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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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의 의미
장상(수도원장을 비롯한 책임자를 통칭)에게서 부제품 수여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를 향한 인사는 ‘부제품 언제입니까?’이다. 지난해 8월과 10월 필리핀과 미국에서 동기수사님들이 하나 둘 봉사직에 불리움 받더니, 급기야는 올초 아일랜드에서 공부 중인 후배 수사님 두 분마저 부제품을 받았다. 사정이 이럼에도 가타부타 별 소식이 없는 나를 향해 동기 부제님들을 비롯해 벗들이몇 번이고 ‘부제품 언제?’라며 안부를 물어온다.
재미난 것은 이렇게 잔치 일정이 결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 보다 더 그 잔치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이다. 나아가 기다림에만 머무르지 않고 부제품에 입을 제의와 제구 그리고 피로연에 입을 양복에 이르기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부 바꾸어주겠노라며 청을 해 오는 분들이 있어 ‘수도원에 제의며 제구가 전부 갖추어져 있어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양복은 수도회 입회할 때 준비해 둔 것이 있습니다’ 등 등 사정을 말씀드리고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한 것은 예수회 일본관구에서는 사제품과는 달리 부제품 행사는 간소하게 치르는 전통이 있어, 예수회원들과 사도직에 종사하는 몇몇 지인만을 초대해 미사로 당일 행사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 죠치대학 내 성당에서 한국인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30여명 내외의 한인공동체에서 부제품 당일 미사참석은 물론, 행사가 끝난 후 잔치상을 마련하겠노라며 벌써부터 한껏 달뜬 분위기다. ‘수도회에서 <간소한 행사>를 지향하며 별다른 잔치 계획이 없는데 한국인 신자분들이 잔치상을 마련하면 내가 속한 수도회가 조금 난처해하지 않을까’라며 잔치 준비위원장을 자처한 박신부님께 사정 아닌 사정을 해봐도 ‘그게 또 신자분들이 좋아라해서 준비하는 것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라며 그런 그분들의 마음 써주심을 위해서라도 당신 역시 한 팔 기꺼이 보태겠노라며 왠지 더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작 당사자인 나는 조금씩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집 안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는데 밖의 사람들이 더 신이나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렇게 가만히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아무튼 부제품 허락이 나오기도 전부터 내 주위의 공기는 점점더 나를 벗어나 요동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가만히 지켜보면, 이 부제품을 둘러싼 공기 속에는 시작전부터 일관되게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것에 ‘기쁨, 혹은 설렘’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돌이켜보니 동기 수사님들이 하나 둘 부제품을 수여 받았을 때, 그이들의 수품 사진을 보면서 나 역시 어떤 설렘과 기쁨을 맛보았다. 함께 입회하여 수련원에서 2년간 좌충우돌해가며 수도생활의 기본을 배우고, 신학원에서 3년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수련원에서 배운 것들을 몸에 익히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중간기 2년간은 각자 사도직장으로 흩어져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몸에 새기며 일상을 살았다. 그런 후에 공기부터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다시 3년을 머리 빠지고 새하야지면서 어느덧 하나 둘 원래부터 제 몸에 맞는 옷인양,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들에 부제품을 기다리는 나도 덩달아 설렘과 기쁨을 전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장상으로부터 봉사직에로의 허락을 받고 이제는 김치국도 아니고 민망해할 일도 아니게 되었으니 이 역시 ‘기쁨과 설렘’의 순간이다.
그러면서 나 보다 더 한결같이 기다려준 마음들에 다시 생각이 닿았다. 당신들 일도 아니고 내가 수품을 받아도 당신네 사정이 변할 것도 없음에도 그분들은 나 보다 더 내 수품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며 이곳 일본까지 마음을 쓰고 계신다. 제 코가 석자라 나 바쁠때는 전혀 그분들 사정을 살피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편지며 카드를 잊지 않고 보내온다. 게다가, 이곳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극구사양해도 고국에서 손수담근 김치며 간식거리를 보내어 응원을 건네는 분들도 있다. 당신의 기도에 내 기도를 더해 주시는 사랑하는 친구·선배수녀님, 그리고 든든한 후배 수사님들,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벗들에게는 늘 미안할 정도로 위로를 한껏 받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내가·이 내 수품’이 무어라고 그분들은 나 보다 더 그날을 기다리며, 더 기뻐해 주고, 더한 설렘으로 잔치를 준비하시는 것일까? 마련해 주시는 것들이 한 두푼 드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견본들을 손수 찾아내서 이 무늬가, 이 재질이, 이 디자인이 이러저러하다며 마치 시집가는 딸 웨딩드레스 선보이듯 즐거워하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저분의 저 기쁨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흘러 오는 것일까? 서로 이런저런 음식들을 준비하겠노라며 왁자지껄하는 작은 공동체를 보면서 당신네들 자녀를 시집 장가 보낼 때의 소소한 걱정도 이곳에서는 일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맑고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 기쁨과 설렘들은 어디에서 전해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실수투성이 나를 미소한 봉사직에로의 부르심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쁨과 평화가 수품자에 머물지 않고 주위의 응원하는 모든 분들에게 나 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으로 은총을 드러내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받는 수품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는, 그래서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그날을 기대하고 희망을 두고 기뻐하는 이들에게 닿게 하시는 것은 아닐까?
이미 내 손을 떠난 하느님의 일들은 그이들에게 기쁨과 설렘으로 점점 손이 닿지 않은 곳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지인들을 통해 필요한 것은 없는지 연락을 해오고, 기도그룹이 영적선물로 매일 기도를 더하고 있단다. 거기에 부제품 당일 나와 함께 봉사직에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미 내 손을 떠나도 한참을 떠나 있어 보인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내가 봉사직에 부름 받는 숨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꼬질꼬질해도 이런 나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갈망하면서 그이들은 하느님의 기쁨과 설렘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알아듣는 나는 더 작아져야 하고 더 낮아져야함은 당연해 보인다. 그분들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며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기쁨과 설렘을 눈여겨 살필 일이다. 그리고 하느님 당신께서 들려 주시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 내 미소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내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하느님 당신이 작디 작은 나를 통해 당신의 기쁨과 설렘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래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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