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예수회센터 성모신심 미사 강론 본문
3월 3일 성모심심 미사 강론
미사 중이라 기도 대신 짧은 시 한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시고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받는 이가 모든 것이요
사랑하는 자는 한낱 베일일 따름.
사랑받는 이는 살아계시고
사랑하는 자는 죽은 물건이다.
사랑이 당신을 돌보심을 거두신다면
사랑하는 자는 떨어지고 말겠지
날개 없는 새처럼.
사랑받는 이의 빛이 없으면
내 어찌 깨어나서 사물을 보겠는가?
사랑이 이 말씀을 빚어내신다.
네 가슴 거울이 흐릿하다면
표면에 묻은 때가 씻기지 않은 것이다.
찬미예수님! 예수회 김형욱 수사입니다.
올 1월까지 저희 수도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이웃살이’ 센터
에서 이주민 사도직을 하다가 이번에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김포에 있던 공동체를 떠나서 지금은 여기 손우배 신부님이 살고 계시는 화곡동 알로이시오 신학원에서 일본으로 파견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학원으로 이사를 했던 그날 저녁 손 신부님께서 당신이 함께 하고 있는 ‘성모신심 미사’에서 강론을 한 번 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저를 초대 해 주셨습니다.
이주민사도직을 하면서 손 신부님께서는, 여러 번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셨기에, 그리고 또 후배 수사님들에게 이웃집 아저씨(정정하겠습니다. 큰 형님처럼)처럼 넉넉한 모습으로 늘 챙겨주시는 것을 보면서, ‘아, 언젠가 신부님께서 개인적으로 부탁해 오는 것들에 대해서는 꼭 한 번 들어 드려야 하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순간 기쁘게 승낙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강론을 준비하면서 ‘성모신심’이라는 타이틀에 한참을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예수회는 성모님께 봉헌된 수도회이면서, 또 많은 회원들의 성모님을 향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아시고 계시나요?
그래서인지 여기 계신 손 신부님처럼 ‘성모님 신심 공경’을 위한 사도직을 하고 계시는 분도 있고 이런 ‘성모신심운동’에 김도현 수사님처럼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도 적지 않답니다.
반면에, 저와 같은 쌩 초짜들도 있습니다. 저는 2001년도에 서강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서야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그 이전까지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저를 키워주신 분도 개신교 목사님이셨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뭐 ‘그냥 예수님의 어머니’지 거룩하거나 아주 친근한 ‘성모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천주교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웠지만 ‘머리’로만 알아들었지, 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다가올수록 ‘아, 내가 괜한 짓 한 거 아니야?’ 라는 생각에, 며칠 새 흰 머리카락이 몇 개 더 늘었습니다. ^^)
이 시간은! 처음의 ‘그냥 그런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제가 사랑으로 호칭하게 된 ‘엄마 마리아’에 대한 작은 체험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늘 입술에 올려 두는 저만의(?) ‘성모송’을 읊어 보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엄마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엄마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뭐가 다른지 느끼셨습니까? 네! 바로 ‘마리아님’ 호칭 앞에 ‘엄마~’ 라는 아주 친근한 표현을 붙여 보았습니다.
성모님에 대한 체험이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수도회에 입회했고 그래서 처음 수련원에서 제 입술에 올려 둔 성모송에 ‘엄마~’ 라는 낯설지 않은 표현을 하나 더 붙여 두었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에 대한 별 체험이 없던 저라도 조금은 덜 낯설게 느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련원에서 2년을 보내고 첫 서원을 했고, 지금의 화곡동 알로이시오 신학원에서 서강대를 오가며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의 ‘성모송’은 ‘엄마~ 성모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원에서 3년째를 마치던 어느 날, 인생에서 의심할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의 은총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제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2009년 12월 30일자 수첩에는 ‘★ 당신을 보여 주신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주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
등장인물: 요셉과 마리아, 사제 시메온과 파누엘의 딸 아세르 지파의 한나
의지적으로 기도 장소를 상상을 하다? 어느덧 한 이미지가 다가오고 여인의 뒷모습, 주광색 빛이 감도는 그러나 고요한 한 없는 부드러움, 여유로움 그리고 지혜로움이 전해진다. 확신 그분의 대답 더 기도하고 싶고, 이 기쁨을 나누고 싶은, 더 열정이 샘솟는...
신학원 형제들이 2009년 12/26-1/5일까지 9박10일 간의 일정으로 연피정을 떠났습니다. 저는 관구의 ‘재단 설립’ 준비로 막바지 작업 중이라 형제들과 함께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이들이 피정을 하는 동안 함께 하고픈 심정에서 이른 아침이면 신학원 성당에서 형제들을 생각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날도 성탄팔일축제를 지내는 기도 요점이 주어졌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대목입니다. 시메온과 한나가 이 성가정(聖家庭)과 성전에서 만나게 됩니다.
먼저 ‘이냐시오의 기도법’에 따라 침묵으로 읽어 두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부모님도 계시고, 차례가 되자 제단 앞으로 나옵니다. 사제 시메온은 단박에 아기 예수를 알아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네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시메온이 못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그가 평생을 기다려온 분! 기도 안에서 시메온의 북받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평생을 기다려 온...’이라는 말이 제 마음을 흔들었고 저 역시 시메온을 따라 벅찬 감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느닷없이 ‘한 여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미지’가 제 기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하!”라는 감탄과 함께 바오로 사도의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라는 말씀처럼 ‘부분’이 아닌 ‘온전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누군지,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확신에 차서 경탄할 수 있습니다. 그 ‘빛 무리 속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이의 뒷모습’은 즉각적입니다. 그렇게 확신에 찼던 적은 이전에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밀려드는 옛 성인들과 이냐시오 성인이 말씀하시고 계시는 ‘이미지의 의미’ 역시 확연히 밝혀지는 체험입니다. ‘내적 확신으로 가득 찬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흔들림 없는 느낌’이라는 영적 언어의 의미 역시 그 여인에게서 전해진 부드러움·지혜·사랑스러움·자유 등등 이 모든 말로도 부족할 정도의 느낌들이 저를 사정없이 뒤덮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능적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아하! 이분이구나”
다음 이미지가 들어옵니다. ‘한 여인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아기가 예수님이구나’라는 느낌도 분명했습니다. 아기를 안고 있던 그 여인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기도가 끝나고 제 정신(?)이 돌아와서 그 감동을 잊지 않기 위해 서둘러 노트에 옮겨 적을 때 찾아 든 의문입니다.
‘어!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던 연인이 너무 젊은데?’
그때는 그 여인이 ‘여든 넷이 된 파누엘의 딸 한나’ 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체험’에 너무 정신이 팔려 더 이상 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수도생활하면서 ‘당신을 보여 주십시요’ 라고 그렇게 청해오던 은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청원이 오늘 눈앞에서 확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과 기쁨에 정신이 없었기에 그때는 또 다른 선물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반복기도의 중요성)
‘아하! 체험’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열매’들이 어떻게 맺게 되는지 훈련 받은 대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계속해서 작용하여 하느님을 향하도록 저를 이끄는지, 아니면 악신의 장난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지 주의해서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아하! 체험에 대한 재은총의 순간이’ 좀 더 빨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두 달 후 수원 말씀의 집에서 연피정을 하면서 영적 동반 신부님께서는 제 ‘아하! 체험’에 관심을 보이시며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들을 수 있도록 밤 시간에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신부님과 면담 시간을 앞에 두고 바둑을 복기하듯 ‘아하! 체험’을 다시금 성찰하였습니다. 여전히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기운과 느낌 그리고 이미지들입니다.
그렇게 성찰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저녁 미사를 참례했습니다. 미사 중 성체 현시 무렵에 ‘아하! 체험’에서 보았던 ‘기도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문득 떠올랐고, 동시에 제 깊은 곳에서 “아하! 어머니” 라는 탄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2009년 12월 30일 신학원 성당에서 만났던 분은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기도하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당연히 ‘성전에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단식하던 “한나”’ 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있던 이도 당연히 “한나”였습니다. 그런데 두 달여의 시간차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또 한 번 ‘아하!’라는 감탄과 함께 은총으로 전해 주셨습니다. ‘어쩐지 젊긴 젊더라니 말입니다.’ (이 체험이 있었던 것이 2010년 2월 21일입니다)
사람이 어떤 놀라운 체험을 하면 전과 같지 않게 됩니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 든든한 명품(?) 빽이 하나 생겼달까요! 그 의심할 수 없는 잔잔한 체험 앞에서 이제는 ‘머리’로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아니 ‘머리’에서 시작하지만 늘 ‘가슴’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느 마을에 술집 하나가 들어섰습니다. 대대로 교우촌을 이루며 신앙생활을 하던 마을 사람들은 ‘이럴 수는 없다’며 그날부터 저 술집이 망하게 해 달라고 매일 철야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이 기도가 받아들여선지, 어느 비바람이 치는 날 그 술집에 벼락이 떨어지더니 홀라당 전부 재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생활 터전을 잃은 술집 주인은 재판관에게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 사유는 전부터 마을 성당 신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자신의 술집이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이유입니다. 재판장에 호출된 신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항변합니다. ‘에이 여보쇼, 농담이 지나치오.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수 있겠소’ 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현명한 재판관은 술집 주인을 지긋이 바라보며 ‘맞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대대로 신을 믿어 왔던 마을 신자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바치는 기도의 힘을 믿지 않았지만 정작 하느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던 술집 주인만은 그 ’기도의 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팔이 욱신욱신 쑤시더니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째, 문득 ‘아, 엄마 마리아님께 전구해 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아기가 엄마에게 하듯이 청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마리아님, 저 팔이 많이 아파요. 매일 밤잠을 이룰 수가 없네요. 제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엄마, 저 많이 아픕니다...’ 그렇게 한 참을 간구하고 청하니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편안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처럼 뼛속까지 쑤셔오던 팔도 언제 아팠냐는 듯이 말짱한 채 말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살면서 ‘기적이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곧잘 듣게 됩니다. 기적은 그 기적의 힘을 믿고 또 그 기적에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백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지만 정작 그 자비의 힘을 믿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말짱 헛짓이 되고 맙니다. 평생 성당을 다니며 기도해 왔으면서 그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물론 ‘어떻게 하면 진심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라며 제게 물어 와도 시원스럽게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산수유 몸에 좋은데, 이거 진짜 몸에 좋은데, 아, 이런 걸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하며 안타까워하는 광고에 나오는 그 사장님의 마음처럼 그런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혹은 은총의 힘으로 단박에 하느님께 마음이 돌려질 때에나 가능해 보입니다. 그런 터에 ‘기적’이라고 불리는 일들을 심심찮게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기적의 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는 꺼떡하면 엄마 마리아께 전구를 청합니다. 비염이 심해져서 머리가 무거울 때, 다시금 팔이 욱신욱신 쑤셔 올 때, 목 디스크 때문에 베개를 베고 잠을 잘 수 없을 때, 치과에 가면 윙 윙 거리는 기계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설 때 등 등,
아직은 제가 어려울 때만 청하는 미욱한 신앙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징 징 대면 곧잘 들어주시니 자꾸 하다보면 재미(?)도 있고, 관성이 생겨 더 자주 하느님께 기대게 됩니다. 그러면 또 어떻겠습니까? 제 체험은 아직 여기까진 걸....그렇다고 물리치실 성모님이나 하느님이 아니시고 말입니다.
아무튼 누군가 제 수도생활을 보며/ ‘믿음이 뭡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고, 이렇게 ‘배 째라는 식’의 배짱만 느는 것 같습니다. 저의 믿음이란 지금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이 부족하면 그 믿음이 자라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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