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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기적’에 대해서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기적’에 대해서

해피제제 2020. 7. 14. 14:22

 

기적에 대해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마태11,20-21)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에 대한 속보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아에 TV와 인터넷을 꺼 두었다. 이런저런 추측과 사실들이 버무려져 또 수많은 기사들이 내 눈과 귀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이유 그리고 그가 택한 죽음의 방식이면 충분해 보인다. 물론 그의 죽음의 방식에는 납득할 수는 없지만 그래 보인다.

 

그에 대한 공과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기사들이 사실을 전하겠으니 나는 나와 인연이 닿았던 과정 안에서만 그를 이해할 수 있겠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일탈과 과오는 피해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그이들의 입을 통해서 서서히 밝혀질 것이다. 우선은 피해자들의 상처에 나의 하느님 그분의 위로와 앞으로의 여정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청해 본다. 부디 피해자들이 그의 죽음 으로 더 많이 비난 받거나 상처 받지 않기를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한 편 나에게 숙제처럼 남은 질문은, 왜 존경하던 이들은 그이들이 과오를 범했을 때 사죄하는 방식이 죽음인가 하는 것이다.

 

살아 생전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많은 정치가, 시민·노동운동가, 선생님들은 왜 그이들이 과오가 드러났을 때 당신들을 응원했던 이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구하지 못할까. 잘못을 했다면 대통령이든 서울시장이든 자리에서 물러나서 모든 국민들 앞에 용서를 구하고 또 법 앞에서 정당한 판결을 받아 죄값을 치르면 된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도 아는 이치다.

 

초등학생 어린 아이도 친구에게 잘못을 했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친구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두 손을 들고 벌을 서든, 화장실 청소를 하든 그에 따른 벌을 달게 받는다. 그렇게 책임을 다하고 용서를 구한 후 앞으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약속한다. 물론 그 약속한데로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이기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또 물론 어느 시대건 불의한 법의 판결에 대한 억울함과 모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항거를 표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피해자가 있어서,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방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면 초등학생들도 아는 잘못을 뉘우치는 방식과는 너무도 달라 보인다. 그래서 더 더욱 그이들의 선택한 죽음의 방식이 남은 이들을 망연자실케 하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천주교 사제인 나에게는 앞의 망연자실케하는 이유에 더해 나의 하느님 그분 앞에 오래도록 나앉게 만든다.

 

 

시민단체에서 짧은 시간 일을 보았고 그 인연으로 아름다운 재단의 박원순 상임이사와 몇 번인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해서 처음 만난 이후 시민운동가, 시민변호사로서 가난한 이들과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그를 마음으로 존경해 왔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처럼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지금껏 지켜왔던 선함, 명예, 정의로움, 신뢰, 올바른 가치들을 모두 의심받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개인적인 인연 안에서 지켜 본 그의 한결 같은 삶의 여정은 결코 부정할 수 없기에 지금도 여기저기서 들려올 소식들을 내려 놓고서 순수하게 존경하는 이의 영원한 안식을 추도하는 중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신이 아니다. 그렇기에 뱀의 유혹에 빠져 에덴 동산의 사과에 손을 대기도 한다. 하느님의 가장 사랑을 받았던 다윗도 자신의 충실한 신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 우리아를 취했다. 가장 지혜롭다던 솔로몬 왕은 우상 신을 섬겼고, 예수님의 든든한 바위베드로는 그의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다. 최근 성인이 되신 요한바오로2세 교황님은 중세시대 교회의 이단재판소 운영과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교회의 잘못을 인정 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오래도록 논란이 되어왔던 사제들의 아동성추행에 대해 고개를 숙여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성인들처럼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진다면 우리 하느님과 피해자들은 틀림없이 용서를 해 주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는다.

 

 

앞의 성서 구절을 묵상하면서 문득, ‘기적이란 하느님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시고, 악령에 들린 사람을 치료해 주시고, 호수 위를 걸으시고, 수천명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는 기적을 펼치셨을 때도 그것을 믿고 따른 이가 있는 반면, 같은 것을 보았음에도 의심하고 떠나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최고 절정(?)의 장면은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그분과 3년간 공생활을 함께 했던 제자들마저도 달아났으니 말해 무엇할까. 그런 의미에서 기적이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현상일 수도 있겠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코라진’, ‘벳사이다’, ‘서울’, ‘나가사키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그분의 도움으로 매일같이 이러한 기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온갖 높은 덕들에 마음을 두고 살아도, 또 그럼에도 그것에 가 닿지 못하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면서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들 앞에 있다면,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인간적인 약함 앞에 스스로 죽음으로써 책임을 다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약함을 모두 앞에서 드러낼 수 있게 하신, 그래서 언제든 당신의 사랑받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그런 기적을 허락해 주신 나의 하느님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의 약함을 통해 당신을 더욱 드러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