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신비와 예언, 하느님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비를 맞는 것 본문
한국교회에서 최근 가장 돋보이는 존재는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몇 년째 탈핵운동을 벌이면서 밀양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주민들과 연대해 왔으며, 4대강 사업, 강정 해군기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연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여자 수도자들은 지난 몇 년간 ‘신비와 예언’에 주목해 왔다. 관상과 실천이 그들에게 갖는 의미가 크다. 이번엔 성가소비녀회의 강신숙 수녀를 만나 길을 물었다.
우리시대를 ‘위험사회’라고 부르는데, 수녀님 생각은?
‘안전’만 바라는 사회는 병든 사회가 아닐까요?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빚어진 비정규직 양산, 해고 노동자, 취업 교육장이 된 대학가, 영문도 모르고 경쟁으로 소진해가는 청소년들이 많죠. 이들은 모두 사회 상류 1퍼센트를 위한 노예들인 것 같아요. 그러니 삶이 불안하고 힘들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저항할 힘도 없고요. 너무 두려운 나머지 cctv와 문단속에 안전을 기대야 하는 사회는 겨우 링거로 목숨을 유지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은 자살 1위의 국가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도 수도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예언직 수행’을 강조한 것이겠지요.
사실 ‘예언직 수행’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기처럼 너무 당연한 행위죠. 그러나 슬프게도 교회는 ‘예언직’에 그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수도자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언직은 교회사명의 핵심이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듯이, 배제와 억압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감수성을 지난 이들이 예언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타는 연민을 이미 자신의 것으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감수성 때문에 예언자들은 세상 한 복판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들은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가해지는 폭행이 곧 하느님에 대한 폭력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한 말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은 이웃과 나 자신과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입니다.
어쩌면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 모두가 예언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예언자란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나는 밀양의 어르신들, 강정을 지키고자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들, 크레인에서 죽은 동료들의 자리를 지키며 투쟁했던 김진숙 씨,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비를 맞고 있던 사람들, 희망버스의 주역들 모두가 ‘오늘의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미 체험하고 있습니다.
‘복음적 철저함’은 수도자들에게만 요청되는 것일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수도자들이 자기들 스스로에게 ‘복음적 철저함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오글거림을 느낍니다. 사실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수도자들은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왔기 때문에 지금도 이 말이 그대로 유통되고 있는 듯해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자 교령이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이란 말로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물론 수도자들이 위기에 빠진 세상과 교회에 ‘길’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대로 철저히 사는 것은 교회 전체의 사명이죠. 당연히 평신도의 몫이기도 하고요.
결국 누구나 복음을 철저히 따르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제 교회 안에서 ‘완덕’ 운운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 ‘완덕’이나 ‘철저함’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해요. 완덕은 화해와 연대의 능력입니다. 파괴와 배제, 차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한 깊은 감수성, 곧 뼛속까지 뚫는 연민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성인’이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도로시 데이를 이 시대의 성인 중의 성인으로 꼽고 싶어요, 피상적 사랑과 위선에 가득차 있으면서 거룩한 얼굴을 보이는 것은 역겨운 일이죠. 어린 아이들이 굶주리고, 성노예로 팔려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분노할 줄 모르면서, 철저히 살아야 한다는 미명아래 세상과 담쌓고 자기 기도생활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완덕을 향한 사람들’이라고 불러서는 안됩니다.
교종이 하신 ‘교회는 야전병원’이라는 표현은?
“교회는 야전병원”이라는 말씀은 2013년 <라 치빌타 가톨리카> 대표 안토니오 스파다 신부와의 인터뷰 하면서 교종이 하신 말씀입니다. 처음 이 ‘언어’를 접했을 때 너무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이제 앞으로 교종이 이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 무엇에 주력할 것인지, 교회 자체가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이런 예상이 적중했는지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이 야전병원의 수장 같더군요. 자신의 거취문제부터 난민지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보여준 행보, 특별히 <복음의 기쁨>에서 전한 메시지들... 이 모두가 “교회는 야전병원”이라는 등식이 무얼 의미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은 교회의 사명을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라면서 “심각하게 다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전쟁터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세상의 가장 절박한 위기에 놓인 사람들, 지구적 위기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는 우선적으로 이들에게 달려가야 하고, 이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고 우리의 행동을 촉구합니다.
또한 “성직중심주의”도 강력하게 비판하셨는데, 교회 리더십이 해야 할 복음의 직무는 “사람들이 처한 어둠 속으로 내려갈 줄 알며,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어둠 속에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사실상 복음의 중심이며,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중심이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의 보편적 성사는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그것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기쁜소식은 이런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헌신과 열정을 통해 드러나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의 실제적인 자비, 효율적 사랑을 이해하려면 어떤 태도가 먼저 필요한지요?
“같이 비를 맞는 것”이죠. 힘이나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은 “같이 비를 맞는 것”입니다. 나는 연민(compassion)이야말로 가장 신적인 사랑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이집트의 압제에서 고통 받던 이스라엘이 울부짖을 때 하느님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한 것(강생)은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신 하느님의 마음(compassion)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저 좋고 넓은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3,7-8)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 강생 역시 마찬가지죠. 결국 하느님의 감수성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소외와 억압, 차별 당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똑똑히 보는 일, 그들의 울부짖음을 듣는 일, 그리고 정녕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일입니다. 이렇게 가슴 깊이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해방’을 향한 대열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들을 억압자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지킨 하느님처럼,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물신지배의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탈물신화, 탈자본주의를 사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요?
그게 가능하려면,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바꿔나가야 하며, 사회의 변화를 주도해 나갈 정치적 힘을 키워야 합니다.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사회, 차별과 배제가 없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소수의 특권층들이 우리의 모든 자원과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교리를 통한 복음적 비전을 현실에서 실현할 정치적 힘을 식별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공포는 변화의 원인이 될 수 없어요. 공포와 위험사회의 불안, 위기의식의 만연은 결국 회피와 만성적 무기력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관적인 시대일수록 교회는 사회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여타의 방법들을 찾아 새로운 영성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상봉 기자/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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