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그만들 싸우기를... 본문
1독서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복음말씀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단상
도미니코회와 예수회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올곧은 '믿음'과 인간의 '노력(행동, 실천)' 여부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원시 교회의(예수 사후의 제자교회) 바오로와 예수의 사촌형제 야고보의 충돌과도 같았다.
오늘 1독서의 말씀처럼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 했고,
야고보는 야고보서에 흐르는 정신처럼 '인간의 하느님에 다가가려는노력'을 강조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26)
이 후 이 논쟁은 교회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키우스에게 넘어간다.
'믿음을 통한 구원'이냐 '인간의 의지'에 의한 노력이냐?
이 대결의 승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그 결과의 향방은 분명해 보인다.
펠라키우스는 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단죄받는다.
하지만 펠라키우스 역시 교회와 하느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다면?
중세이후는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도미니코회와 예수회의 논쟁이다.
결과는?
중세 100년 동안(진짜 징하기도 하지...)
교회 안에서 어찌나 심하게 논쟁을 벌였던지 교황이 중재를 나섰다.
"이제부터 서로의 주장이 옳거나 틀렸다고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마십시오.
단, 자기 입장의 장점만을 이야기 하십시오"
이후 예수회와 도미니코회는 자신들의 학설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부름심(믿음)과 인간의 응답(자유로운 의지 혹은 선택)은 하나다.
둘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부르고 계신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자연스럽다.
또한 응답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게 하느님의 작품, 인간이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복음말씀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단상
도미니코회와 예수회는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올곧은 '믿음'과 인간의 '노력(행동, 실천)' 여부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원시 교회의(예수 사후의 제자교회) 바오로와 예수의 사촌형제 야고보의 충돌과도 같았다.
오늘 1독서의 말씀처럼 사도 바오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 했고,
야고보는 야고보서에 흐르는 정신처럼 '인간의 하느님에 다가가려는노력'을 강조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26)
이 후 이 논쟁은 교회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키우스에게 넘어간다.
'믿음을 통한 구원'이냐 '인간의 의지'에 의한 노력이냐?
이 대결의 승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그 결과의 향방은 분명해 보인다.
펠라키우스는 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단죄받는다.
하지만 펠라키우스 역시 교회와 하느님을 무척이나 사랑했다면?
중세이후는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도미니코회와 예수회의 논쟁이다.
결과는?
중세 100년 동안(진짜 징하기도 하지...)
교회 안에서 어찌나 심하게 논쟁을 벌였던지 교황이 중재를 나섰다.
"이제부터 서로의 주장이 옳거나 틀렸다고 공격하거나 방어하지 마십시오.
단, 자기 입장의 장점만을 이야기 하십시오"
이후 예수회와 도미니코회는 자신들의 학설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부름심(믿음)과 인간의 응답(자유로운 의지 혹은 선택)은 하나다.
둘이 아닌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부르고 계신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자연스럽다.
또한 응답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게 하느님의 작품,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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