 접해 오면서 10대에 들었던 때와 20대에 들었던 때가 다르듯이
매해 다시 듣게 될 때는 또 내게 다른 말을 걸어 오시리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내게 오기까지의 여정과
그 앎이 내 몸에 새겨지는 순간 매해 생명으로 살아 숨 쉰다는 것은
이 과정을 표현하고픈 어느 고백자의 표현일 터이다.
성경의 하혈병 걸린 여인이야 수 없이 만났으니
처음에는 자포자기 하던 여인의 고통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그 애달픔에 함께 눈물 뚝 뚝 흘리더니,
또 예수님께 다가가기 부끄러움 많던 내 모습을 보기도 하고,
언젠가는 평생을 눈물 속에 살아가셨던 어머니의 모습에 그 고통 그대로 전해 받기도 하거니와
오늘은 느닷없이 ‘만나다’ 라는 말에 꽂혀서
‘왜 굳이 그이들의 얼굴을 마주했어야 했는지’ 묻게 되고,
신뢰하고 신뢰 받는 이 사이에,
다시 말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이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와 몸짓과 표정 속에
‘치유’가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하지만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이들에게는 보다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오니
그것을 두렵게도 아프게도 생각말라 보듬아 주시는 눈길이 떠올라
열 두 살 아이도 잠깨듯 다시 깨어나서 음식을 들고
여인도 “딸아, 평안히 가거라” 일생에서 예수님 만남을 가슴 속에 품고 살게 되었으니
꼭 죽음에서 일어나야 그때서야 예수님에게 온갖 호칭 다 가져다 붙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초능력자쯤으로 혹은 하느님의 아들로 온갖 야단법석을 떨든가
아니면 시기질투로 ‘죽여야 한다’ 음모를 꾸미지만
예수님을 ‘만났던’ 회당장이나 하혈하는 여인이야
처음부터 간절하게 믿어 그이들이 바라던 것은 물론 평생을 그 만남 간직하고 살아갈테니
그 차이가 무엇인가 어렴풋이 머물러 보게 된다.
아마도 ‘만남’이 꽃피워준 향기가 아니겠는가!
지금은 여기까지 ‘사랑 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의 만남’에 머물러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