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에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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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2일 성소모임에서 해주신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 내용입니다.
제목: <성경 속의 부르심과 응답>
목차:
1. 들어가는 글
2. 부르심(소명)의 특징과 자리
3. 부르심의 내용...
4. 부르심에 대한 응답 자세
5. 제자직의 대가들/세 가지 훈련
1. 들어가는 글: 제자직에 대한 부르심(소명)은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 안에서 부르심과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부르심이 있고 나서 “그분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훈련시키는지” 보겠습니다.
성경을 먼저 읽어 보면서 설명을 해 보죠.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마르 1,14-15)
이 성경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부르심이란 그분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처음 나오는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셔요. 여기에는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서로 만나고 사귀고 그런 얘기는 없어요. 인간적으로 이런 얘기는 불가능해요. 그분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분이 부를 때 응답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죠. 그런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부르심은 그분의 선택”이라는 거예요. 루카 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리 사귀는 시간이 있어요. 사귀는 시간이 있다가 나중에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예수님께서 부르셔요. 그런데 제일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은 달랐는데, 부르심이라는 것은 정말 일방적으로 그분이 부르신다는 거죠. 우리 편에서는 응답이에요. ‘그분이 부르시고, 나는 응답하고.’
구약에서 부르심 받은 분들 보면 하나같이 그래요. 아모스가 돌무화과 나무를 치다가 갑자기 불림 받아요. 그래 갖구는 예언자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멸시 받는데, 아모스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 “내가 원해서 부름 받은 거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분께서 부르셨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안에 이미 부르심은 있었어요. 세례 받은 그 순간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림 받았죠. 그것을 보통 ‘1차적 부르심’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것인가. 이것을 ‘2차적 부르심’이라 하죠. ‘2차적 부르심’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건데, ‘2차적 부르심’에 가장 대표적인 게 “결혼 성소의 부르심인가, 아니면 수도자, 성직자로서의 부르심인가” - 이렇게 크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럴 때 그분이 나를 어디로 불러주시는가를 보면서 내가 응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편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서. 결혼생활을 하면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건지, 아니면 독신으로서 봉헌된 삶을 사는 사제로 부르시는 건지 - 그 부르심을 식별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부르심이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 수사님들과 함께 그 부르심이 어디인지를 계속해서 식별하는 거죠.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구체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뭐냐하면 그게 바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고 하신 다음에 즉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회개에는 윤리적 차원의 회개도 있어요. 막 살아가는 생을 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회심은 아닙니다. 교부 테르툴리아노는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래요. 이때 회개는 윤리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한다는 의미의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잖아요? 늘 그분의 삶에 연합되어 있도록 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그 부르심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2. 부르심(소명)의 특징과 자리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 그분은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르 1,16-19)
(1) 부르심의 특징: 이름과 함께 보신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선 우리를 보시죠.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대한 대표적인 시가 하나 있는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어린왕자>에도 나오듯이, 수많은 꽃이 있어도, 내가 물을 주지 않는 한, 나하고는 특별한 관계는 없어요. 이 시도 그렇게 이해하면 돼요. 그냥 하나의 흔들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그분이 이름을 불러주면서 비로소 꽃이 돼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분과 우리 사이에 만남이 시작된다는 것이죠.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정말 그분을 깊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나중에 이루어질 거예요. 보통은. 그럴 때 비로소 부르심이, 꽃이 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만하더라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했지만, 정말 나의 신앙생활, 나의 주님은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이십 대 초반에 비로소 처음으로 부모님이 전해 준 신앙이 아닌 나의 신앙이 시작되었던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그분이 나에게 오는 거죠.
(2) 부르심의 자리: 생존을 위해 일하는 자리
그 다음으로, 부르심의 자리는 바로 “삶의 자리”예요. 시몬 베드로가 안드레아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죠. 그 다음에 계속해서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고요.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상태였어요.
부르심이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는 대부분 고통과 버거움과 좌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 중 상당수가 ‘쉽지 않은 삶에 자리’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지각했을 거예요. 물론 평안한 자리에서 부르심을 느낄 수도 있어요. 피정할 때나 성당에서 조배할 때 느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피와 땀이 흐르는 삶의 자리에서죠. 지금 저기, 첫 제자들도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 고기도 낚지 못한 상황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또 다른 한사람 마태오는 세리장이었죠.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배신자로 여겨지는 세리장에게는 그 누구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돈은 좀 벌겠지만 외로움의 자리죠. 그 외로움 속에서 그가, 세금 걷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돼요. 그런가 하면 바르톨로메오는 척박한 삶을 살아야하는 거지였죠. 길바닥에서 구걸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모세의 경우, 이집트의 왕자로 있다가 이제는 이름도 없는 존재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부르심을 받아요. 기드온 같은 경우에는 탈곡기를 숨어서 돌리다가 부르심을 받죠.
그러니까 삶의 자리가 바로 부르심의 자리라는 건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고통과 재난, 아픔과 외로움, 이런 것들이 오히려 부르심을 듣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삶의 고통도 “은총”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를 보면, ‘이름을 불러주시는데’,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부르심의 내용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17).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셔요. ‘어떤 자리로 부르시는가’를 식별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고요. 그런데 어떤 자리에서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든, 그 구조는 두 종류입니다. “내 뒤를 따르시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① 내 뒤를 따르시오.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가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어요. 성직자로서, 수도자로서 산다 해도 똑같아요. 똑같이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첫 번째는 바로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내 뒤”를 따르시오, 했거든요. 그 말은 ‘내 앞에 그분이 있고, 우리는 그분 뒤에 있다.’ 라는 소리예요.
그런데 실제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분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면 우리도 오른쪽, 그분이 왼쪽으로 가면 우리도 왼쪽. 그런데 많은 경우는 안 그래요. 우리가 앞에 서서 그분에게 명령해요.
지난날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우리가 약해서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그분 앞에 서서 우리 뜻대로 고집했을 때일 거예요. 우리 지난날을 생각해 보세요. 삶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우리가 고집을 피면서, 우리 욕심 속에서 우리 욕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 삶은 그분을 안 따라가고 우리가 그분 앞에 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보면, 예수님 뒤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 앞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꾸짖어요.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에 서라.” 라고 하시죠.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 앞이 아니라 뒤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자신의 영광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완강하게 예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운 건데,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에 서라.” 라고 하신 거죠. 하여간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돼요. 우리 모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분 뒤예요.
솔직히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분 뒤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항상 의식해야 돼요. 부르심의 내용이 뭔가? 수도자로서 부르심을 받든, 결혼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똑같다는 거예요. “그분 뒤”에 있는 거예요.
앞서 가는 그분을 우리가 따라가려면, 그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탁이 있어야 돼요. 그분을 믿지 못한다면 따라갈 수 없겠죠.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면 우리도 오른쪽으로 가야합니다. 물론, 그분은 참으로 착하신 목자시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이죠. 그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께 내어맡기는 의탁이 마땅히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못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아직 정화되지 못한 모습들, 그리고 정말 완고하고 완악한 우리의 고집스러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여튼, “내 뒤를 따르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 뒤에 있는 거예요.
※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불교 용어를 쓰면, 예수님 뒤를 따라감에 있어서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가 외형적으로는 달라요.
불교에서 “출가 제자”란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사람들을 이야기해요. “재가 제자”는 부처님을 섬기로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고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죠. 서로 살아가는 양식이 달라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몸뚱어리가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죠. “재가 제자”는 가족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당연히 재물도 소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건 아니죠. 다만 “출가 제자”와는 다른 양식으로 따라가죠. 예수님은 따른다는 점에서는 같아도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는 다릅니다.
②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두 번째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건데요, 이것을 ‘섭리적 부르심’으로 보면 좋겠어요.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그분의 돌보심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섭리’입니다. ‘섭리’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다 그분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양육 받은 것들, 지적인 훈련들, 달란트, 강점들, 특성들, 재주와 재능, 기질들. 이 모든 것들이 다 ‘섭리적 부르심’ 안에 있어요.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고 할 때, 어떤 것이든 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예를 들어 볼게요. 대학생이 되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싶은 친구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기질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굉장히 빨리 피곤해 져요. 아이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기질적으로 좀 조용히 있어야 되는 사람인 거죠. 그런데 주일 하루를 아이들과 함께하면 너무 정신이 없어지고 너무 피곤해져서 다음 날 학교 수업에 들어가서 졸게 돼요. 그런 사람이라면 주일학교 교사는 안 맞을 겁니다. ‘섭리적 부르심’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름답지만,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본당 성가대에는 누구가 들어갈 수 없어요. 음정을 맞출 줄 모르는 사람, 아무리 해도 악보를 전혀 못 읽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성가대에 들어가면 모두가 괴로워질 거예요. 성가 연습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 때문에 진행이 안 되겠죠. 자신도 힘들고 다른 성가대원들도 힘들고...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고 해서, 무조건 어떤 자리든 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이 그대로 수도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수도회마다 카리스마가 다 달라요. 다른 이유가 있고요. 그렇다면, 그 카리스마가 나한테 안 맞으면 그 수도회는 아닌 거겠죠.
예를 들자면,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너무 말이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할 정도예요. 이런 사람이 노인들을 섬기는 수도회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경로회’ 같은 수도회는 의탁할 곳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사는데, 그런 분들을 섬기는 수도자가 말을 한 마디 안 하는 사람이면 거기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도리어 병에 걸릴지도 몰라요.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는 더 짓궂게 하고 장난도 쳐야 하는데, 체질적으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수도회에는 가면 안 되겠죠. 그래서 섭리적인 부르심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회가 어떤 수도회인가, 예수회의 카리스마가 뭔가, 또 예수회의 사도직이 뭔가를 보면서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기질이 어떤가, 달란트는 무엇인가 이런 것도 봐야겠죠. 이것은 “잘났다”, “못났다”의 문제가 아니예요.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고유한 달란트를 주거든요. 그래서 나의 달란트가 뭔지를 봐야 돼요. 그러한 것들은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나를 잘 알고 있는 친한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돼요. 너희들이 봤을 때, 나의 강점들이 뭔지 한 5개만 얘기 좀 해 봐라. 아니면,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기뻤는지, 어떤 일을 할 때 늘 마음도 평안하고 보람도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 “섭리적 부르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즉시 적용해 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굉장히 사교적이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할 때는 힘이 더 나요. 기도를 해도 공동기도를 할 때 힘이 더 나요. 봉사도 함께하면 즐겁고요. 그런 사람이 관상봉쇄수도원에 들어가면, 결국은 정신과 병원에 가야될 거예요. 완전히 혼자서 사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는 거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기왕이면 봉쇄 수도회가 더 멋있지.” 또는 “기왕이면 활동수도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아니예요. 섭리적 부르심 안에서 내가 거기에 맞는가를 봐야죠. 그래서 이런 부분들도 신부님과 수사님과 면담하면서 식별을 해야 될 거예요. 아까 예를 든 경우들처럼, 정말로 아니라면 뚜렷한 거예요.
지금까지 그분의 부르심을 봤어요. “내 뒤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분이 ‘우리 이름’을 부르셔요. 그리고 ‘따르라’고 이야기하시는데, ‘섭리적 차원’에서 부르시죠. 그러면 이제 우리편에서의 응답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4. 부르심에 대한 응답 자세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르 1,18).
그분이 선뜻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섰다(마르 1,20).
그분이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에 부르시는지가 식별이 되고 난 다음에는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① 즉시 응답하는 거예요. 기쁘게. ② 그리고 그물을 버려두는 것이구요. ③ 그 다음에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하나, 하나 설명하죠.
① ‘즉시’
이 부르심은 군대 영장 소집은 아니예요. 군대 영장에 응답을 안 하면 영창에 갑니다. 강제성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강제성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답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이런 건 없습니다. 때가 돼서 부르심에 응답을 안 하면, 그분이 또 다시 다른 양식에서 다른 시간에 또 불러주실 겁니다. 그분의 바람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충만되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또 다른 시간에 또 불러주실 겁니다. 아무튼 그분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편에서는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기쁘게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거예요. 즉시.
예전에 저도 성소담당을 맡은 적이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만나면서 면담도 하고 피정도 여러 번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서로 양쪽 간에서 식별을 하기 위해서 다섯 신부님 및 관구장 신부님과 면담도 다 하고 나면 최종 결정이 내려져요. 최종적으로 입회가 허락되면 보통 2월 달에 입회하라는 연락이 갑니다. 식별의 기간을 오랜 시간 거쳤고, 수도회에서도 담당 신부님과 수사님들 물론이고, 다른 신부님들까지 다섯 분을 만난 상태에서, 부르심이 있다고 봐서 오라고 했구요, 본인 입장에선, 더 그전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확실한 거잖아요. 이제 “마음만 갖고 몇월 며칠 날 오십시오.” 하면 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입회식날이면 꼭 한두 명은 안 나타나요. 그렇게 신중하게 식별과정을 거쳤는데도 안 들어와요. 그러면 제가 전화합니다. “왜 안 들어왔습니까?” 그러면은요, 예를 들어서, “청년회에서 환송식 하다가 자매하고 친해져서 그냥 결혼식하기로 했다”고... 그러면요, 정말 황당해요. 장난도 아니고... 제가 한 게 아니라 본인 자신이 젊은 날 몇 년 동안 심사숙고하고 이런 모임까지 들어왔거든요. 그 긴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입회 날짜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환송식 때, 그렇게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됐을까요?
소설가 은희경씨 글 가운데, 친구 하나가 세상만사 모든 게 허무하다고 생각을 해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려고 강원도의 어떤 절에 가는 시외버스를 타요. 근데 바로 옆에 군인이 앉았어요. 그 석 달 뒤에 결혼했어요. 그 군인 제대하고 나서.
여기 계신 형제들 중에 여러 사람이 내년 2월에 입회하게 되겠죠. 입회 허락을 받고 나면, 유혹이 강렬하게 올 겁니다. 제가 좀 전에 왜 그렇게 허망하게 그렇게 연애에 빠지게 되는가 했지만, 사실은 유혹일 거예요. 어둠의 세력의 유혹일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를 봐도 그래요. 제가 입회하기로 한 날이 2월 25일이었는데, 아침부터 공포가 밀려오는데,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더라고요. 2시까지 입회하라고 그랬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도저히 입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감이 오더라고요. 어둠의 세력이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럴 때는 즉시 신부님이나 수사님한테 전화하세요. 그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 어둠의 세력이 조장하고자 하는 불순한 세력은 그 순간 사라집니다. 아마 그런 것들일 거예요. 그래서 특별히 입회 날짜를 받아놓고 나서는 그 유혹의 세력, 유혹이 내 안에서 오기보다도 밖에서 어둠의 세력을 통해서 온다고 저는 봐요.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 특별히 깨어있어야 될 것 같고요.
부르심에 대해서 확신하고 나면 주저하고 딴 것을 볼 수 없다. 어둠의 세력이 유혹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더 깨어있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신부님, 수사님한테 얘기만 하면 즉시 사라져버려요. 그런 유혹들은.
② ‘그물을 버려두고’ / ‘모든 것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그물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배에다가 남겨두고, 삯꾼을 남겨두고, 쉽게 얘기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의 경우가 다릅니다.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요, “재자 제자”는 정신적 차원에서 무질서한 애착만 버리면 돼요. “재가 제자”는 그물을 버리듯 직장을 버리고 그런 건은 아녜요. 예수님보다 그것을 더 움켜쥐지만 않으면 돼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출가 제자”와 “재가 제가”의 경우 각각 다르게 해석돼요.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걸 다 버려야 돼요. 하지만 “재가 제자”는 달라요. 예수님이 공생활 하시는 동안 소수의 사람들만 “출가 제자”로 불림을 받았어요. 대다수는 “재가 제자”였어요. 그래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나 니코데모는 당시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에요.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서 지위와 권력과 부를 가졌지만 예수님의 제자예요.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도 다 “재가 제자”예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정말 그분의 제자라면 다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재가 제자”지 “출가 제자”는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에 하느님이 여러분을 “출가 제자”로 불렀다면, 당연히 문자 그대로 버려야죠. 당연히.
③ ‘주님의 뒤를 따라감’
세 번째 부르심의 응답은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아까도 이미 봤어요. 그분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분 앞에 서서 앞장설 수는 없어요.
5. 제자직의 대가들/세 가지 훈련
일단 응답을 하고 나면, 그분이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크게 세 가지 훈련을 시켜요. “제자직의 대가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가라는 표현도 쓰고 훈련이라는 표현도 써요. 그분의 제자로서의 훈련, 이렇게 바꿔도 되고요.
대가라는 표현도 쓰고, 훈련이라는 표현도 쓴다고 하는데, 훈련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몰라요. 제자라는 말의 희랍어 단어는 ‘훈련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우리말로 ‘제자’라고 하면 의미 전달이 안 되는데, 영어로는 의미전달이 돼요. 제자를 “disciple”이라고 하죠? 똑같은 어근에서 나온 “discipline”이라는 단어도 기억하시죠? 우리는 제자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훈련 받는 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훈련 받는 자”로서 불림을 받아요. 그분이 우리를 훈련시켜요. 평생 양성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① 가족의 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세 가지 훈련 가운데 첫 번째가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꼭 혈육만을 가리킬 필요는 없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에게 귀중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훈련이죠. 아무리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하다 해도, 예수님보다 소중해서는 안 돼요. 이것은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한 십년 전에 서강대학교에서 큰 일이 벌어졌어요. 입학처장이 자기 아들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준 일이 감사에서 걸렸어요. 입학처장은 감옥에 갔고, 당시 총장은 사표를 내야 했죠. 그 입학처장이 왜 시험문제를 빼돌려서 아들에게 줬을까요? 아들이 공부를 잘 못하는데, 아버지 된 심정에서 아들이 그래도 좋은 대학에 들어오길 바란 거죠. 자신이 서강대학교의 입학처장이니까, 서강대 입학 문제를 빼준 거죠. 그런데 이 아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백점 만점에 백점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 중에 이 아들보다 훨씬 공부를 잘 하지만 서강대 떨어진 애들이 투서를 썼어요. “뭐가 있다. 나는 떨어졌는데, 진짜 붙을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애는 붙었다.” 그래서 감사가 들어와서 걸린 거예요.
근데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예요?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무질서한 애착에서 끈을 끊으라고 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에게 부르심을 받은 누구에게나 해당 돼요. 아들이 아무리 귀하지만 예수님보다 귀할 수는 없어요.
예수님은 결코 “아들을 위해서 시험문제를 빼돌리라”고 하시 않으셨죠. 그런데 무질서한 사랑 속에서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가 이 사람은 결국 인생을 망쳤어요. 예일대 출신의 뛰어난 경제학자였던 사람이 인간 다 망가졌어요. 결국은 그렇게 돼요. 그분이 우리에게 뭘 요구할 때는 절대로 당신을 위해서 요구하는 적은 없어요.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요구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군가를 아끼죠. 그게 부모, 형제, 친구, 애인... 다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게 예수님보다 귀하게 되면 안 되죠.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C.S.루이스란 사람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소중한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 시간문제예요. 얼마 안 가서 그 소중한 사람을 우리는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돼요. 하지만, 우리가 그 소중한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히 여기면 그 소중한 사람은 영원토록 소중히 여기게 돼요. 그러니까, 첫 번째 사랑이 항상 첫 번째여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보다 다른 무엇이 첫 번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얘기예요. 더구나 수도자, 성직자로서 불림을 받은 사람에게 가족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그분의 사제로서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되는데, 내가 엄마든 누구든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죠. 제가 그 얘기하는 거예요.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카 14,26)
여기서 ‘미워한다’ 라는 게 문자 그대로 미워하는 거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비교급을 잘 쓰지 않고 이런 식으로 써요.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거예요. 미워한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을 말씀하실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를 베풀러 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된 사람이 제 아버지를 거스르고 딸이 제 어머니를 거르스고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스르도록 갈라놓으러 왔습니다. 각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 식구들일 것입니다.”(마태 10,34-36)
예, 이것조차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절대 안 돼요. 우리가 진리 추구의 삶을 살아갈 때, 즉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보다 나의 가족이나 이런 데 무질서하게 사로잡힐 수는 없다는 거예요. 또 다른 방향에서, 내가 그렇게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방해 역할을 하면,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표현들은 굉장히 과격하지만 그런 식의 표현이에요. 그분의 부르심이 확실한데, 아버지가 붙들고 놓지를 않아요. 그럴 때 문자 그대로 아버지가 원수예요. 예수님 때문에 생겨난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응답해야죠.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의 이야기
우리 예수회 안에 알로이시오 곤자가(1569-1591)라는 젊은 성인이 있어요. 곤자가는 이태리 북부 지역의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통치자가 될 겁니다. 그런데 굉장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열다섯 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응답하기로 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가서 예수회에 들어가겠다고 얘기를 해요.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죠. 아버지는 이 아들이 자기 뒤를 이어서 통치자가 되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시키기 위해서 아들과 함께 온갖 향연장과 여행도 하고요. 그래도 안 되니까, 이 아들의 뜻이 분명하니까, 열일곱 살 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돼요. 왜냐면은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장남이 장자권을 버리고 수도회에 갈 수는 없단 말이에요. 장자권이 차남한테 넘어가려면 황제가 허락을 줘야 돼요. 그래서 이 아버지 생각에는 황제가 허락을 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황제를 만났는데, 황제는 알로이시오 곤자가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니까 허락을 줍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차남한테 물려줍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애착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수도회에 내놓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허락까지 받은 상태에서도 수도원에 못 들어가게 되니까 세월이 계속 흘러가게 된 거죠. 어느 날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충격 요법을 써요. 아버지와 약속도 되어 있지 않는데, 아버지 방에 노크를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바마마 이렇게 부르는 옛날인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통치자를 만나러 가는 건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것은 상당한 결례죠. 충격요법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한테 가서 방문을 두드리고는 문 열고 들어가서 대뜸 아버지한테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난 4년 전부터 나를 부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계속 인간적인 애착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에 대한 효심 때문에 아버님의 뜻을 거역하진 않지만, 지금 아버지는 하느님의 뜻을 4년째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가 버려요.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몰라요. 아버지가 엉엉 울어요. 두 시간 동안 통곡을 해요. 그리고는 허락을 줘요. 그래서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열여덟 살에 예수회 입회를 합니다.
지금 이 성경 구절이 그런 내용이에요. 이걸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무조건 가족 사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돼야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를 앞에 두고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에서 올 수도 있어요. 내 안에서 무질서하게 그들을 붙들 수도 있고요. 내 밖에서, 가족들에게서 올 수도 있고요. 그게 뭐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첫 번째라는, 지금 그 얘기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입회 결정이 나고 나서 예수회 들어오기 위해서 굉장히 힘겨운 시간 보낼 거예요. 매일 같이 엄마가 울고 기절하고, 아버지가 화를 내고... 그런 경우가 있을 거예요. 꼭 한 두 명씩 있거든요. 일단 그 길이 분명하면 그걸 다 견뎌내야 돼요. 견뎌내고 나면, 여러분들 입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신앙 없던 아버지가 신자가 돼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좀 지나면 여러분들이 수도생활 그만두고 나올까봐 오히려 안달하며 기도할 거예요. 바뀌어버린 거예요. 근데 아무튼 시련의 시간이 있을 거예요. 특히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② 자기를 버리고
두 번째는 너무 당연한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요. 그분의 뜻이, 우리 뜻이 아니고 그분의 뜻이 우리를 인도해요. 그런데 내가 내 뜻이 앞서면 어떻게 돼요? 그분을 따라갈 수 없죠. 여기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내 뜻을 버린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내 뜻은 정말 온전한, 올곧은, 올바른 내 뜻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욕심들, 욕망들, 무질서한 경향들, 어둠 속에서 나오는 내 뜻을 말합니다. 그 뜻 때문에 예수님 뜻을 안 따라가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 훈련은 끊임없이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을 버리는 훈련이에요.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들, 내 고집들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린다는 거죠. 예수님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을 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그분을 따라갈 수 있어요.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는데 내가 왼쪽을 고집하면 따라갈 수 없지요.
우리 안에 옛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약속 받았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문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은총 속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 우리 안에 옛사람은 그대로 있어요. 이 옛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죠. 이 옛사람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모습들, 욕심들, 무질서한 경향들, 그리고 또 그분이 원하지 않는 그런 나의 뜻, 행동 양식이죠. 그래서 우리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돼요. 옛사람은 나한테 있어요. 새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인품을 가져야 돼요. 이게 회심이에요. 그래서 또한 자기 부정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의 뜻에 충돌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 때 제2의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라는 거예요. 죽는 날까지. 이것은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③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하늘나라 건설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거거든요. 당시 로마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애정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2천 년 전의 십자가는 단두대예요, 단두대. 그래서 죽는 거예요. 매일 같이.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루카 9,23)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 라는 말은 매일 매일 순교하는 것이죠. 매일 순교한다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 해요. 우리 순교 선열들은 피를 흘리면서 죽었잖아요. 피는 붉은 색이죠. 그래서 “적색 순교”죠. 오늘날 실제로 “적색 순교”를 하는 분들은 없을 거예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에는 없을 거 같아요. 또, 모르죠. 나중에 예수회 들어오고 나서 아프리카 같은 곳에 파견됐다가 거기서 죽을 수는 있겠죠. 그러면 영광이겠죠. 왜냐하면 “적색 순교”보다 “백색 순교”가 더 힘들어요. 이 “적색 순교”는 그 죽음의 상황에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힘을 주시거든요. “백색 순교”는 참으로 인내를 요구해요. 하루하루를 살면서 그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분 때문에.
내 안에 있는 ‘무질서한 경향’, ‘옛사람’ 이런 것과 상관 없이,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죽으라는 거예요. 매일 같이. 그 훈련이에요. “백색 순교”는 훈련이에요. 우리가 다 바쁘잖아요. 바쁘기 때문에 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죠. 오죽하면 순교라는 말을 쓰겠어요. 그래도 마련하는 거. 그게 “백색 순교”예요. 그분과의 그 귀한 만남을 위해서, 절대 고독 속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서, 내가 굉장히 바쁘지만 그래도 따로 시간을 내서 조배하는 거. 그게 “백색 순교”예요.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다들 이렇게 하고 있다면 “백색 순교”라고 하지 않겠죠. 제가 감히 판단하지만, 많이들 안 하고 있을 걸요. 이렇게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는 여정 중에 있으면서 매일 같이 따로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가. 많이 안 할 겁니다. 옛날 제가 성소 책임자 역할 할 때, 성소자들과 한 달에 한번씩 면담하면서 보면 기도생활이 없어요. 놀라워요. 바빠서 없는데, “백색 순교”를 한다면 기도생활이 없을 수가 없죠.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 즉 기도시간을 항상 제일 먼저 소중하게 여긴다면. 근데 “백색 순교”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게 그 정도로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는 마련 안 하거든요.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우리가 정말 죽음의 행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했는데 정말 응답하고 싶지 않아요. 또 내가 아니면 도와줄 수도 없어요. 그럴 때 그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내가 응답하는 거. “백색 순교”일 수 있어요. “백색 순교”의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게 “백색 순교”예요. 그래서 하루를 살 때에도 정말 무슨 일을 하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는 것. 그게 “백색 순교”라 할 수 있어요.
제목: <성경 속의 부르심과 응답>
목차:
1. 들어가는 글
2. 부르심(소명)의 특징과 자리
3. 부르심의 내용...
4. 부르심에 대한 응답 자세
5. 제자직의 대가들/세 가지 훈련
1. 들어가는 글: 제자직에 대한 부르심(소명)은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 안에서 부르심과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부르심이 있고 나서 “그분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훈련시키는지” 보겠습니다.
성경을 먼저 읽어 보면서 설명을 해 보죠.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마르 1,14-15)
이 성경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부르심이란 그분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에 처음 나오는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셔요. 여기에는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과 서로 만나고 사귀고 그런 얘기는 없어요. 인간적으로 이런 얘기는 불가능해요. 그분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분이 부를 때 응답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죠. 그런데 이렇게 표현한 것은 “부르심은 그분의 선택”이라는 거예요. 루카 복음이나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미리 사귀는 시간이 있어요. 사귀는 시간이 있다가 나중에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예수님께서 부르셔요. 그런데 제일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은 달랐는데, 부르심이라는 것은 정말 일방적으로 그분이 부르신다는 거죠. 우리 편에서는 응답이에요. ‘그분이 부르시고, 나는 응답하고.’
구약에서 부르심 받은 분들 보면 하나같이 그래요. 아모스가 돌무화과 나무를 치다가 갑자기 불림 받아요. 그래 갖구는 예언자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멸시 받는데, 아모스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 “내가 원해서 부름 받은 거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분께서 부르셨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안에 이미 부르심은 있었어요. 세례 받은 그 순간에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림 받았죠. 그것을 보통 ‘1차적 부르심’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것인가. 이것을 ‘2차적 부르심’이라 하죠. ‘2차적 부르심’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건데, ‘2차적 부르심’에 가장 대표적인 게 “결혼 성소의 부르심인가, 아니면 수도자, 성직자로서의 부르심인가” - 이렇게 크게 이야기할 수 있죠.
그럴 때 그분이 나를 어디로 불러주시는가를 보면서 내가 응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편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면서. 결혼생활을 하면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건지, 아니면 독신으로서 봉헌된 삶을 사는 사제로 부르시는 건지 - 그 부르심을 식별하고 거기에 응답하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부르심이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님, 수사님들과 함께 그 부르심이 어디인지를 계속해서 식별하는 거죠.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구체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뭐냐하면 그게 바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고 하신 다음에 즉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회개에는 윤리적 차원의 회개도 있어요. 막 살아가는 생을 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궁극적인 회심은 아닙니다. 교부 테르툴리아노는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래요. 이때 회개는 윤리적인 회개가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에 끊임없이 응답한다는 의미의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 마음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잖아요? 늘 그분의 삶에 연합되어 있도록 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그 부르심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2. 부르심(소명)의 특징과 자리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 그분은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르 1,16-19)
(1) 부르심의 특징: 이름과 함께 보신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선 우리를 보시죠.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에 대한 대표적인 시가 하나 있는데,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어린왕자>에도 나오듯이, 수많은 꽃이 있어도, 내가 물을 주지 않는 한, 나하고는 특별한 관계는 없어요. 이 시도 그렇게 이해하면 돼요. 그냥 하나의 흔들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그분이 이름을 불러주면서 비로소 꽃이 돼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분과 우리 사이에 만남이 시작된다는 것이죠.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정말 그분을 깊이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나중에 이루어질 거예요. 보통은. 그럴 때 비로소 부르심이, 꽃이 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만하더라도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했지만, 정말 나의 신앙생활, 나의 주님은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이십 대 초반에 비로소 처음으로 부모님이 전해 준 신앙이 아닌 나의 신앙이 시작되었던 거 같아요. 구체적으로 그분이 나에게 오는 거죠.
(2) 부르심의 자리: 생존을 위해 일하는 자리
그 다음으로, 부르심의 자리는 바로 “삶의 자리”예요. 시몬 베드로가 안드레아가 그물을 던지고 있었죠. 그 다음에 계속해서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고요.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상태였어요.
부르심이 이루어지는 삶의 자리는 대부분 고통과 버거움과 좌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들 중 상당수가 ‘쉽지 않은 삶에 자리’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지각했을 거예요. 물론 평안한 자리에서 부르심을 느낄 수도 있어요. 피정할 때나 성당에서 조배할 때 느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피와 땀이 흐르는 삶의 자리에서죠. 지금 저기, 첫 제자들도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 고기도 낚지 못한 상황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열 두 제자 가운데 또 다른 한사람 마태오는 세리장이었죠.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배신자로 여겨지는 세리장에게는 그 누구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돈은 좀 벌겠지만 외로움의 자리죠. 그 외로움 속에서 그가, 세금 걷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돼요. 그런가 하면 바르톨로메오는 척박한 삶을 살아야하는 거지였죠. 길바닥에서 구걸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모세의 경우, 이집트의 왕자로 있다가 이제는 이름도 없는 존재가 되어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부르심을 받아요. 기드온 같은 경우에는 탈곡기를 숨어서 돌리다가 부르심을 받죠.
그러니까 삶의 자리가 바로 부르심의 자리라는 건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고통과 재난, 아픔과 외로움, 이런 것들이 오히려 부르심을 듣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삶의 고통도 “은총”이라고 볼 수 있겠고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를 보면, ‘이름을 불러주시는데’, 그것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부르심의 내용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17).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셔요. ‘어떤 자리로 부르시는가’를 식별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고요. 그런데 어떤 자리에서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받든, 그 구조는 두 종류입니다. “내 뒤를 따르시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① 내 뒤를 따르시오.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우리가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어요. 성직자로서, 수도자로서 산다 해도 똑같아요. 똑같이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첫 번째는 바로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내 뒤”를 따르시오, 했거든요. 그 말은 ‘내 앞에 그분이 있고, 우리는 그분 뒤에 있다.’ 라는 소리예요.
그런데 실제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있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분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면 우리도 오른쪽, 그분이 왼쪽으로 가면 우리도 왼쪽. 그런데 많은 경우는 안 그래요. 우리가 앞에 서서 그분에게 명령해요.
지난날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우리가 약해서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그분 앞에 서서 우리 뜻대로 고집했을 때일 거예요. 우리 지난날을 생각해 보세요. 삶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우리가 고집을 피면서, 우리 욕심 속에서 우리 욕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 삶은 그분을 안 따라가고 우리가 그분 앞에 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보면, 예수님 뒤를 따르지 않고 예수님 앞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어야 한다고 했을 때, 예수님을 붙잡고 절대로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 꾸짖어요.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에 서라.” 라고 하시죠.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 앞이 아니라 뒤라는 거예요. 베드로는 스승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자신의 영광이 사라진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완강하게 예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운 건데,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에 서라.” 라고 하신 거죠. 하여간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그분을 따라가야 돼요. 우리 모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분 뒤예요.
솔직히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그분 뒤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항상 의식해야 돼요. 부르심의 내용이 뭔가? 수도자로서 부르심을 받든, 결혼 성소로 부르심을 받든 똑같다는 거예요. “그분 뒤”에 있는 거예요.
앞서 가는 그분을 우리가 따라가려면, 그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의탁이 있어야 돼요. 그분을 믿지 못한다면 따라갈 수 없겠죠.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면 우리도 오른쪽으로 가야합니다. 물론, 그분은 참으로 착하신 목자시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이죠. 그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분께 내어맡기는 의탁이 마땅히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못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아직 정화되지 못한 모습들, 그리고 정말 완고하고 완악한 우리의 고집스러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여튼, “내 뒤를 따르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 뒤에 있는 거예요.
※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불교 용어를 쓰면, 예수님 뒤를 따라감에 있어서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가 외형적으로는 달라요.
불교에서 “출가 제자”란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 사람들을 이야기해요. “재가 제자”는 부처님을 섬기로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고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죠. 서로 살아가는 양식이 달라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가지만,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몸뚱어리가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거죠. “재가 제자”는 가족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살아가며, 당연히 재물도 소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건 아니죠. 다만 “출가 제자”와는 다른 양식으로 따라가죠. 예수님은 따른다는 점에서는 같아도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는 다릅니다.
②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두 번째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건데요, 이것을 ‘섭리적 부르심’으로 보면 좋겠어요.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그분의 돌보심을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섭리’입니다. ‘섭리’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다 그분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양육 받은 것들, 지적인 훈련들, 달란트, 강점들, 특성들, 재주와 재능, 기질들. 이 모든 것들이 다 ‘섭리적 부르심’ 안에 있어요.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고 할 때, 어떤 것이든 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예요.
예를 들어 볼게요. 대학생이 되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싶은 친구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기질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굉장히 빨리 피곤해 져요. 아이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기질적으로 좀 조용히 있어야 되는 사람인 거죠. 그런데 주일 하루를 아이들과 함께하면 너무 정신이 없어지고 너무 피곤해져서 다음 날 학교 수업에 들어가서 졸게 돼요. 그런 사람이라면 주일학교 교사는 안 맞을 겁니다. ‘섭리적 부르심’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름답지만,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본당 성가대에는 누구가 들어갈 수 없어요. 음정을 맞출 줄 모르는 사람, 아무리 해도 악보를 전혀 못 읽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성가대에 들어가면 모두가 괴로워질 거예요. 성가 연습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 때문에 진행이 안 되겠죠. 자신도 힘들고 다른 성가대원들도 힘들고...
우리가 그분을 섬긴다고 해서, 무조건 어떤 자리든 가도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이 그대로 수도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수도회마다 카리스마가 다 달라요. 다른 이유가 있고요. 그렇다면, 그 카리스마가 나한테 안 맞으면 그 수도회는 아닌 거겠죠.
예를 들자면, 천성적으로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너무 말이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을 할 정도예요. 이런 사람이 노인들을 섬기는 수도회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경로회’ 같은 수도회는 의탁할 곳이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사는데, 그런 분들을 섬기는 수도자가 말을 한 마디 안 하는 사람이면 거기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도리어 병에 걸릴지도 몰라요.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는 더 짓궂게 하고 장난도 쳐야 하는데, 체질적으로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수도회에는 가면 안 되겠죠. 그래서 섭리적인 부르심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회가 어떤 수도회인가, 예수회의 카리스마가 뭔가, 또 예수회의 사도직이 뭔가를 보면서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기질이 어떤가, 달란트는 무엇인가 이런 것도 봐야겠죠. 이것은 “잘났다”, “못났다”의 문제가 아니예요.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고유한 달란트를 주거든요. 그래서 나의 달란트가 뭔지를 봐야 돼요. 그러한 것들은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나를 잘 알고 있는 친한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돼요. 너희들이 봤을 때, 나의 강점들이 뭔지 한 5개만 얘기 좀 해 봐라. 아니면,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기뻤는지, 어떤 일을 할 때 늘 마음도 평안하고 보람도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이 “섭리적 부르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면 즉시 적용해 볼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굉장히 사교적이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할 때는 힘이 더 나요. 기도를 해도 공동기도를 할 때 힘이 더 나요. 봉사도 함께하면 즐겁고요. 그런 사람이 관상봉쇄수도원에 들어가면, 결국은 정신과 병원에 가야될 거예요. 완전히 혼자서 사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는 거죠.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기왕이면 봉쇄 수도회가 더 멋있지.” 또는 “기왕이면 활동수도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아니예요. 섭리적 부르심 안에서 내가 거기에 맞는가를 봐야죠. 그래서 이런 부분들도 신부님과 수사님과 면담하면서 식별을 해야 될 거예요. 아까 예를 든 경우들처럼, 정말로 아니라면 뚜렷한 거예요.
지금까지 그분의 부르심을 봤어요. “내 뒤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분이 ‘우리 이름’을 부르셔요. 그리고 ‘따르라’고 이야기하시는데, ‘섭리적 차원’에서 부르시죠. 그러면 이제 우리편에서의 응답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4. 부르심에 대한 응답 자세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르 1,18).
그분이 선뜻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섰다(마르 1,20).
그분이 우리를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에 부르시는지가 식별이 되고 난 다음에는 이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① 즉시 응답하는 거예요. 기쁘게. ② 그리고 그물을 버려두는 것이구요. ③ 그 다음에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하나, 하나 설명하죠.
① ‘즉시’
이 부르심은 군대 영장 소집은 아니예요. 군대 영장에 응답을 안 하면 영창에 갑니다. 강제성을 갖고 있죠.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강제성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르심에 응답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이런 건 없습니다. 때가 돼서 부르심에 응답을 안 하면, 그분이 또 다시 다른 양식에서 다른 시간에 또 불러주실 겁니다. 그분의 바람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충만되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준비가 안 돼 있으면, 또 다른 시간에 또 불러주실 겁니다. 아무튼 그분의 부르심이 있을 때, 우리편에서는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기쁘게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거예요. 즉시.
예전에 저도 성소담당을 맡은 적이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만나면서 면담도 하고 피정도 여러 번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서로 양쪽 간에서 식별을 하기 위해서 다섯 신부님 및 관구장 신부님과 면담도 다 하고 나면 최종 결정이 내려져요. 최종적으로 입회가 허락되면 보통 2월 달에 입회하라는 연락이 갑니다. 식별의 기간을 오랜 시간 거쳤고, 수도회에서도 담당 신부님과 수사님들 물론이고, 다른 신부님들까지 다섯 분을 만난 상태에서, 부르심이 있다고 봐서 오라고 했구요, 본인 입장에선, 더 그전부터 준비했기 때문에, 확실한 거잖아요. 이제 “마음만 갖고 몇월 며칠 날 오십시오.” 하면 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입회식날이면 꼭 한두 명은 안 나타나요. 그렇게 신중하게 식별과정을 거쳤는데도 안 들어와요. 그러면 제가 전화합니다. “왜 안 들어왔습니까?” 그러면은요, 예를 들어서, “청년회에서 환송식 하다가 자매하고 친해져서 그냥 결혼식하기로 했다”고... 그러면요, 정말 황당해요. 장난도 아니고... 제가 한 게 아니라 본인 자신이 젊은 날 몇 년 동안 심사숙고하고 이런 모임까지 들어왔거든요. 그 긴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입회 날짜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환송식 때, 그렇게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됐을까요?
소설가 은희경씨 글 가운데, 친구 하나가 세상만사 모든 게 허무하다고 생각을 해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려고 강원도의 어떤 절에 가는 시외버스를 타요. 근데 바로 옆에 군인이 앉았어요. 그 석 달 뒤에 결혼했어요. 그 군인 제대하고 나서.
여기 계신 형제들 중에 여러 사람이 내년 2월에 입회하게 되겠죠. 입회 허락을 받고 나면, 유혹이 강렬하게 올 겁니다. 제가 좀 전에 왜 그렇게 허망하게 그렇게 연애에 빠지게 되는가 했지만, 사실은 유혹일 거예요. 어둠의 세력의 유혹일 거예요. 개인적으로 저를 봐도 그래요. 제가 입회하기로 한 날이 2월 25일이었는데, 아침부터 공포가 밀려오는데,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더라고요. 2시까지 입회하라고 그랬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도저히 입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감이 오더라고요. 어둠의 세력이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럴 때는 즉시 신부님이나 수사님한테 전화하세요. 그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 어둠의 세력이 조장하고자 하는 불순한 세력은 그 순간 사라집니다. 아마 그런 것들일 거예요. 그래서 특별히 입회 날짜를 받아놓고 나서는 그 유혹의 세력, 유혹이 내 안에서 오기보다도 밖에서 어둠의 세력을 통해서 온다고 저는 봐요. 그러기 때문에 그럴 때 특별히 깨어있어야 될 것 같고요.
부르심에 대해서 확신하고 나면 주저하고 딴 것을 볼 수 없다. 어둠의 세력이 유혹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더 깨어있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신부님, 수사님한테 얘기만 하면 즉시 사라져버려요. 그런 유혹들은.
② ‘그물을 버려두고’ / ‘모든 것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그물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배에다가 남겨두고, 삯꾼을 남겨두고, 쉽게 얘기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섭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출가 제자”와 “재가 제자”의 경우가 다릅니다.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요, “재자 제자”는 정신적 차원에서 무질서한 애착만 버리면 돼요. “재가 제자”는 그물을 버리듯 직장을 버리고 그런 건은 아녜요. 예수님보다 그것을 더 움켜쥐지만 않으면 돼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출가 제자”와 “재가 제가”의 경우 각각 다르게 해석돼요. “출가 제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걸 다 버려야 돼요. 하지만 “재가 제자”는 달라요. 예수님이 공생활 하시는 동안 소수의 사람들만 “출가 제자”로 불림을 받았어요. 대다수는 “재가 제자”였어요. 그래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나 니코데모는 당시로 말하면 국회의원이에요.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서 지위와 권력과 부를 가졌지만 예수님의 제자예요.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도 다 “재가 제자”예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정말 그분의 제자라면 다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재가 제자”지 “출가 제자”는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에 하느님이 여러분을 “출가 제자”로 불렀다면, 당연히 문자 그대로 버려야죠. 당연히.
③ ‘주님의 뒤를 따라감’
세 번째 부르심의 응답은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분을 따라가는 것은 아까도 이미 봤어요. 그분을 따라가면서 내가 그분 앞에 서서 앞장설 수는 없어요.
5. 제자직의 대가들/세 가지 훈련
일단 응답을 하고 나면, 그분이 우리를 훈련시킵니다. 크게 세 가지 훈련을 시켜요. “제자직의 대가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가라는 표현도 쓰고 훈련이라는 표현도 써요. 그분의 제자로서의 훈련, 이렇게 바꿔도 되고요.
대가라는 표현도 쓰고, 훈련이라는 표현도 쓴다고 하는데, 훈련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몰라요. 제자라는 말의 희랍어 단어는 ‘훈련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우리말로 ‘제자’라고 하면 의미 전달이 안 되는데, 영어로는 의미전달이 돼요. 제자를 “disciple”이라고 하죠? 똑같은 어근에서 나온 “discipline”이라는 단어도 기억하시죠? 우리는 제자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훈련 받는 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훈련 받는 자”로서 불림을 받아요. 그분이 우리를 훈련시켜요. 평생 양성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① 가족의 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세 가지 훈련 가운데 첫 번째가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꼭 혈육만을 가리킬 필요는 없어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 나에게 귀중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훈련이죠. 아무리 그 사람이 나에게 소중하다 해도, 예수님보다 소중해서는 안 돼요. 이것은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한 십년 전에 서강대학교에서 큰 일이 벌어졌어요. 입학처장이 자기 아들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준 일이 감사에서 걸렸어요. 입학처장은 감옥에 갔고, 당시 총장은 사표를 내야 했죠. 그 입학처장이 왜 시험문제를 빼돌려서 아들에게 줬을까요? 아들이 공부를 잘 못하는데, 아버지 된 심정에서 아들이 그래도 좋은 대학에 들어오길 바란 거죠. 자신이 서강대학교의 입학처장이니까, 서강대 입학 문제를 빼준 거죠. 그런데 이 아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백점 만점에 백점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 중에 이 아들보다 훨씬 공부를 잘 하지만 서강대 떨어진 애들이 투서를 썼어요. “뭐가 있다. 나는 떨어졌는데, 진짜 붙을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애는 붙었다.” 그래서 감사가 들어와서 걸린 거예요.
근데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예요?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무질서한 애착에서 끈을 끊으라고 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에게 부르심을 받은 누구에게나 해당 돼요. 아들이 아무리 귀하지만 예수님보다 귀할 수는 없어요.
예수님은 결코 “아들을 위해서 시험문제를 빼돌리라”고 하시 않으셨죠. 그런데 무질서한 사랑 속에서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가 이 사람은 결국 인생을 망쳤어요. 예일대 출신의 뛰어난 경제학자였던 사람이 인간 다 망가졌어요. 결국은 그렇게 돼요. 그분이 우리에게 뭘 요구할 때는 절대로 당신을 위해서 요구하는 적은 없어요.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요구하는 거예요. 우리는 누군가를 아끼죠. 그게 부모, 형제, 친구, 애인... 다 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게 예수님보다 귀하게 되면 안 되죠.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C.S.루이스란 사람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소중한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 시간문제예요. 얼마 안 가서 그 소중한 사람을 우리는 더 이상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돼요. 하지만, 우리가 그 소중한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히 여기면 그 소중한 사람은 영원토록 소중히 여기게 돼요. 그러니까, 첫 번째 사랑이 항상 첫 번째여야 된다는 거죠. 예수님보다 다른 무엇이 첫 번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얘기예요. 더구나 수도자, 성직자로서 불림을 받은 사람에게 가족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이 있어서는 안 되겠죠. 그분의 사제로서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되는데, 내가 엄마든 누구든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사로잡혀 있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죠. 제가 그 얘기하는 거예요.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카 14,26)
여기서 ‘미워한다’ 라는 게 문자 그대로 미워하는 거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비교급을 잘 쓰지 않고 이런 식으로 써요.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거예요. 미워한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을 말씀하실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를 베풀러 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된 사람이 제 아버지를 거스르고 딸이 제 어머니를 거르스고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스르도록 갈라놓으러 왔습니다. 각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 식구들일 것입니다.”(마태 10,34-36)
예, 이것조차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절대 안 돼요. 우리가 진리 추구의 삶을 살아갈 때, 즉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보다 나의 가족이나 이런 데 무질서하게 사로잡힐 수는 없다는 거예요. 또 다른 방향에서, 내가 그렇게 섬김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방해 역할을 하면,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이야기예요. 표현들은 굉장히 과격하지만 그런 식의 표현이에요. 그분의 부르심이 확실한데, 아버지가 붙들고 놓지를 않아요. 그럴 때 문자 그대로 아버지가 원수예요. 예수님 때문에 생겨난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부르심이 확실하다면 응답해야죠.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의 이야기
우리 예수회 안에 알로이시오 곤자가(1569-1591)라는 젊은 성인이 있어요. 곤자가는 이태리 북부 지역의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통치자가 될 겁니다. 그런데 굉장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열다섯 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응답하기로 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가서 예수회에 들어가겠다고 얘기를 해요.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죠. 아버지는 이 아들이 자기 뒤를 이어서 통치자가 되기를 바랐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시키기 위해서 아들과 함께 온갖 향연장과 여행도 하고요. 그래도 안 되니까, 이 아들의 뜻이 분명하니까, 열일곱 살 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만나게 돼요. 왜냐면은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장남이 장자권을 버리고 수도회에 갈 수는 없단 말이에요. 장자권이 차남한테 넘어가려면 황제가 허락을 줘야 돼요. 그래서 이 아버지 생각에는 황제가 허락을 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황제를 만났는데, 황제는 알로이시오 곤자가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이 확실하니까 허락을 줍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차남한테 물려줍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애착 때문에 도저히 도저히 수도회에 내놓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허락까지 받은 상태에서도 수도원에 못 들어가게 되니까 세월이 계속 흘러가게 된 거죠. 어느 날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충격 요법을 써요. 아버지와 약속도 되어 있지 않는데, 아버지 방에 노크를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바마마 이렇게 부르는 옛날인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통치자를 만나러 가는 건데, 아무리 아들이라도 약속도 없이 찾아가는 것은 상당한 결례죠. 충격요법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한테 가서 방문을 두드리고는 문 열고 들어가서 대뜸 아버지한테 이렇게 말해요.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난 4년 전부터 나를 부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계속 인간적인 애착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에 대한 효심 때문에 아버님의 뜻을 거역하진 않지만, 지금 아버지는 하느님의 뜻을 4년째 어기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가 버려요. 그 말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몰라요. 아버지가 엉엉 울어요. 두 시간 동안 통곡을 해요. 그리고는 허락을 줘요. 그래서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열여덟 살에 예수회 입회를 합니다.
지금 이 성경 구절이 그런 내용이에요. 이걸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무조건 가족 사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돼야 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를 앞에 두고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안에서 올 수도 있어요. 내 안에서 무질서하게 그들을 붙들 수도 있고요. 내 밖에서, 가족들에게서 올 수도 있고요. 그게 뭐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첫 번째라는, 지금 그 얘기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입회 결정이 나고 나서 예수회 들어오기 위해서 굉장히 힘겨운 시간 보낼 거예요. 매일 같이 엄마가 울고 기절하고, 아버지가 화를 내고... 그런 경우가 있을 거예요. 꼭 한 두 명씩 있거든요. 일단 그 길이 분명하면 그걸 다 견뎌내야 돼요. 견뎌내고 나면, 여러분들 입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신앙 없던 아버지가 신자가 돼 있을 겁니다. 그리고 좀 지나면 여러분들이 수도생활 그만두고 나올까봐 오히려 안달하며 기도할 거예요. 바뀌어버린 거예요. 근데 아무튼 시련의 시간이 있을 거예요. 특히 부모가 신앙이 없으면.
② 자기를 버리고
두 번째는 너무 당연한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요. 그분의 뜻이, 우리 뜻이 아니고 그분의 뜻이 우리를 인도해요. 그런데 내가 내 뜻이 앞서면 어떻게 돼요? 그분을 따라갈 수 없죠. 여기서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내 뜻을 버린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내 뜻은 정말 온전한, 올곧은, 올바른 내 뜻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욕심들, 욕망들, 무질서한 경향들, 어둠 속에서 나오는 내 뜻을 말합니다. 그 뜻 때문에 예수님 뜻을 안 따라가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 훈련은 끊임없이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을 버리는 훈련이에요.
그분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들, 내 고집들이 우리 안에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린다는 거죠. 예수님의 뜻과 충돌되는 내 뜻을 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그분을 따라갈 수 있어요. 그분이 오른쪽으로 가는데 내가 왼쪽을 고집하면 따라갈 수 없지요.
우리 안에 옛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약속 받았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문자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은총 속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 우리 안에 옛사람은 그대로 있어요. 이 옛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죠. 이 옛사람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모습들, 욕심들, 무질서한 경향들, 그리고 또 그분이 원하지 않는 그런 나의 뜻, 행동 양식이죠. 그래서 우리는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돼요. 옛사람은 나한테 있어요. 새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인품을 가져야 돼요. 이게 회심이에요. 그래서 또한 자기 부정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분의 뜻에 충돌하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언젠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봤을 때 제2의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라는 거예요. 죽는 날까지. 이것은 꼭 수도자,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③ 십자가를 지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하늘나라 건설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때가 많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거거든요. 당시 로마시대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기도 하고 애정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2천 년 전의 십자가는 단두대예요, 단두대. 그래서 죽는 거예요. 매일 같이.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루카 9,23)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 라는 말은 매일 매일 순교하는 것이죠. 매일 순교한다고 해서 “백색 순교”라고 해요. 우리 순교 선열들은 피를 흘리면서 죽었잖아요. 피는 붉은 색이죠. 그래서 “적색 순교”죠. 오늘날 실제로 “적색 순교”를 하는 분들은 없을 거예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에는 없을 거 같아요. 또, 모르죠. 나중에 예수회 들어오고 나서 아프리카 같은 곳에 파견됐다가 거기서 죽을 수는 있겠죠. 그러면 영광이겠죠. 왜냐하면 “적색 순교”보다 “백색 순교”가 더 힘들어요. 이 “적색 순교”는 그 죽음의 상황에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힘을 주시거든요. “백색 순교”는 참으로 인내를 요구해요. 하루하루를 살면서 그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분 때문에.
내 안에 있는 ‘무질서한 경향’, ‘옛사람’ 이런 것과 상관 없이,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내가 죽어야 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죽으라는 거예요. 매일 같이. 그 훈련이에요. “백색 순교”는 훈련이에요. 우리가 다 바쁘잖아요. 바쁘기 때문에 기도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죠. 오죽하면 순교라는 말을 쓰겠어요. 그래도 마련하는 거. 그게 “백색 순교”예요. 그분과의 그 귀한 만남을 위해서, 절대 고독 속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서, 내가 굉장히 바쁘지만 그래도 따로 시간을 내서 조배하는 거. 그게 “백색 순교”예요.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다들 이렇게 하고 있다면 “백색 순교”라고 하지 않겠죠. 제가 감히 판단하지만, 많이들 안 하고 있을 걸요. 이렇게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는 여정 중에 있으면서 매일 같이 따로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가. 많이 안 할 겁니다. 옛날 제가 성소 책임자 역할 할 때, 성소자들과 한 달에 한번씩 면담하면서 보면 기도생활이 없어요. 놀라워요. 바빠서 없는데, “백색 순교”를 한다면 기도생활이 없을 수가 없죠. 그분과의 만남의 시간, 즉 기도시간을 항상 제일 먼저 소중하게 여긴다면. 근데 “백색 순교”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게 그 정도로 힘들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고는 마련 안 하거든요.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우리가 정말 죽음의 행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했는데 정말 응답하고 싶지 않아요. 또 내가 아니면 도와줄 수도 없어요. 그럴 때 그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내가 응답하는 거. “백색 순교”일 수 있어요. “백색 순교”의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게 “백색 순교”예요. 그래서 하루를 살 때에도 정말 무슨 일을 하든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는 것. 그게 “백색 순교”라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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