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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깜짝 선물 본문

세상에게 말걸기

깜짝 선물

해피제제 2020. 2. 26. 17:12

히로시마 나가츠카 예수회 피정집 성당

 

사비오 신부의 깜짝 선물

 

 

연피정을 위해 히로시마 나가츠카 예수회 피정집을 찾았다. 

원래는 혼자서 조용히 연피정을 할 계획이었으나 

동반해 주시는 신부님이 마침 수녀님들 11명 그룹이 같은 날 시작인데 함께 할지를 물어왔고

오랜만에 수도자 그룹과의 연피정인지라 기대를 가지고 흔쾌히 '예'라고 말씀드렸다.

 

각기 다른 수도복에 나이 지긋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고령 수녀님이 94세,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또 전철을 갈아타고 내려 피정집까지 걸어 오셨단다.

내 걸음으로도 역에서부터 10분, 그 할머니 수녀님께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 오셨을 모습이 선하다. 

 

그렇게 70대에서 90대까지 다양한 수도원, 각기 다른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오셨다.

나는 '예수회 수사로서, 사비오이고, 나가사키 26성인기념관에서 사도직하고 있습니다'라며 짧은 소개를 했다.

그리고 이 소개로 인해 피정 마지막까지 그분들로 하여금 작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으니...

 

 

그룹이 함께 하는 피정이기에 오전, 오후 하루 2번의 강의를 듣고

게다가 꽉 채운 1시간 씩, 하루 4-5회의 기도를 하면서 기도 공간인 성당과 경당이 한정되어 있기에

12명의 뻔한 기도 스케쥴은 그래서 하루 몇 번이고 서로가 겹치게 되어 있다.

매번 기도 자리에 나 앉으면 다른 수녀님들 2-3명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 시간들에 나는 괜히 스스로 불타 올라 무릎을 꿇고, 미동도 하지 않은채 그렇게 1시간 기도를 드린다.

 

위에서 언급 했듯이 원래는 혼자서 피정을 할 요량으로

그렇기에 기도 시간도 마음 내키는대로 몸이 가는대로 설렁설렁(?) 할 예정이었다.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피정집에서 해 주는 밥 잘 먹고, 잘 자고, 강을 따라 산책하면서 그렇게 쉬어 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엉뚱한 마음을 먹고 피정에 임했기 때문일까?

하느님께서는 또 내 이 계획이 부질 없음을 당신께서 직접 안내하시며 깨닫게 해 주셨다.

 

그렇다. 본의 아니게 나이 드신 수녀님들의(기도의 달인들인...) 그룹과 함께 하면서 그분들의 진지한 모습,

열정적인 모습(90세의 할머니 수녀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 하신다)에 괜히 자극을 받아

나도 모르게 그분들에 뒤질세라 괜시리 불타 올랐고

그래서 함께 하는 수녀님들이 그분을 깊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 드리며 응원하기도 하였다.

 

늦은 밤 다다미 성당에 나 앉아 수녀님들이 그분 안에 고요히 머물며 기도 하는 모습에 

나 역시 그분들 뒤에 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장괘에 앉아 즈긋히 눈을 감는다.

서로를 응원하며 깊은 밤, 바람 소리에 묻힌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8일 간의 침묵 피정을 마치고 각자의 삶 터로 떠나기 전 아침, 파견 미사를 올렸다. 

피정 중에는 신자 석에 앉아서 미사를 참례했지만 

그날 아침에는 오랜 만에 제대 위에서 피정을 동반 해 주신 신부님과 공동 주례를 하였다.

 

그리고 함께 하는 마지막 아침 식사 시간에

모두가 오랜 만에 말 문을 열면서 그 화제의 중심에는 단연 내가 있었다.

 

내용인 즉슨,

피정을 시작할 때 처음 자기 소개를 할 때

나는 예수회원이라는 사실과 함께 나가사키 수도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나이 드신 수녀님들은 흔치 않게 까만 머리의 젊은 예수회 수사가 당신들과 함께 피정을 하기에

'당연히' 신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해서 당신들의 열심한 모습 때문이었던 것도 모르고,

매번 아주 아주 열심히 기도 하는 신학생의 반듯한 모습이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제발 저 신학생이 하느님 아버지의 좋은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소서'라며 기도했단다.

그런데 그 아침, 그 '열심한 신학생'이 새하얀 제의를 걸치고 제대에 오르자

할머니 수녀님들이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본의 아니게 수녀님들의 심장에 무리를 준 것이다.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분들이 보시기에는 당신들의 반도 미치지 못한 젊은 신부에게 당신들의 축복을 빌어 주고

또 앞으로 당신들의 마지막 날까지 기도를 해 주시겠다면 세례명과 이름을 받아 적어 가신다.

일본 사람 이름들을 외우는 것에 좀처럼 젬병인 나로서는 차마 묻지도 못하고 감사를 전하며

나의 기도 중에 그분들 인자한 모습들을 떠 올리며 고마움과 기도 한 줄 더한다. 

 

좋으신 하느님, 평생을 수도자로 살아 오신 그분들의 성실한 삶에 아버지의 축복을 더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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