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왜 불쌍한데?" 본문
1독서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열성에 견주어
여러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복음말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단상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논쟁이 붙었다.
주제는 '불쌍함'에 대해서이다.
2004년 8월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어
이전의 '산업연수생제도'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연수생'의 신분으로 대했지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았기에, 4대보험도, 월급도, 그이들의 처우가 형편이 없었다.
1994년 '명동성당'에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천막농성이 있었고,
시민단체들이 함께하면서 점진적이 제도개선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04년 인력수입국(한국) vs. 송출국(필리핀, 베트남 등 15개국) 간의
이주노동자 파견에 대한 협약이 국가 대 국가의 직접 업무가 되었다.
이로인해 브로커를 통해 몫돈을 들여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형편이 나아졌고
국가 대 국가의 협약이다보니 송출국에서도 자국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의 일할 수 있는 연한이 3년, 그리고 1회에 한해서(3년) 연장이 가능하다.
세월이 흘러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고 6년이 흐른 요즈음, 귀국길에 올라야 되는 이주노동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지만 고국의 일자리가 없고, 여전히 대가족들은 먹고 살아야 하겠고,
이주노동자 1명이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나머지 가족들이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형편이다.
해서 '이웃살이'는 귀국길에 올라야하는 이들이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연일 북새통이다.
하지만 대답은 'No'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이이들의 선택은 '미등록체류자(일명 '불법노동자')'로 남겠다는 것이다.
동기 수사님은 이웃살이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이런 이들의 딱한 처지에
'불쌍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나는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왜 수사님이 불쌍한건데?"하고 묻는다.
내 이런 차가운 반응에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은 아니냐'며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하는 네가 더 이해할 수 없다"고 야단이다.
'불쌍함'은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이런 감정은 사람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에
동기 수사님은 이주노동자 친구들의 노력과 어쩔 수 없는 해결책에 '그냥 불쌍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 수사님의 반응에 나는 '객관적인' 대답을 요구한 것이다.
서로의 생각을 논쟁을 통해 확인한 후 나는 또 쿨하게
"수사님이 느낀 감정에 대해 내가 이렇게저렇게 판단한 것은 내 실수야, 내가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나는 또 속시원하지 않은 이 '미안함'에 머물러 본다.
아마도 동기 수사님의 '불쌍함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품었다 싶다.
너무 '쉽게' 또는 '변덕스럽게' 반응하는 수사님의 감정에 '또 저런다' 판단했던 듯싶다.
수사님의 '불쌍함'이 '진짜'인지 대번에 삐딱하게 질문했다 싶다.
"왜 불쌍한데?"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있다보면 그이들의 딱한 처지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고, 함께 해주고 싶고, 해결해 주고 싶다.
그러면서 어느 땐 좌절감 비슷한 것도 겪게 되고,
그래서 많이 아파하기도 하고(실제로 몸이 반응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앓고 나서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그랬다.
그리고 참으로 간사(?)한 것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밥도 먹고, 병원도 가고, 입을 옷도 있고, 따뜻한 집에 머문다.
그래서 그날 동기수사님에게 또 까칠하게 대꾸했던듯 싶다.
"왜 불쌍한데?"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의 열성에 견주어
여러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복음말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단상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논쟁이 붙었다.
주제는 '불쌍함'에 대해서이다.
2004년 8월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어
이전의 '산업연수생제도'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연수생'의 신분으로 대했지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았기에, 4대보험도, 월급도, 그이들의 처우가 형편이 없었다.
1994년 '명동성당'에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천막농성이 있었고,
시민단체들이 함께하면서 점진적이 제도개선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2004년 인력수입국(한국) vs. 송출국(필리핀, 베트남 등 15개국) 간의
이주노동자 파견에 대한 협약이 국가 대 국가의 직접 업무가 되었다.
이로인해 브로커를 통해 몫돈을 들여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형편이 나아졌고
국가 대 국가의 협약이다보니 송출국에서도 자국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주노동자들의 일할 수 있는 연한이 3년, 그리고 1회에 한해서(3년) 연장이 가능하다.
세월이 흘러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고 6년이 흐른 요즈음, 귀국길에 올라야 되는 이주노동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지만 고국의 일자리가 없고, 여전히 대가족들은 먹고 살아야 하겠고,
이주노동자 1명이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나머지 가족들이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형편이다.
해서 '이웃살이'는 귀국길에 올라야하는 이들이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연일 북새통이다.
하지만 대답은 'No' 다른 방법이 없다.
결국 이이들의 선택은 '미등록체류자(일명 '불법노동자')'로 남겠다는 것이다.
동기 수사님은 이웃살이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이런 이들의 딱한 처지에
'불쌍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나는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왜 수사님이 불쌍한건데?"하고 묻는다.
내 이런 차가운 반응에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은 아니냐'며
"오히려 그렇게 이야기하는 네가 더 이해할 수 없다"고 야단이다.
'불쌍함'은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이런 감정은 사람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에
동기 수사님은 이주노동자 친구들의 노력과 어쩔 수 없는 해결책에 '그냥 불쌍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동기 수사님의 반응에 나는 '객관적인' 대답을 요구한 것이다.
서로의 생각을 논쟁을 통해 확인한 후 나는 또 쿨하게
"수사님이 느낀 감정에 대해 내가 이렇게저렇게 판단한 것은 내 실수야, 내가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나는 또 속시원하지 않은 이 '미안함'에 머물러 본다.
아마도 동기 수사님의 '불쌍함에 대한 진정성'에 의문을 품었다 싶다.
너무 '쉽게' 또는 '변덕스럽게' 반응하는 수사님의 감정에 '또 저런다' 판단했던 듯싶다.
수사님의 '불쌍함'이 '진짜'인지 대번에 삐딱하게 질문했다 싶다.
"왜 불쌍한데?"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있다보면 그이들의 딱한 처지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고, 함께 해주고 싶고, 해결해 주고 싶다.
그러면서 어느 땐 좌절감 비슷한 것도 겪게 되고,
그래서 많이 아파하기도 하고(실제로 몸이 반응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앓고 나서 어느 정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그랬다.
그리고 참으로 간사(?)한 것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밥도 먹고, 병원도 가고, 입을 옷도 있고, 따뜻한 집에 머문다.
그래서 그날 동기수사님에게 또 까칠하게 대꾸했던듯 싶다.
"왜 불쌍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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